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태의 唐軍 5000명, 고구려 연개소문에 전멸
<97> 소정방의 평양성 패퇴
2014.03.05 17:05 입력
병부상서 임아상도 평양서 전사화살 10만개 등 왜 군수품보급받은 백제 부흥군도 생기
대동강과 평양의 모습. 1400여 년 전에 이곳에서 고구려와 당군의 격전이 벌어졌다. 사진=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제공
661년 9월 계필하력의 돌궐기병 철수는 평양 부근에 잔류한 소정방(蘇定方) 군대에게 치명적이었다. 이제 고구려는 평양성전투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기병 전력이 거의 부재한 상태에서 고구려군과 맞서 싸워야 하는 소정방은 불리했다. 고구려 기병이 돌격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당 보병과 고구려 보병이 싸운다고 가정해 보자. 당 보병은 고구려 기병이 언제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고구려 보병에 대해 공격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대열이 흩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고구려 기병의 존재는 공포를 주어 당 보병을 경직시킨다.
패색이 드러난 소정방의 군대
당고종의 염려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어려움에 빠진 자신의 군대에 대한 식량 보급을 신라에 강요할 작정이었다.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 겨울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 10월 29일 당고종이 보낸 사신이 신라 왕경에 도착해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 황제의 칙지를 전했다. 웅진도독부 주둔 당군에 대한 보급도 하고 있었던 신라는 피폐해진 상태라 곧장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당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사신이 왜국 조정에 전한 661년 12월 평양성전투의 전황을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려가 말했다. 유독 12월에 고려국은 추위가 심해 대동강도 얼어붙습니다. 그래서 당군의 운차(雲車)와 충팽으로 북과 징을 치고 공격해 왔습니다. 고려의 사졸(士率)은 용감하고 웅장해서 당군의 2개 성채(壘)를 빼앗고, 오직 두 개의 성채(塞)만 남아서 밤에 계책을 논의했습니다. 당병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661년 12월 추위는 양날의 칼이었다. 평양성을 감싸고 있는 해자를 얼어붙게 해 당의 공성기가 성벽에 접근하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추위는 당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무서운 적이기도 했다. 고구려군이 당이 평양성 주변에 건설한 2개 성채를 점령했고, 남은 당의 2개 성채도 함락 위기에 있었던 것 같다. 겁먹은 당나라 병사들은 통곡했다.
김유신의 지옥 행군
662년 1월에 가서야 김유신은 당군을 원조하기 위해 9명의 장군과 함께 쌀 4000섬과 조(租) 2만2000섬을 수레에 싣고 평양으로 향했다. ‘삼국사기’ 바탕으로 그 지옥의 노정을 날짜별로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1월 18일, 풍수촌에 머무르게 됐는데 길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해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23일 국경인 임진강(칠중하)을 넘었다. 이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보급대열을 공격해 왔지만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2월 1일, 평양에서 3만6000보 거리인 장새에 도착했다. 보기감 열기와 15명이 고구려 군대의 장벽을 뚫고 신라보급부대의 도착을 통지했다. 이날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다수 얼어 죽었다. 6일 양오에 도착해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 군량을 전달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 11년 조에 실린 답설인귀서는 다음과 같이 다른 사실을 전한다. “용삭 2년 정월, 유 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때 궂은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唐 장군들의 전사
신라가 식량을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군이 평양성 앞에서 군대를 유지시키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662년 2월 평양성 부근의 당군은 절명의 위기에 몰렸다.‘책부원구’ 장수부는 옥저도총관에 임명돼 고구려 평양 전투에 참전한 방효태(龐孝泰) 수군사단의 전멸을 전하고 있다. 방효태는 소정방과 함께 660년 사비도성 점령을 위한 금강 상륙작전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고, 그의 수군은 이듬해 대동강 상륙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 휘하의 병력은 베트남 하노이와 위도가 같은 아열대지역인 광동(嶺南) 출신 수군(水戰之士軍)으로 향리의 자제(子弟) 5000여 명이었다. 녹음이 짙은 남쪽 주장강 델타 유역에서 살던 그들이 고구려에서 상상치도 못한 혹한을 맞이했다. 그들의 주 작전공간이 될 대동강과 사수의 수로는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연개소문의 공격으로 당나라 장군 유백영(劉伯英)과 조계숙(曹繼叔)의 진영이 포위되자 그는 말했다. “나는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겠다. 유백영 등이 어찌 나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우리의 향리 자제 5000명과 함께 지금 죽을 힘을 다해 한 몸으로 싸워 스스로의 삶을 구하겠다.” 사수(蛇水)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에 방효태와 그의 부하들은 포위돼 묶였고, 새까만 화살 구름이 그들 위를 거듭 덮쳤다. 방효태는 사수 전투에서 부하 5000명과 아들 13명이 함께 모두 전사했는데 그들의 몸에서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소정방, 부하들 무덤을 뒤에 남기고
‘자치통감’은 그들의 전몰시점을 662년 2월 무인일(18일)로 명기하고 있다. 임아상(任雅相)이 4일 앞서 평양의 군영에서 죽었다. 전황 악화로 인한 과로와 혈압 상승으로 인한 심장압박이 원인이 된 것 같다.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던 그는 당나라 군사전반을 관장하는 병부상서로서 재상(宰相)이기도 했다. 당나라 군부 수장 1명과 핵심 행군총관 1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군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해준다. 거기다가 큰 눈(大雪)까지 내렸다.
‘자치통감’은 일련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662년 2월) 갑술(14일)에 패강도 대총관 임아상이 군대에서 죽었다. 무인(18일)에 좌교위장군이며 백주 자사인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고구려와 사수에서 싸우다가 군사가 패하니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하고 오랫동안 뽑지 못했고 마침 큰 눈이 내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청해(靑海) 지역에서 토번을 막아내고 서역 천산 북쪽에서 서돌궐을 평정한 명장(名將) 소정방도 평양의 절망적인 상황은 어찌 할 수 없었다. 70살이 넘은 그 노인은 당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수없이 많은 부하의 얼어붙은 시신을 고구려에 남기고 떠나는 그는 하염없는 회한에 잠겼으리라. 우울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60대 중반에 군에 복귀해 승승장구했던 그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날 처지가 됐다.
수로수송의 용이성
당시 백제에 주둔한 당군도 미래가 불확실했다. 백제부흥군에 의해 웅진부성이 포위돼 있는 가운데 신라는 포위망을 뚫고 식량을 져 날랐다. 추위와 피로 전투 중의 사상으로 보급대열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와 말이 급속히 소모됐고, 양식의 재고량도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백제부흥군은 왜의 보급을 제대로 받았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662) 정월 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에게 화살 10만 개, 실(絲) 500근, 비단(綿) 1000근, 포(布) 1000단, 가죽(韋) 1000장, 벼 종자(稻種) 3000곡(斛)을 주었다.” 왜국이 바다를 통해 배로 백제 부흥군에 보급하는 것이 신라가 육로로 평양과 웅진에 보급했던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많은 양을 운반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 정세 변화와 보급수단의 차이는 나당연합군과 고구려ㆍ왜ㆍ백제 연합군 사이의 전력 차를 벌려놓는 데 일조한 것 같다. 이때 포위된 웅진부성에 백제에서 전면 철수를 명하는 당고종의 칙서가 내려왔다. 황제는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대의 전면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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