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영토확장, 이거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열네 번째 이야기
11.03.07 11:35 l 최종 업데이트 11.03.07 11:35 l 김종성(qqqkim2000)


▲  고구려인들의 모습. 경기도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에 전시된 그림. ⓒ 김종성

성장기의 고구려가 '만주대로'에서 '광란의 질주'를 하는 동안, 중국 측은 별다른 제어를 가하지 못했다. 그냥 지켜만 볼 뿐이었다. 물론 바리케이드로 고구려의 서진(西進)을 막아보려 했지만, 고구려의 힘과 속도 앞에서 그것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누구도 고구려의 영토팽창을 저지할 수 없었다. 

중국이 고구려의 성장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표면적 이유는 중국대륙의 분열이었다.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인 한나라가 붕괴된 후 그것을 계승한 후한(25~220년)이 부활했지만 후한은 이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중국의 중앙집권은 후한 때부터 약해지다가 3세기 이후 위·촉·오 삼국시대와 5호 16국 시대의 분열기로 연결됐다. 다섯 오랑캐(5호) 즉 다섯 유목민족이 세운  16개국이 북중국에서 순차적으로 명멸한 5호 16국 시대의 중국에는 원심력만이 존재하고 구심력은 부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시대는 중국 분열의 절정기였다. 

고구려의 성장은 후한 이후 중국의 약화 및 분열에 힘입은 것이었다. 5호 16국 시대의 분열이 수습된 뒤인 남북조 시대(420~589년)부터 고구려가 '중국을 겨냥한 서진'에서 '한반도를 겨냥한 남진(南進)'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5세기 이전 고구려의 성공이 중국의 분열에 힘입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이 잘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중국 한랭건조기와 시기를 같이 하는 고구려 성장기


▲  양자강의 모습. 309년에는 양자강이 말라붙을 정도로 중국이 매우 건조했다. ⓒ 김종성

그런데 고구려가 행운을 거머쥔 데에는 흥미롭게도 기후변화가 상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평균기온 1℃의 하강이 고구려의 대약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의 분열이라는 표면적 현상의 이면에는 기후변화라는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중화민국)의 기상학자인 류자오민(유소민)이 쓴 <기후의 반역>에 따르면, 중국의 기후는 기원전 29년부터 한랭건조기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되어, 북쪽 몽골초원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던 온난다습기가 종결되고 이때부터는 한랭하고 건조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성장기는 중국의 한랭건조기와 시기를 같이했다. 

고구려가 한창 성장할 당시 중국의 기후가 한랭하고 건조했다는 점은 사료에서 쉽게 확인된다. 한국측 사료인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라거나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라는 식의 기록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중국 사료에는 그런 기록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많은 눈이 내렸다"라거나 "몹시 추웠다"라는 식의 기록만 나올 뿐이다. 

중국측 사료에서 당시의 기후가 '한랭'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만 열거하면, "(기원전 21년) 음력 4월, 눈이 내려 제비가 죽었다", "(서기 241년) 음력 정월, 양양(襄陽)에 눈이 많이 내려 석자나 쌓여서 새와 짐승의 3분의 2가 죽었다", "(346년) 음력 8월, 기방(冀方, 중원지방)에 많은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대부분 얼어 죽었다" 등등이 있다. 

<고금도서집성> <삼국지> <진서> 등에 나오는 위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중국이 얼마나 추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음력 4월 즉 양력 오뉴월에 눈이 내려 제비가 얼어 죽을 정도였다고 한다. '새와 짐승의 3분의 2가 죽었다'나 '사람과 말이 대부분 얼어 죽었다'란 표현은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실제로도 동식물과 사람이 상당 규모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런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기후가 '건조'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236년) 10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다음 해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여러 해 동안 초목이 마를 정도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309년) 큰 가뭄이 들어 황하·양자강·한수·낙수가 말라붙어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335년) 천하가 가물었다. 쌀 한 말에 500전이었다. 처자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등등을 들 수 있다. 

