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Ⅳ.고구려의 성장과 교통로 - 3.육상과 수상 교통로의 연결점, 충주 지역 경영"을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육상과 수상 교통로의 연결점, 충주 지역 경영
이도학 1997년
국내성 도읍기의 고구려는 남진경영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별도(別都)를 설치하였다. 4세기 중반경에 백제경영을 비롯한 전체 남진경영을 총괄하기 위해 고구려는 평양성에 별도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5세기에 접어들자 고구려는 평양성만으로는 한반도의 중심부까지 급속히 확대되는 남진 경영을 극대화시킬 수 없었다. 396년에 이미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40년의 출병(出兵) 이후 그 정치적 영향력과 영토는 신라 지역과 낙동강 하류까지 깊숙히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 지역을 교두보로 한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경영만을 전담할 또다른 별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결과 40~427년 사이 어느 때에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같이 ‘도성(都城)’의 의미가 내포된 국원성(國原城)이라는 행정지명을 충주(忠州)에 부여하여 이곳에 별도를 설치하게 되었다.94) 고구려가 충주에 별도를 설치한 배경은 다음과 같은 정인지의 慶迎樓記 에서 시사받을 수 있다.
충주는 남방의 인후(咽喉)를 질려 막은 곳에 자리잡았다. 지역이 넓고 호구(戶口)가 많다. 이 때문에 공문서(公文書)가 구름처럼 쌓이고 빈객(賓客)이 모여들어 참으로 밝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인재(人材)가 아니면 그 번잡한 것을 다스려 낼 수가 없다…이 고을의 세워진 것이 가장 오래되어 삼한(三韓)의 다투는 땅이 되었다…95)
실제 신라의 진흥왕이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바 있고 통일 후에는 5소경(小京)의 하나인 중원소경(中原小京)이 되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충주에 고구려의 별도가 설치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문화적인 측면은 물론이고96) 지리적인 측면에서 충주는 교통의 요지(要地)라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소백산맥 남북로를 잇는 양대 교통로인 계립령과 직접 통할 뿐 아니라 죽령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충주는 이러한 내륙 교통로를 다시금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연결시켜 주는 위치에 있다. 고려의 12조창(漕倉)의 하나인 덕흥창(德興倉)과 조선의 하흥창(可興倉)이 있던 충주는, 경상도 북부 지역과 충청북도 전역에 걸친 세곡을 모았다가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서 개성 및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맡은 바 있기 때문이다.97)
충주 지역에 대한 별도 설치와 더불어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 지역을 경영하였다. 그 행정통치가 직접 미친 곳은 영주․봉화․예안․청송․청하․영해․영덕에 이르는 구간이었다.98) 이들 구간은 고구려 군대의 주요한 남하 통로인 죽령의 동남 지역에 해당한다. 즉, 죽령을 통한 40년 고구려 군대의 남하로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군량미 조달이나 수송(輸送) 등과 관련하여 1차적(次的)으로 고구려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을 기화로, 점진적으로는 이 지역을 발판으로 동해안 방면으로 영토를 넓혀 나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구려의 남부 교통로는 평양성을 기점으로 할 때, 평양→곡산→원산→강릉→울진→청하→경주에 이르는 것과, 평양→수안→신계→안협→평강→춘천→원주→제천→충주→단양→영주→임하→청송→영일만→경주에 이르는 교통로가 개척되었다.
427년 평양성천도 이후 고구려는 남진경영을 활기있게 추진해 가면서 도로망 또한 정비․확대시켰다. 이러한 선상에서 평양을 축(軸)으로 하여 남으로 이어지는 북-남 교통로의 확장을 가져왔다. 집안 혹은 평양에서 남쪽으로 뻗은 도로의 한 갈래는 평강의 분수령을 넘고 남쪽으로 충청도 지방을 지나 경상도 동북방의 여러 군현(郡縣)들을 연결하였다.99) 게다가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공략에 성공한 후 이곳에 남평양성(南平壤城)을, 그 후에는 황해도 재령(지금의 신원)에 한성(漢城)을 설치하여 이곳을 중간거점으로 하는 동시에 각 지방 행정단위들을 연결하면서 그 관하의 촌락들을 통제하여 중앙 집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교통망을 사방으로 확대시켜 나갔다.100)
고구려는 한반도의 지형조건상 개척이 비교적 용이한 서북(西北)~동남(東南) 방향의 교통로에 대한 일단의 완결을 지었는데, 국내성(집안)→의주→평양성→개성→남평양성(서울)→국원성(충주)→죽령→영주→안동→의성→영천→경주에 이르는 노선(路線)이 되겠다. 동북(東北)~서남(西南) 방향의 교통로는 옛 북옥저 방면에서 동해안을 타고 함흥→원산→추가령구조곡→서울→천안→아산만에 이르는 노선(路線)을 개척하였다. 그럼에 따라 한반도 전역(全域)을 거의 X자형(字型)으로 관통하는 광대한 규모의 간선도로망(幹線道路網)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하 교통로는 전선(戰線)으로 군사력과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교통로의 끊임없는 개척을 가져와 양국(兩國) 군대가 대치한 최전방 군사기지로까지 연속되었다. 이는 54년 고구려 군대가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로 짐작되는 웅천성(熊川城)까지 진격한데서101) 잘 확인되어진다. 또,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 지역과 지금의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인 청주의 낭비성(娘臂城)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을 정도로102) 남진경영의 진척과 맞물려 남과 북을 잇는 교통로는 꾸준히 확장되어 갔다.
주석
94) 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손보기박사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p.105.
95)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忠州牧, 樓亭 條.
96) 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 p.101.
97) 李道學, 위의 논문, p.101.
98)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 pp.94~95.
99) 장국종, 고구려에서의 도로 발전 (력사과학 1985-2), p.12.
100) 장국종, 위의 논문, p.14.
101) 三國史記 권19, 陽原王 10年條.
102) 三國史記 권4, 眞平王 51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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