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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진압한 김유신, 신라 정국 장악하다
<79>비담의 난
2013. 10. 16   17:38 입력

역사 속에 큰 변화는 항상 예기치 못한 것에서 생겨나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647년 1월 비담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에서 여왕 폐위 결정을 내렸고, 여왕이 승복하지 않자 귀족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성을 압박했다. 낙동강을 건너올 백제군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김유신은 군대를 신라왕경으로 돌렸다. 우려했던 백제의 외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전이 벌어졌다.

여왕 폐위 결정에도 승복 않자 귀족들 군대 일으켜 위기의 상황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전면에 등장해


경주 보문호에서 바라본 신라의 명활산성, 거대한 탁자 모양을 하고 있다. 647년 비담의 귀족 군대가 진을 쳤던 곳이다. 필자제공


명활산성 입구 쪽 성벽.

▶독재정권 등장의 산고

군사적으로 유능한 그는 타고난 선동가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병사들 앞에서 언급한 싸움의 명분을 이렇게 전한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른바 난신적자(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다.” 

신라의 왕경에서 김유신 사단과 귀족들이 이끄는 병력이 뒤엉켜 싸우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김유신의 군대는 진평왕 말년부터 고구려군·백제군과 지속적으로 맞서 싸워온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군대도 만만치 않았다. 

김유신 군대는 왕성인 현재의 반월성에, 귀족 군대는 명활산성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양쪽 병사들은 싸우다 지치면 성으로 들어가 먹고 쉬었고, 대기하던 병력이 다시 투입되기를 반복했다. 성 밖에서 멀어진 전투는 시가전이라 야전에서의 그것과 양상이 달랐다. 진법이 소용이 없었고,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소규모 부대별로 단병접전이 벌어졌다. 

긴 창보다 짧은 검이나 도끼가 사용된다. 그러니 전투는 피를 튀기는 백병전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단기간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반월성과 명활산성 사이에 위치한 민가들이 폐허가 되었으리라. 언제나 아무런 죄 없는 백성들이 피해자였다. 

첩자를 통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신라 놈들끼리 피가 터지게 계속 싸워라! 내가 너희 나라를 접수해 주마.” 의자왕이 원하던 것은 신라의 장기적인 내투였다. 전쟁기간에 내분은 나라가 망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카리스마를 가진 군사 지도자 등장의 산고이기도 하다.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내분은 10일 만에 너무나 빨리 수습됐고, 용병의 천재 김유신이 신라의 군부를 장악했다. 의자왕이 향후 백제 멸망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한 김유신을 신라군 총수자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의자왕은 자신이 점령한 대야성이 김춘추·김유신의 유능한 독재정권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지 꿈에도 몰랐다. 

▶즉결처형 

귀족들은 시가전 초반부터 지방 영지에 있는 자신의 병력들을 불러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란의 장기화를 우려해 그들은 즉시 처형됐다. 647년 음력 1월 17일 눈 빨이 날리는 왕경이었다. 그렇게 춥지는 않아 눈은 땅에 떨어지자 바로 녹았다.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왔다. 왕경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승리한 김유신은 30명을 줄에 엮어 개처럼 끌고 왔다. 왕경의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처형장에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 위에 도살장의 짐승처럼 꿇어 앉혀졌다. 그들의 죄목이 열거됐다.

그렇게 많은 진골 귀족이 한순간에 처형된 적이 없었다. 한 명 한 명 차례로 목이 떨어져 땅에 굴렀다.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자들의 고통이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고결한 진골 귀족들의 피가 새로운 여왕의 등극을 알리는 희생제의 제단에 뿌려졌다. 

백성들은 처형 장면을 담담히 보았으리라.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살고 있던 그들은 패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쯤 당연하게 여겼다. 김유신의 군대가 그 유구한 전통의 신라 화백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처형당한 사람들은 모두 여왕을 능욕한 역적이 됐고, 승자인 김유신이 조정을 접수했다. 군부 내부에 대대적인 숙청이 행해졌고, 요직에는 김유신의 사람들이 둥지를 털었다. 신라의 군부는 용병의 천재 김유신 한 사람 손에 완전히 장악됐다. 향후 신라군이 이만큼 효율성 있게 돌아간 적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백제에 잃은 국토를 수복하고 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가 맡겨졌다.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신라 사람들은 고귀한 출신의 왕과 왕족에 대한 숭배 의식이 강했다.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직계가족은 그 외의 왕족들보다 더 고귀한 존재였다. 신라 사람들은 성골 왕을 숭배했다. 진덕여왕은 당시 생존한 왕실 근친 가운데 부계로 본다면 선덕여왕과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다. 

그녀는 김유신의 든든한 방패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유신은 결코 전통을 무시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더욱 낮췄다. 적어도 김춘추가 도착할 때까지는 군사 외에 많은 사안 결정을 미뤘다. 

▶김춘추의 귀환

‘구당서’를 보면 647년 선덕여왕의 부음은 국상을 알리는 사절들에 의해 당에 전해졌고, 그 이듬해인 648년에 김춘추가 장안에서 당태종을 만났다. 그렇다면 신라의 변화는 647년 왜국에도 곧바로 마찬가지로 통보됐을 것으로 보이며, 사절의 손에는 김춘추의 귀환을 요청하는 국서가 들려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이 왜국에 체류하는 사이에 신라에서 벌어진 정변과 새 여왕의 등극을 전해들은 김춘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급히 왜왕으로부터 귀국허락을 받아야 했다. 왜국의 입장에서도 신라의 정권교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체류 경험이 있어 자국에 대한 이해력이 있는 신라의 근친 왕족이 돌아가 실권자가 된다. 

나라(良)에서 출발한 김춘추는 남바(難破)에 가서 규슈(九州)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의 세토내해 항해에는 암초와 해류 문제로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으리라.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신라로 향하는 배를 갈아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에 도착했다. 여정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했으리다. 

김춘추가 신라왕경에 도착하자 새로 즉위한 진덕여왕을 알현하기에 앞서 성공한 정변의 주역 김유신을 만나 그간 상황변화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자신은 신라 군부를 장악했고, 귀족회의 의장직을 알천에게 맡겼으니, 향후 대당외교를 주도하기를 권했을 수도 있다. 신라가 당시 절실했던 대당 군사외교에는 근친 왕족이라는 신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신라는 대외적 위기 상황에서 김춘추와 김유신 두 인물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신라의 구체제를 뒤엎고 등장한 신정권의 앞길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왜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고 백제·고구려의 침공도 성공적으로 막아내야 한다. 나아가 당과 군사동맹을 시도해 이러한 포위된 상황을 급진적으로 타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희망을 주어야 진골 귀족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만성적인 전쟁에 계속 동원할 수 있다. 

▶김춘추 당으로, 김유신 전쟁터로 

김춘추는 외교에 모든 것을 바쳤다. 왜국에서 귀국한 그해 곧바로 당태종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김유신은 전쟁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매 전투에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결정적인 패배는 그의 카리스마 상실로 이어질 수 있고, 신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는 진골 귀족들의 반격을 가져올 수 있다. 어떻게든 수없이 지속되는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서도 계속 승리를 해야 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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