<삼국지>와 <진서> 등에 나오는 위의 기록들 역시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 역시 당시 중국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기록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당시 중국이 한랭하고 건조했다는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평균기온 1℃ 오르면 농지 가격 2천만 원↓


▲  서기 241년에 폭설 피해를 입은 중국 호북성 양양. 사진은 양양 성벽. ⓒ 김종성

한랭건조로 인해 당시 중국의 기후는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추웠다.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대략 1℃ 정도 낮았다고 보면 된다. '1℃ 낮아진 것을 두고 상당히 추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좀 과장이 아니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5천 년간 중국이 가장 따뜻했던 기원전 3000년경의 평균기온은 영상 2℃가 조금 안 되었고, 가장 추웠던 18세기의 평균기온은 영하 1℃보다 약간 낮았다. 20세기 중국의 평균기온이 0℃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기온 1℃의 변화에 따라 엄청 추울 수도 있고 엄청 더울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평균기온 1℃'의 중요성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들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평균기온이 1℃ 상승하면 농작물의 재배가능 지역이 위도 상으로는 81km 북상하고 해발고도 상으로는 154m 상승한다고 한다. 예전엔 제주에서만 생산되던 한라봉이 지금은 전북 김제에서까지 생산되는 것은 평균기온이 그만큼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평균기온이 1℃ 상승하면 결과적으로 농지가격이 1헥타르당 최고 2000만 원 가까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농지 면적이 확대되면 그만큼 농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한편, 2010년 10월 국회농림수산식품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바닷물의 온도가 1℃ 상승하려면 핵폭탄 2800만 개가 폭발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평균기온 1℃의 변화가 갖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온 하강으로 농업생산 급격히 감소한 중국

기원전 29년 이후의 평균기온 1℃ 하강 역시 그처럼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한랭건조로 인해 평균기온이 떨어지다 보니 중국의 농업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간경제의 악화를 초래해서 정부의 세입감소로 이어졌다. 정부의 세입감소는 정부의 약화로 연결되었다. 

민간경제가 악화되다 보니 황건적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란이 자주 발생했고, 세입이 감소하다 보니 민란을 진압할 만한 중앙 군사력을 확보하기 힘들어서 민란이 더욱 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치시스템의 불안정과 중앙집권의 약화라는 연쇄효과로 연결됐다. 

중국의 평균기온이 변한다는 것은 중국과 맞붙은 몽골초원의 평균기온도 함께 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몽골초원이 한랭하고 건조해짐에 따라 초원지대에서 목초지가 감소했고, 생활터전을 잃은 유목민들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중국 쪽으로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족들이 북중국에 난입하여 16개국을 세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군사력은 갖고 있으되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유목민들은 중국 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중국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중국 역시 기후변화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균기온 하강으로 인해 정치시스템이 불안정해지고 중앙집권이 약화된 중국으로서는 유목민들이 북중국을 '난도질'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 놓고 국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광개토대왕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경관광장에 있는 광개토대왕 동상. ⓒ 김종성

고구려가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고 만주대륙과 한반도 북부에서 '광란의 질주'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기후변화가 낳은 이 같은 정세변동 때문이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대혼란으로 북중국에서 한족과 유목민이 뒤엉켜 싸우는 틈을 타서 고구려는 안정적으로 영토를 팽창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대성공을 거둔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고구려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이 받은 충격과 비교할 때, 그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었다. 북중국에서는 유목민과 농경민이 총출동하여 세기의 대결을 벌인 데 비해, 만주에서는 고구려 외에 별다른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시끄러운 대결은 나타나지 않았다.  

몽골초원이나 중원이나 만주나 춥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만주 쪽의 정세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기에 고구려가 마음 놓고 국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후변화 덕분에 중국 쪽의 견제를 덜 받고 만주 무대에서 독보적 활약을 할 수 있게 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1도 낮춘 기후'가 춥기는커녕 아주 달게 느껴졌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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