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BejNwF

<75> 요지부동의 안시성
唐, 황제의 안전을 고려해 과감한 작전 기피
2013. 09. 05   15:00 입력

방어 유리한 안시성…
세계 최강 군대에 대항고구려, 설연타와 연계 전세 역전의 계기 마련


안시성의 장대로 추정되는 장소. 평범한 언덕처럼 보이는 이곳이 645년 당나라군의 침공에 맞서 안시성을 방어하던 고구려의 장수가 지휘하던 곳이다. 필자제공

고구려의 주력군단 15만이 안시성 부근 주필산에서 궤멸한 직후 645년 7월 안시성에 대한 당태종의 공격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던 성의 주민들은 생사의 기로에 직면했다. 그들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싸웠던 현장을 가 보자.

◆ 현장에서 본 안시성 

안시성은 현재 요령성 해성(海城)시 영성자촌에 위치했다. 정문은 서쪽으로 나 있고, 산성이지만 높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00미터 정도다. 산의 경사도는 상당히 완만하고, 성의 규모도 크지 않았다. 둘레가 4킬로미터 정도였다. 환도산성보다 내부 면적이 좁고 남북의 경사도 완만하다. 치나 옹성구조, 적대 등 특별한 구조물의 흔적도 없다. 세계 최강의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성의 규모가 작다는 것이 약점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성벽이 짧아 촘촘하게 병력을 배치할 수 있다. 경사가 험하지 않은 것도 성민이나 병사들이 전쟁 물자를 성내에서 옮기는 데 용이하다. 성벽도 대부분이 진흙을 판축해 만든 토성이었다. 석성과 비교해서 안시성이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투석기의 공격에 더 강했다. 

성안에 개울이 하나 흐르는데 깊이는 현재는 주먹 하나 잠길 정도다. 격전 당시 수만의 사람이 먹을 식수였고 화공에 대비한 소화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시성 사람들은 화공에 대비해 개울물을 비축했으리라.

안시성에서 고지인 점장대에 오르면 성안 전체가 한눈에 보이고 아래쪽 성안에서도 그곳이 보인다. 성주는 그곳에서 상황을 살펴가며 전투를 지휘했으리라. 성 전체의 인적·물적 자원 배치를 조율했고, 어느 곳이 비거나 중복되는 상황을 배제하기 위해 세심한 명령을 내렸으리라.

◆ 치열한 격전 

성이란 어느 한 곳이 약화되는 순간 함락된다. 물론 그것은 유동적이다. 적들이 어느 부분을 집중 공격하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전력 집중의 조율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성은 함락되고 만다. 안시성이 넓지 않았다는 것은 장점이었다. 명령이 원활하게 병사와 백성들에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성벽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이 안시성 사람들은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분주하지만 질서 있게 움직였을 것이다. 1만에 달하는 병사는 물론이고 2만의 남녀노소도 지원부대로 잘 조직돼 있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성안에 비축된 화살과 창 등 소모성 무기를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조직적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안시성에는 해자의 흔적이 없다. 하지만, 산성이라 공성기를 성벽으로 가져가기 쉽지 않다. 안시성은 성벽의 90퍼센트 이상이 산 위의 토벽이다. 당군이 공성기를 동원해 집중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은 낮은 성의 정문 쪽이었다. 

그곳의 성벽은 두터웠다. 초반 공성기 공격을 예상하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안시성 문 입구에 성문을 때려 부술 파성추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석기 등 당군의 장비가 집중 배치됐다. 300근의 돌을 400미터 날릴 수 있는 성능이었다. 거대한 돌들이 안시성의 성벽에 부딪쳤을 것이다. 성이 무너진다 해도 그것은 두터운 벽의 바깥부분이었고, 목책으로 막고 보강하면 성벽 자체에는 큰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 수차례의 공격을 받았던 성안은 안전한 곳이 없었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여기서 얇은 토기에 석회와 비소가루를 채워 넣은 유독가스를 내뿜게 하는 발연탄이 터지는 소리, 하늘을 검게 덮은 화살들이 지상에 떨어지는 소리, 적군의 활에 맞아 절규하는 병사들의 소리, 죽은 남편과 아들을 끌어안고 우는 소리, 죽은 자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화장할 때 피어나는 살이 타는 냄새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안시성 사람들의 절규에 가까운 저항은 자신들의 자유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치통감’을 보면 당태종에게 항복한 고구려 장군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 사람들의 사투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집안을 돌보고 애석해하면서 스스로 싸우니 (안시성을) 쉽게 뽑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태종이 안시성 부근에 도착한 것은 645년 6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안시성은 8월 당시까지 요지부동이었다. 

◆ 당군의 대안 

항복한 고구려 장군 고연수와 고혜진은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당태종에게 말했다. “오골성의 욕살(褥薩)은 늙은이여서 굳게 지킬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서 아침에 그곳에 다가가면 저녁에 이길 것입니다.”

이어 지역 본부인 오골성이 함락되면 주변의 여러 작은 성들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고 군대를 몰아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나가면 승산이 있다고 했다. 당태종의 신하들도 모두 찬성했다. 하지만, 황제의 처남인 장손무기가 반대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천자가 정벌을 나왔으니, 여러 장군이 온 경우와 달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행운을 발할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에 고구려군 10만이 버티고 있는데 오골성으로 향하면 그들이 뒤를 칠 것입니다.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멀리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안전한 대책입니다.”

당나라군의 총사령관 이세적은 당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한 그는 신성 공격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장검도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요동성 공략을 위해 병력을 돌렸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정치가 작전에 개입하면서 그 순수성은 떨어졌고, 병력 10만을 보유하고 있던 고구려의 거성(巨城) 신성과 건안성이 살아남았다. 이제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본체인 황제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당태종과 장손무기가 내놓고 밝힐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7월 말에서 8월 초반 사이에 초원의 강자 설연타가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당서’ 집실사력전에 그 침공을 막아낸 기록이 보인다. 설연타가 당나라 수도권 부근에 공격을 시작한 상황에서 당군은 고구려 심장부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미 설연타의 침공에 대한 대비가 있었고, 집실사력이 그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중압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 설연타의 당 침공 어떤 사연이?
 
설연타의 진주가한은 건강상 당을 침공할 기력이 없었다. 당태종은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연타가 군대를 움직였다. 진주가한의 신변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은 정관19년(645년) 8월 10일 조에 주석을 달아 지금은 사라진 당태종실록을 이렇게 인용했다. “상(태종)이 근신에게 ‘내가 연타(진주가한)의 죽음을 헤아리고 있다’고 말했지만, 듣던 자가 능히 알아듣지 못했다.” 

안시성 앞에 있었던 당태종이 설연타 진주가한의 죽음을 짐작했다. 뜬금없는 말로 보인다. 하지만 예사로 볼 문제가 아니다. 설연타의 병권이 당태종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주가한의 아들에게 넘어가 당을 침공했고, 그래서 그가 진주가한의 죽음을 헤아리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설연타의 진주가한이 임종의 병석에 누워 있는 사이에 병권을 거머쥔 그의 아들 발작이 10만 군대를 일으켜 오르도스의 하주(夏州)로 향했다. 그곳은 장안의 북쪽으로 당나라의 수도권과 가까우며 탁 트인 평원이다. 거액의 공작금을 소지하고 몽골리아에 도착한 고구려의 사신은 당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진주가한을 뒤로 하고 그의 아들 ‘발작’을 부추긴 것 같다. 고구려의 대설연타 공작이 성공했다.
 
<서영교 중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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