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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구려! -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 대 중국 전쟁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강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08.28 09:53:34
태조왕 이후부터 고구려는 그 동안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 분화가 확대되면서 나부체제는 해체되어 갔고, 중앙집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지배체제의 정비와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는 고구려가 대외전쟁을 활발하게 벌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는 한반도에 걸쳐 있는 주변 부족을 차례로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중국 세력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주적'이 중국이었던 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라는 국가 자체가 중국 군현 세력과의 전쟁 과정을 통해 생겨났던 점을 감안할 때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내용이다.
고구려의 대 중국 전쟁은 소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인 공세로 나간 적이 더 많았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 태조대왕 (53-146)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의 침입에 대비하다.
동옥저를 정벌하다.
갈사국이 항복해오다.
조나를 정벌하다.
주나를 정벌하다.
동옥저를 정벌하다.
갈사국이 항복해오다.
조나를 정벌하다.
주나를 정벌하다.
후한의 현도군 공격하다.
후한 유주자사 침입을 물리치다.
후한 유주자사 침입을 물리치다.
후한 현도군을 공격하였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다.
8. 신대왕 (165-179)
명림답부를 국상에 임명하다.
후한의 침입을 명림답부의 계책으로 물리치다.
11. 동천왕 (227-248)
요동 서안평현을 공격하여 쳐부수다.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물리치다.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옮기다.
242년(동천왕 16)에 고구려는 요동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인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하였다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母丘儉)의 역습을 받아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이 동옥저로 피신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때 큰 타격을 입은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한동안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고구려의 대외 팽창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후, 고구려 5부의 지배자들은 중앙 귀족으로 바뀌게 되었고, 부민(部民)들은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편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체제 변동은 뒤에 소수림왕대의 율령반포로 제도적인 정비를 보는 결실을 맺게 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력을 기른 고구려는 중국이 5호 16국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자 본격적인 대외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12. 중천왕(248-270)
위(魏)의 침입을 양맥곡에서 대파하다
13. 서천왕(270-292)
왕이 신성을 순시하다.
숙신의 침입을 격퇴하다
숙신의 침입을 격퇴하다
15. 미천왕(300-331)
현도군 공격, 8천명을 노획하여 평양으로 옮기다.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다.
낙랑군을 몰아내다.
대방군을 몰아내다.
낙랑군을 몰아내다.
대방군을 몰아내다.
16. 고국원왕(331-371)
평양성을 증축하다.
왕모 주씨가 돌아오다.
왕모 주씨가 돌아오다.
모용황이 침입, 미천왕의 시신과 남녀 5만 명을 잡아가다.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다.
평양 동황성으로 옮기다.
평양 동황성으로 옮기다.
평양성 전투에서 왕이 백제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다
18. 고국양왕(384-391)
요동군, 현도군을 함락하고 남녀 1만을 잡아오다.
먼저 313년(미천왕 14)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지대인 이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두차례의 전연의 침입을 받아, 342년(고국원왕 12)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요동 진출이 용이하지 않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의 방향을 돌렸으나, 새롭게 성장하는 백제와 대결하면서 371년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대 타격을 입었다.
미천왕 이후의 대외 팽창이 서와 남에서 좌절되고 오히려 커다란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새로운 지배질서의 구축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율령 반포·태학 설립·불교 수용 등이 그것이다.
불교의 공인은 보편적인 정신세계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며, 율령의 반포는 일원적인 지배질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었다.
또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를 세울 수 있었다. 다음 단계의 광개토왕·장수왕 대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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