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Ⅳ.고구려의 성장과 교통로 -  2.남진경영과 육상교통로의 확대"을 가져왔습니다.

남진경영과 육상교통로의 확대
이도학 1997년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동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추가되었다. 즉, 평양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통로가 되겠는데,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평양을 중간거점으로 하여 개성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데, 당시 개성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길은 개성→평산→서흥→황주→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개성→평산→신계→수안→상원→평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84) 고구려는 동시에 원산을 통하여 동해안로를 따라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게 가능해졌다. 고구려는 새로 확보한 남북 교통로를 통하여 여전히 반독립적인 상태로 존속한 낙랑․대방 (故地) 85)에 대한 경영을 강화하여 그 주민들을 체계내로 흡수해 나가는 동시에 비옥한 농경지로부터의 곡물에 대한 공납을 증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백제 지역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촉진시켜 양국간의 간단없는 충돌의 서곡을 알렸다. 

고구려는 원산에서 남하하는 동해안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곳은 백두산에서 산출되는 흑요석(黑耀石)으로 제작한 연모가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에서 출토될86) 정도로 신석기시대 이래의 유서 깊은 교통로였다. 그럼에 따라 고구려는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영일만 방면까지 미쳤던 동예(東濊)에 87) 대한 장악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시에 고구려는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해졌던 관계로, 371년에는 신라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는 한편, 이후 양국간의 관계로 종주(宗主)․신속(臣屬)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88)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는 기후가 온난하여 농경에 적합할 뿐 아니라, 인구조밀 지역인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는 평양성을 축으로 한 대규모 군대의 이동과 물자의 수송(輸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광활한 남진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암시해 주는 자료가 '광개토왕릉비문'이다.

광개토왕은 영락 6년인 396년에 숙적(宿敵)인 백제에 대한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여기에는 첩보전과 기만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감행하기 어려운 의표를 찌르는 수군(水軍) 작전이 주효하였다고 본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일제히 상륙하여 백제 왕성을 포위․함락시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는 속전속결에 의한 기습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즉, 요로마다 포진하고 있는 성곽을 일일이 깨뜨리면서 진격해야만 하는 육로공격은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부담이 실로 큰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반면 뱃길을 이용한 수군작전은 신속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그 배후의 심장부인 백제 왕성을 강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제의 지형지세와 방어망에 대한 사전 탐지가 이루어 졌어야만 가능하다. 역시 첩보전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만전(欺瞞戰)까지 복합되었으리라고 본다. 고구려의 소단위 부대가 정면 돌파식으로 육로 공격을 시도하여 백제 군대의 주력을 북쪽 변경에 묶어둔 다음, 허(虛)를 찌르는 수군작전이 전격적으로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9)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노획한 58성의 소재지는 경기만 일부 지역도 포함하면서 대부분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90)

고구려가 396년에 백제로부터 할양받은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와 가야경영을 위한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즉,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의 진출 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광활한 보급(補給)․수송로(輸送路)인 그 이북의 충주와 단양, 제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겠다. 이와 연관된 전투가 영락 8년조의 백신토곡(帛愼土谷)에서의 초략(抄略) 기사가 되겠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8년조에 의하면 398년 고구려는 소단위 부대를 파견하여 백신토곡을 시찰하고 남녀 3백인을 잡아가지고 왔는데, 이로써 다시금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겠다고 한 내용이다. 여기서 백신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영락 6년 백제 정벌의 여파로 이해하는 동시에 백신토곡을 백제와 인접한 한강 유역이나 강원도 지방의 예지(濊地)로 간주하는 견해91)를 취한다면 이 기사의 성격은 드러난다. 즉,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남한강 상류의 충청북도와 강원도 지역의 예인 거주 지역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반발의 소지가 큰 예인을 견제한다는 측면, 그러니까 한반도 중심부를 관통하는 내륙 교통로의 안전을 점검하기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이지 정복전쟁은 아닌 것이다.92)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고구려는 신라 구원을 명분삼아 보기(步騎) 5만명(萬名)의 대병력을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으로 출병시키는데, 광활한 장거리 교통로의 개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93)


주석

86) 서울大學校博物館, '鰲山里遺蹟' (1984) p.6․69.  任孝宰, 江原道 鰲山里 新石器 遺蹟의 發掘成果와 課題 ('古文化' 34, 1989) pp.125~129.
87) 梅原末治, 晋率善穢伯長銅印 ('考古美術' 8-1, 1967) pp.263~264.
88)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國學硏究' 2, 1988) p.91.
89) 李道學, 광개토왕의 군대는 왜 강했는가 ('꿈이 담긴 한국고대사 노트' 상, 1996) pp.27~28.
90)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國學硏究' 2, 1988), pp.87~107.
한편 李仁哲은 阿旦城으로 비정되는 단양군 영춘면의 溫達城에 고구려성에 나타난다는 ‘雉’가 있으므로, 百濟城이 아니라고 주장한다(李仁哲, 廣開土好太王碑 守墓人 烟戶條를 통해 본 고구려의 남방경영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年', 1997, p.730). 그러나 ‘雉’는 백제토기편이 성안에서 출토될 정도로 명백한 백제성인 온달성을 고구려가 점령한 후 增築한 것일 수 있고, 또 ‘雉’는 신라성인 三年山城이나 백제의 甕山城으로 비정되는 대전의 鷄足山城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雉’의 存否를 가지고 성곽의 國籍을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서, 氏 論調의 전반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아마도 특정인의 說을 부셔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무리수로 여겨진다.
또 氏는 永樂 6年條의 고구려 군대가 점령한 구간을 연천․포천․파주․인천을 잇는 線 以南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며, 다만 광개토왕이 이끄는 소수 병력이 포천을 지나 漢江을 건너와 백제 왕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을 생포했으나, 退路가 걱정이 되어 항복만 받고는 백제군 포위망을 뚫고 황급히 돌아온 것으로 상상하였다(李仁哲, 위의 논문, pp.735~736). 이러한 氏의 주장은 마치 國王이 앞장선 特攻作戰에 의한 前代未聞의 어설픈 要人人質劇을 연상시키는데, 氏는 “광개토왕이 用兵에 能했다( '三國史記' 권25, 辰斯王 8年條)”는 기사를 酷信한 것은 아닐까?
91) 浜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 ('古代朝鮮と日本', 1974) p.58.
王健群, '好太王碑硏究'(1984) p.170.
필자가 이 견해를 取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쟁의 명분격인 전치문이 없다는 점에서, 영락 8년조는 독립된 전쟁 기사라기 보다는 영락 6년조 백제 정벌 기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게 타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92)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p.92.
93) )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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