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652년 말갈기병 이끌고 동몽골 진출
(86) 고·당의 대결과 거란
2013. 12. 04 14:54 입력
시라무렌 강 일대 거란족 장악…안전하게 생활하도록 도와
654년 말 동몽골서 당군 격퇴한 뒤 신라 성 33개 함락시켜
누런 물이 흐르는 요하 상류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는 초원이 있다. 초평선이 하늘과 붙어 있는 광활한 그곳은 유목민인 거란족과 해족(奚)이 4세기께부터 목축을 하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내몽골 동쪽지역에 위치한 유역 면적 3만 ㎢에 이르는 시라무렌 초원은 중원, 돌궐, 고구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7세기 당시까지도 이곳에서 중심을 이루는 세력은 없었다. 주변 3대 세력 힘의 강약에 따라, 유목민 부족들은 각기 흩어져 중원의 왕조나 돌궐 또는 고구려에 붙었다.
동몽골 시라무렌 초원에 유목민의 집인 파오가 서 있다. 서기 652년부터 고구려는 고구려군과 말갈족 병력을 이끌고 이 초원에 진출해 당군과 격전을 벌였다. 필자제공
고구려의 시라무렌 장악
645년 당태종은 거란족과 해족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한 바 있다. 설연타를 멸망시킨 2년 후인 648년 11월 그는 거란의 대하부락연맹(大賀部落聯盟)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와 10개의 기미주(羈?州)를, 해에 요락도독부(饒都督府)와 6개의 기미주를 설치했다. 양부(兩府)는 영주도독(營州都督)이 감호(監護)하도록 했다. 당태종은 이듬해 계획된 고구려 침공에 거란과 해를 선봉으로 내세울 작정이었다. 그는 이민족을 기미부주라는 굴레에 묶어 영토를 팽창시켜 왔다. 기미부주는 폭력을 유통시키는 장치였으며, 당 제국의 세계지배 도구였다.
하지만 649년 당태종이 죽었고, 서돌궐이 당에 대항해 일어섰다. 당나라가 동돌궐의 부족들을 중앙아시아로 이끌고 가서 서돌궐의 여러 부족과 전쟁을 하던 이 시기에 시라무렌 초원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력이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거란과 해를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라무렌에 대한 지배력이 뿌리를 내리면 거란과 해족은 고구려 휘하 기병이 되어 당나라를 칠 것이다.
652년 시라무렌 초원에 고구려가 말갈기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거란족과 해족의 부족장들은 고구려 군대의 위용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들은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고 협조할 것을 약조했던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고구려가 어떻게 그들을 다루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한다. 고구려는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거란과 말갈인들에게 안전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물자를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그것은 수백년 이상 그들과 함께 살아온 고구려인들의 관리방식이었다.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상황은 언제나 시련이자 기회였다. 시련은 고구려인들에게 살아남는 법과 더불어 어떻게 휘하의 그들과 공생할지에 관한 가르침도 줬다.
거란족들의 모습을 묘사한 중국 송나라 시대의 그림. 고구려와 당나라가 대결할 때 양국은 항상 거란족을 먼저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료사진
당의 힘겨운 반격
당시 당은 서돌궐과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653년 서돌궐 내부에 일부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그해 아사나하로의 부하인 을비돌륙가한이 죽고 그 아들 진주엽호가 오노실필과 함께 당에 청병을 했다. 그들이 아사나하로의 천막궁정을 습격해 그 부하 1000명을 죽이고 당에 사람을 보내 청병했던 것이다. 당과 서돌궐의 전쟁은 2막으로 들어섰다.
653년 2월 당은 병력을 출동시켰다. 시라무렌에 대한 고구려의 잠식을 무조건 방기만 할 수 없었다. ‘신당서’ 위대가전은 이렇게 전한다. “장군 신문릉(辛文陵)이 고구려군을 초위(招慰)했는데,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고구려군)에게 습격을 당해, 위대가는 중랑장 설인귀와 함께 가서 싸웠다. 신문릉은 고전했으나, 마침내 죽임은 면하게 됐다. 위대가는 중상을 당했는데,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신당서의 기록을 해석해 보면 영주도독부 북쪽의 시라무렌 유역에서 당과 고구려군의 접전이 벌어진 것이 확실하다. 당나라 장수 신문릉이 그곳에 나타나자 그 정보가 고구려군이 진을 치고 있던 시라무렌의 신성(新城)에 들어왔다. 고구려 기병이 곧장 요격에 나섰다. 광활한 초원의 언덕 아래에서 고구려군이 번개처럼 나타나 당군의 옆구리를 쳤다. 역습에 놀란 당군은 궤멸하고 장군 신문릉은 절명의 신세가 됐다.
당의 중랑장 설인귀(薛仁貴)와 과의 위대가(韋待價)가 분발했고, 주춤하던 사이에 신문릉은 빠져나가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당나라 구원군도 상당히 타격을 받았다. 고위 장교인 위대가는 화살을 왼쪽 다리에 맞아 중상을 당했다.
654년 10월 연개소문은 장군 안고(安固)와 그 휘하 고구려·말갈기병을 출격시켰다. 작전의 목적은 당나라 송막도독 소속의 거란군을 시라무렌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송막도독 이굴가(李窟哥)가 고구려 군대를 막아섰다. 두 군대는 화살의 사정거리가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대진했다. 그리고 전진하다가 화살을 쏟아냈다. 하늘이 검게 물들었고, 이내 서로의 진영에 떨어졌다. 양측의 기병들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엉켜 싸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체력이 고갈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동작이 느려져 갔고, 후퇴의 나팔 신호와 함께 양군은 서로 물러섰다. 고구려 군대는 시라무렌 초원 위에 세워진 성인 신성(新城)으로 들어갔고, 당군은 영주로 물러났다.
수당전쟁의 화약고 시라무렌
654년 말 동몽골에서 당군을 격퇴한 고구려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렸다. 여기에는 말갈군대가 대규모로 동원됐다. 백제를 끌어들여 신라군을 남쪽에 묶어 놓고 성 33개를 함락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그해 고구려는 충격을 가해 신라 조야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삼국사기’ 태종무렬왕 5년 조를 보면 이때 신라의 동해안 북쪽 국경선이 강릉 이북까지 밀려내려 간 정황이 포착된다. 655년 1월 신라의 왕 김춘추가 사신을 당에 보내 고구려 접경지대의 성 33개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당고종은 2월 25일 요서에 위치한 영주도독부에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나당동맹의 성의는 보여야 했다.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휘하 좌위 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발동했다. 655년 5월 14일 당군은 고구려의 성 앞에 도착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고구려는 그 군사가 적은 것은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서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이 분발해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죽이고 붙잡은 사람이 1000여 명이었고, 그들의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당나라 군대는 요수를 건너 고구려와 접전을 벌이고 귀환했다. 고구려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치고 빠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이 시라무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소사업(蕭嗣業)이 이끄는 회흘(回紇) 기병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당서’ 회흘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휘 6년(655) 회흘(제 부족)이 군대를 보내 소사업을 따라 고구려를 토벌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당제국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을 휘하에 두고 부리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했다. 수당의 지속적인 유인정책으로 고구려로부터 그들의 이탈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당은 그들의 추장들에게 작위와 벼슬을 주고, 대규모 물량공세를 취했다. 가능하다면 고구려에 대한 대리 공격을 감행할 용병으로 그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수당과 고구려 사이의 전쟁은 언제나 둘 사이에 있는 거란과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시작됐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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