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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 전투


1. 개요 

246년, 고구려의 동천왕이 조위의 관구검에게 패배한 전투. 수도와 국토 전체가 유린되고 왕이 옥저로 달아나야 했을 정도로 가히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서 최악의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파급력만큼은 쌍령 전투, 현리 전투 같은 한국 역사상의 기라성 같은(...) 패전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2. 전개 

산상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천왕은 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 오나라의 손권이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하려 했는데,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을 잡아 가둬버렸다. 이 사신들 중 몇몇이 탈출하여 도망친 끝에 고구려까지 왔는데, 오나라가 위나라보다 강대하다고 뻥을 쳤는지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무사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234년에 고구려는 위(魏)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보낸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하고 목을 위나라에 보내버렸다. 또한 238년에는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1] 이 때까지의 위나라와의 화친관계는 위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손연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였다.

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AD242)

242년에 고구려는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로 인해 244년[2]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
정시(조방 240-248) 중 관구검이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 동천왕)이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으나,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 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이에 동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인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싸워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 (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를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동천왕은 자신만만하게 선언하기를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나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다.”

이렇게 신이 난 동천왕은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자 밀리던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고, 이에 고구려군이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동천왕은 겨우 1천여명을 이끌고 달아나야 했다.


3. 결과 

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二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賴其利.
(정시)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 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정시) 7년(246년) 봄 2월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고, 여름 5월에 예맥(濊貊)을 쳐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조방/조모/조환전)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恆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중략)…왕기(王頎)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 조

正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시 3년(242년), 위궁(位宮)이 서안평을 침범했다. 정시 5년(244년), 유주자사 무구검(毋丘儉, 관구검의 다른 표기)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가 위궁(位宮)을 쳤다. 위궁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무구검)군을 역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주하니 무구검군이 추격하여 현(峴,고개)에 이르러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고 만여 급을 참획하였고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 6년(245년),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고 무구검이 장군 왕기(王頎)를 시켜 이를 추격하게 하여 옥저를 가로지르며 천여 리를 가서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다.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글자를 새기고 돌아왔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 고구려 조

王頎遂北. 銘勳不耐之城.
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漢書地理志曰. 不而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處. 後漢省. 魏志曰. 正始中. 毋丘儉征高句驪. 遂束馬懸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六年. 復征之. 王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왕기가 마침내 북으로 가 불내성에 공훈을 새겼다.
<고려기>가 말하기를 불내성의 현 이름은 국내성이다. 나라안 동북방 670리에 있으며 본디 한(漢)나라의 불이현이었다. <한서지리지>가 말하기를 불이현은 낙랑군에 속하며,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곳이다. 후한때 사라졌다. <위지>가 말하기를 정시 중,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구려의 도읍을 파괴했다. 참하여 머리를 얻은 것이 수천을 헤아린다. <위지>가 말하기를 정시 중,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 구려의 도읍을 파괴했다. 참하여 머리를 얻은 것이 수천을 헤아린다. 6년, 다시 고구려를 쳤다. 왕인 궁은 마침내 매구로 도망쳤다. 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그를 추적하게 했다. 이에 옥저를 지나 천 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각석기공하여 환도의 산에 불내의 성이라 새겼다. - 《한원翰苑》[3]

패배 결과는 심각했다. 동천왕은 당시 도읍이었던 환도성[4]까지 내주고 말았다. 관구검 자신은 환도성을 화끈하게 불살라버리고 불내성(不耐城, 버틸 수가 없다 견디지 못하는 성)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승리를 기념하여 동북쪽 숙신의 남쪽 경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우고 돌아간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는데 고구려의 동천왕은 목이 달아날 뻔하다가 246년에 이르러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왕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환도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흠좀무) 도읍을 임시로 장안성[5]으로 옮겼다.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전투의 전개과정부터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는 싸움으로, 기록대로라면 고구려군은 위나라 군사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게다가 초반 전황도 더 좋았다. 그런데 동천왕이 드립을 한번 날리고 난뒤, 관구검이 진영을 정비하고 다시 한번 싸우자 2만여 고구려군 중 무려 1만 8천여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고대 싸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경이적인 수준의 살상율이다.[6] 기록이 적어 자세히 전황을 알기는 힘드나 방진의 위엄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동천왕이 방진에 대해 군사적인 이해가 거의 전무하였든가, 동천왕이 위군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해서 주력인 기병을 동원해서 무모한 돌격을 시도했다가 격퇴되자 그대로 전군이 무너졌을 수도 있고.

이 싸움이 파급력이 거대한 것은, 유리하던 전황이 단 한번의 패배로 인해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는 것. 칠천량 해전이나 현리 전투 등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의 파급력이 없었던 반면 이 싸움은 수도 함락은 물론 전 국토를 쑥대밭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이는 패배의 여파이기도 하지만 국내성 인근에 방어선을 유지할만한 지형이 없다는 점도 크다. 이 때뿐만 아니라 후대의 고국원왕도 전연과의 교전에서 단 한 번의 패배로 수도까지 그대로 밀려버렸다. 이러한 양상은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손에 넣고 요동 방어선이 정비할 때까지 이어진다.

주석

[1] 신채호는 수만(數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관구검기공비』에서 244년이고,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이다. 다만 관구검기공비에 대해서는 논란이 약간 있다.이곳 하단 참조
[3] 당나라때 저술된 책으로 본디 30권이었으나 현재는 일본에 국보로 1권만 남아있다. 지금은 유실된 위략, 고려기에서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 많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 고구려는 평화시기에는 국내성, 전시에는 환도성을 도읍으로 했다.
[5] 이 장안성이 평양에 있는 장안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불명확하다. 당시 광무제가 재설치한 낙랑군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장안성은 어디인거냐..
[6] 다만 초반 두번의 승리 후 압도적 병력으로 극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전개는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상대인 중국측의 사료들은 모두 고구려가 승전없이 그냥 스무스하게 밀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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