출처 : http://bit.ly/1ATVMvz

김춘추, 당에 先 백제·後 고구려 정벌 제안
<83>김춘추의 ‘사대’외교
2013. 11. 13   14:58 입력

김춘추, 생존 위한 몸부림으로 중국과의 동맹 선택  
649년 양국 상호 군사원조와 공동작전에 의견 일치


중국 산동성 엔타이시에 위치한 봉래항의 현재 모습. 고구려로 향하던 수당의 함대가 정박하던 곳이다. 당으로 향했던 신라의 사절단도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필자제공

신라의 김춘추는 649년 당태종에게 고구려를 정벌하기에 앞서 백제를 치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했다. ‘삼국사기’ 답설인귀서를 보면 당태종의 답은 대개 이러하다. 첫째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백제 사이에 끼어 매번 침공을 받기 때문이다. 둘째 태종이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를 신라에게 주겠다. 셋째 두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작전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해 줬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 명분은 신라를 살려주기 위한 것이며, 목표 달성 후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양도할 것을 약속하니 지시한 시기에 군사동원을 하라는 것이다. 명분과 약속은 차치하고 핵심은 당이 고구려를 칠 때 신라는 이전처럼 군대를 북상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김춘추는 주장을 다시 펼 수 없었다. 누구의 안전인가. 당태종도 백제를 먼저 쳐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회담으로 모든 것을 바꾸기 어려웠다. 전쟁준비가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실행되고 있었다. 백제를 침공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 10만 이상의 병력이 동원돼야 하고 그들을 한꺼번에 승선시킬 수 있는 1000척 이상의 대형 선박이 필요했다. 당이 세계적 부국이라 해도 그 많은 배를 한꺼번에 조달할 수는 없었다. 직전 648년 9월 태종은 배 건조에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바 있다.

● 나당동맹은 사대인가?

이어 김춘추는 신라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당나라의 그것으로 바꿔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고, 태종은 내전에서 진귀한 의복을 춘추와 그 수행원들에게 하사했다. 김춘추는 신라에 돌아가 그것을 모델로 카피한 의복을 신라 관리들에게 입게 할 터였다. 그는 연호와 관복을 중국의 그것으로 바꾸면서까지 철저히 당 세계의 일부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동행한 아들 문왕(文王)이 장안의 궁정에 머물 수 있도록 황제에게 허락받았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춘추가 태종에게 말했다.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해 주소서! 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모모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김춘추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단재(丹齋) 신채호는 “김춘추는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청하는데, 당나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의 뜻을 맞추기 위해 아들을 당에 인질로 두고, 본국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그것을 쓰고, 본국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그것을 쓰기로 하여 조선에 사대주의의 병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나아가 신채호는 나당동맹에 대해 “이종(異種)을 초(招)하여 동족을 멸(滅)함은 도적(寇賊)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의 주장을 현재에 와서 수긍하는 사람들이 없지도 않다. 그렇다면 신라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당에 청병도 하지 않고 멸망당해 줘야 했다는 말인가? 청병은 신라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 김춘추, 당조정에 대사조직 설치

김춘추가 자식을 남겨놓은 것도 신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문왕은 전권대사와 같은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아래에는 무관 관직을 가진 대감과 그 아래 집사·시종들이 딸려 있었으리라. 같은 시기 김춘추는 왜국에도 자기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649년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을 떠난 그를 대신해 파견됐다. ‘일본서기’에 649년 왜국에 온 김다수 휘하 조직이 보인다. “승려(僧) 1명, 시랑(侍郞) 2명, 승(丞) 1명, 달관랑(達官郞) 1명, 중객(中客) 5명, 재기(才伎) 10명, 통역(譯語) 1명, 여러 시종(?人) 16명, 모두 37명이다.” 

645년 2월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보낸 외교문서가 실려 있는 ‘문관사림’을 보면 전년(644) 김다수가 당을 방문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 이때에도 김다수는 자신의 조직을 데리고 당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4년 후 김춘추가 입당할 때 동행한 외교사절은 이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귀국 시 사절단 인원 중 상당수를 아들 문왕과 함께 남기고 간 것으로 보인다. 

문왕은 당조정의 고위관리들을 만나 관계를 강화하고 신라에 유리한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신라에 보낼 정보를 수집해야 했으리라. 국학에 유학 온 신라학생들의 교우관계를 이용해 당을 둘러싼 전 세계의 정보도 들어야 했고, 무엇이 당의 한반도 군사개입의 장애가 될지도 파악해야 했으리라.

원활한 양국의 소통을 위해 당태종은 신라 측의 외교활동을 장려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춘추를 특진에, 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였다. 춘추가 귀국할 때, 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신라에 귀국하는 김춘추가 받은 특진도 주목해야 하지만 김춘추의 아들 문왕이 받은 좌무위장군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황제 측근의 경호를 맡고 있었던 관직이다. 그것이 허직이라 치더라도 황제의 임용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태종이 연회를 열어 떠날 김춘추와 남을 김문왕에게 3품 이상 관리들과 관계를 트게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문왕은 좌무위장군으로서 고위 신료들과 당당히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됐다. 651년 문왕이 귀국하고 형인 김인문이 입당해 그 자리를 맡는다. 동생이 인수인계를 해주고 또한 현지에 남겨 놓은 조직들이 있었기 때문에 외교활동은 김인문에게 승계될 수 있었다. 

■ 중국의 전함건조 비용
 
648년 6월 당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침략할 때 사용할 배를 건조하는 임무를 사천(四川:劍南道) 지방에 부과했다. 수 말 내란기에 피해가 없었고, 3년 전 그의 고구려 침공 때에도 징발을 면해 다른 지방에 비해 부유했기 때문이다. 완성된 배는 양자강을 통해 바다로 나와 산동 반도의 래주(來州) 해군기지에 인도될 예정이었다. 

역의 부과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강압적인 노역이 실시되는 가운데 문제가 생겼다. 9월에 목재를 마련하는 요역을 상당부분 담당했던 사천성의 요족(瑤族)들이 중앙에 대해 무장봉기했다. 그러자 당조정은 감숙성농우지역의 기병과 사천 분지 협중의 보병 2만을 파견했다. 전쟁을 위해 양성된 무장들이 많아 반란은 금방 진압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술적인 문제는 어찌할 수 없었다. 배를 건조하는 요역을 명받은 사천성 사람들 일부는 건조 기술이 있는 호남성 사람들을 자비로 고용하는 것을 황제에게 허락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정부가 급박한 인도일을 맞추기 위해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독촉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백성들이 밭 집 자녀를 팔아도 공급할 수가 없었고, 곡식 값이 급등하여 검외(劍外:사천성 중부와 운남성)가 시끄러웠다.” 

그러자 태종이 자신의 정책집행 문제점에 대해 스스로 점검하기 시작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큰 배를 만드는 데 사람 고용 비용이 비단으로 2236필이 든다. 산에 잘라놓은 나무를 다 운반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배 만드는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을 징수하니 백성들은 감당할 수 없다. 황상이 마침내 칙령을 내려 ”담주(호남)에서 배 만드는 데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관청에서 지급하게 하였다.” 성마른 황제의 고구려 침공 야욕의 성급함을 누구도 나서서 제지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과 자식을 파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고서야 황제가 정책을 바꾸는 전제국가의 잔인하고 비효율적인 모습이 보인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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