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52
아! 고구려! - 광개토대왕의 정복 영역과 의미의 실체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강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09.17 11:07:11
최근 발표된 자국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30%선이었던 데 반해 중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상당히 앞섰다고 보도가 되었다. 이는 필자가 단언컨대 올바른 역사 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주변국에 비해 전혀 떨어질 것이 없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민족이 왜 자부심이 떨어지겠는가.
우리나라의 너무나 미약한 역사 교육의 현실을 통탄하며 우리 민족 최대의 자존심,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에 대해 살펴보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알기 위해서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내용상 총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고구려 건국 설화, 둘째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셋째는 능지기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 중에서 광개토대왕의 정복 루트를 알기 위해서는 두 번째 부문을 주목해야 한다. 비문에는, “(395년) (광개토) 대왕이 비려(거란)를 정복하기 위해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를 지나 600~700영(營)을 부수고 셀 수 없이 많은 소와 말과 양을 얻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의 위치
고구려가 거란의 중심지 시라무렌강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집안에서 요양으로 가는 길과 신성으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는데, 요양으로 가는 길은 후대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신성으로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신성은 연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었는데, 신성 서쪽에는 요하(랴오허)가 있다. 지금까지 중국 학계 뿐만 아니라 우리 학계도 고구려의 영토를 이 요하 동쪽 지역으로 한정시켜왔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을 보면 요하 서쪽에도 고구려성이었던 무려라성이 있었다. 무려라성을 지나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요동벌을 계속 가다보면 난데없이 울창한 의무려산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풍부한 나무가 많은 부산(富山)인 것이며 의무려산에서 약 3시간 거리에는 노노루산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산(負山)인 것이다.
2. 염수(鹽水)의 비밀
요서 식화지에는 “요태조(야율아보기)가 강에서 소금을 취해 군에게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시라무렌강 주변 지역에는 염분이 가득 함유된 호수가 있으며 주변에는 버려진 황무지가 있다. 바로 소금 때문이다. 소금이 나는 강과 호수가 있는 시라무렌강 유역이 바로 염수다.
3. 우마군양(牛馬群羊)과 영(營)
우마군양은 초원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영은 중국에서 마을을 부르는 말이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영자라는 말로 남아 있으며, 한 영자에는 15가구 정도 거주한다.
유목민족의 보수성으로 미루어보아 그 수나 규모는 거의 변동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광개토대왕이 600~700여개의 영을 부쉈다는 기록을 통해 정복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4. 후연과의 공방전
비려(거란)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광개토대왕은 양평도, 역성, 북풍, 오비해를 순시하고 사냥을 한 후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것은 후연과 인접한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따라 멀리 돌아온 것이며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의미였다. 후연은 고구려와 전통적으로 적국 중의 적국이었다.
후연은 50여년전 고구려를 침략하여 광개토대왕의 고조할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까지 가져간 적이 있었다. 즉 광개토대왕의 서쪽 변경 순시는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무력시위였다.
이후 고구려와 후연은 유례없는 공방전을 벌였다. 400년 후연, 고구려의 신성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후연과의 전쟁은 약 7년여간 벌어지게 된다. 402년 고구려의 후연의 숙군성 공격은 고구려의 본격적인 후연 공격을 의미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수도인 용성(지금의 조양)으로 진군하였다.
숙군성 공격 후 404년 고구려는 의외의 작전을 펼쳤다. 즉, 연군(지금의 북경 지역)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연군은 만리장성 이남 지역인데 어떻게 고구려가 공격했을까. 거란족을 포함한 북방 민족에게는 만리장성이 장벽이 되지 않았다.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를 비문에서는,
“(407년)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적을 모두 죽이니 그 승리로 얻은 갑옷이 1만여 벌이나 되고 군수품이나 장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전술은) ○○합전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 대해서는 ‘사방(四方)’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원거리 기동 습격, 수륙양면공격 등의 병행 작전을 의미한다.
실제로 고구려는 조양과 숙군성 전투에서 후연의 주력을 붙잡아둔후 백제를 공격했을 때처럼 수군을 이용하여 바다쪽에서 상륙하여 공격하고 육군 중의 일부는 이미 정복한 거란쪽의 배후를 돌아 연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한창이던 407년 7월 후연의 수도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중국 기록에서는 이른 “풍발이 모용이를 죽이고 고운(高雲)이 왕위에 올랐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쿠데타의 주역은 풍발이인데 고운이 왕위에 올랐다? 고운의 할아버지는 50여년전 후연의 침입으로 인질로 끌려갔던 인질 중의 한 사람이었다. 즉 고운은 고구려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연의 왕은 고구려인이 왕이 되고 광개토대왕은 408년 사신을 보내 후연의 고운왕을 같은 종족의 왕으로 인정하여 신하국으로 삼은 것이었다. 광개토대왕 후연 정복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개토대왕은 정복 활동을 펼쳐 국가를 멸망시켜 영역으로 삼는 정복은 벌이지 않았다. 바로 패자국으로서 주변 민족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는 간접지배, 즉 주변국과의 공존공생을 하는,그렇지만 그 가운데에는 고구려가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개토대왕과 大고구려가 생각한 제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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