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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하구를 둘러싼 고대국가들의 각축전 -윤명철" 중 "
3.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각축 
윤명철 2007 

역사시대로 들어와 한강하구의 위치와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경기만과 한강하구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중심부로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三韓)에 소속되어 있던 소국(小國)들의 시대이다. 각각의 소국들은 주로 해안가나 큰 강의 하류에서 발생하고 성장하였다. 농경을 하려면 큰 강 하구나 해안가의 충적평야가 유리하다. 또한 해안가나 강 하류는 각 소국들 간에는 물론이고 바다를 건너 외국과 교역하는데 유리했다. 소국들은 자연스럽게 포구(浦口)나 진(津) 같은 곳에서 교역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성장을 하여 도시국가(都市國家, police)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항(河港)도시, 해항(海港)도시이고, 일종의 ‘나루국가’였다.

 한강 하류의 이러한 전략적인 조건과 역사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삼국은 이를 차지하고 영향권을 확대하기 위하여 존속기간 내내 생존을 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백제는 경기만의 한강수계를 중심으로 한 서부해안에서 건국된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해양 및 한강 하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출발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집단은 선단을 구성하여 연근해 항해를 하다가(필요에 따라서는 연안항해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도중에 몇 군데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남항(南航)하다가 대동강 하구유역을 우회한 다음 경기만의 한 지점으로 상륙하였을 것이다. 비류는 인천지역인 미추홀에서 ‘해항(海港)도시국가’로서, 온조는 서울 일원인 한강가에서 ‘하항(河港)도시국가’로서 발전을 시작하였다. 그 후 고이왕(古爾王) 3년(236)에 왕은 서해의 대도(大島)에서 사냥을 하여 사슴 40마리를 쏘아 잡았다. 이는 물론 해안 방어와 해양 진출을 동시에 모색하는 행위로 판단된다. 백제는 점차 한강 하구를 비롯하여 수도권 주변의 방어에 적극적인 태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자 대방의 왕녀인 보과(寶菓)와 혼인한 백제의 책계왕은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이어 아차성(阿且城)을 쌓고, 사성(蛇城)을 고쳐 쌓고 방어하고자 하였다. 이 두 성은 현재 워커힐 뒷산의 아차산성과 건너편의 구산(龜山)토성 혹은 풍납(風納)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에서 서진의 자기가 발견되었다. '진서'에는 이 시기에 마한으로 알려진 백제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서진과 교섭을 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또 동진의 청자노가 석촌동 고분에서 발견됐다. 강동구 성내동의 풍납토성에서는 동진의 초두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교섭들은 모두 황해횡단항로를 이용한 것이다. 최근에 발굴을 통해서 엄청난 규모였음이 밝혀지고 있는 풍납토성은 백제가 전기부터 교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강변에 위치한 하항도시로서 해양교통에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4세기에 들어오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팽팽한 대결로 한강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의 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 후에도 양국은 주로 패하(浿河, 예성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광개토태왕은 즉위한 해에 한수(漢水) 이북을 점령하고 관미성(關彌城)을 공함하였으며, 석현 등 10성을 빼앗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영락 6년조의 기사에 따르면 대왕은 6년(396)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해양을 통해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때 강화도(교동도를 포함) 혹은 한강수계 하류지역의 한 지점으로 비정되는 관미성(關彌城), 통진(通津)으로 추정되는 비성(沸城)과 아차성(阿且城),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미추성(彌鄒城) 등을 점령하였다.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지대 등을 상당한 기간 동안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 이후에 백제는 한강하구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광개토대왕은 즉위년부터 대왕 17년(407)의 정벌 때까지 계속되면서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한 목적은 국내적인 요인과 함께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행해졌다. 백제를 한반도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려면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은 이후에 사활을 걸고 한강방어체제를 구축하는데 국력을 쏟았을 것이다. 그 후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며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수군작전이 병행되었으며 한 한강변의 방어체제를 공격하면서 도하하거나 직공해 들어왔을 것이다. 특히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한강을 도하하여야 했다. 고구려는 점령지역을 다스리는 행정의 치소(治所)로서 적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성들을 곳곳에 구축하였다. 또한 북진하는 백제나 신라의 세력을 한강 선에서 저지하고자 아차산 용마루봉·양주산성 부근을 중심으로 많은 보루들을 구축하였다. 
  
한강하구를 둘러싼 2국간의 갈등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신라가 가세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쟁패전으로 비화하였다. 웅진(熊津)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꾸준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한강 유역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이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였을 때 백제는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곳이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반증이다. 무녕왕(武寧王)은 즉위(501)하자마자 11월에 황해도의 신계(新溪) 지역에 있었고, 고구려의 중요한 거점성이었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문자왕 12년(503)에 동일한 기사가 실려 있다. 백제는 일시적이었지만 하류 지역을 회복했음을 의미한다. 무녕왕은 523년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아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는 안장왕(安臧王) 때에 다시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하고 더욱 남진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는 성왕 29년(551)에 2차 나제동맹을 체결시켜 한강 하류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2년 후인 553년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뒤이어 이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한강 유역이 신라의 대내외정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긴박한 장소로 부상한 것이다. 이 무렵 신라는 한강변에 현재의 아차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장한성(長漢城)을 축조하였다. 이 무렵 한강의 주변지역에 방어체제를 새롭게 축성하거나 보축하였을 것이다. 7세기에 들어서서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한강 유역은 다시 전장이 되었다.


주석

1)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 1985, 28~29쪽.
2) 하계망(河系網)의 이론에 대해서는 권혁재(權赫在), '지형학', 법문사, 1991, 108~117쪽.
3)  경기만의 가치, 한강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분야에서 연구한 필자의 연구 성과물들이 다수 있다. 
4)  윤명철,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과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의 역학관계」, '고구려남진 경영사의 연구', 백산자료원, 1995, 509쪽.
5)  임효재(任孝在),「경기도 김포반도의 고고학적 조사연구」『서울대박물관 연보』 2, 1990, 13쪽에서 이는 양자강 하구에서 직접 바다를 건너 도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였다.
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 1985, 28~29쪽, 140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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