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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세계 대전 : 고구려 수·당 전쟁
오태진의 한국사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11.05  10:53:36

1.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세계 전쟁 

고구려는 국가가 형성된 이래로 열악한 자연 환경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적 팽창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전제적 군사국가(depostic military state)’의 모습이었다. 

중국의 한 군현 세력과의 필연적인 전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의 후손과, 같은 종족으로 여겨지던 동예와 옥저 등을 압박함으로써 강력한 전제적 군사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소수림왕의 개혁 정치와 광개토대왕의 팽창 정책에 힘입어 4세기 말 이래 하나의 ‘왕국’을 넘어 ‘제국’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다종족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 볼 만한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역사 전개가 중국 세력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피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대륙 관계사 전개의 향방을 능동적으로 주도하고 대응해 왔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한족(漢族) 세력이 위진 남북조 시대 동안 북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흥기한 여러 유목 세력에게 위축, 압도, 정복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매우 주목할 만한 문제이다.

그러나 6세기 말 이래 중국은 진, 한 제국에 이은 대륙 통일기를 맞게 된다. 수, 당 제국은 중국을 재통일하고 자국과 자민족을 중심으로 세계 체제를 개편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와 수, 당과의 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필연적으로 격돌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2. 전쟁의 전개 과정 

1) 고구려-수 전쟁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명의 대병력으로 ‘무려라’로 대표되는 고구려측 요서 제 전초기지를 유린하고 요하 도하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천산산맥에 잇닿아 구축한 여러 성으로 하여금 집요한 ‘영성고수’ 작전을 벌이도록 하여 수군 전력의 분산과 소모를 지속적으로 강요하였다. 

또 고구려는 평양 방면으로 도해내공하는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의 성급한 공세를 유인, 매복 전술로 무력화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요동 방면에서의 교착된 전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이 평양 방면으로 남하해 오는 우문술 등 30만 군을 맞이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의도적으로 포기하면서 수나라 군대를 영내로 깊숙하게 끌어들였다.  

고구려는 평양성을 눈 앞에 두고 전력이 고갈되어 철수하는 수나라 군대를 살수에서 습격하여 이들을 일거에 괴멸시킴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수 양제는 실추된 위신을 되찾기 위해 이후에도 613년과 61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벌을 기도하였으나, 고구려의 선방과 수 측의 자중지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수 문제 이래 네 차례의 고구려-수 전쟁으로 인하여 수나라는 경제가 파탄되고 민심이 이반되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역시 국세를 천하에 떨칠 수는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이 컸다. 또한 고구려는 이 전쟁의 결과 요서 지방에 전개시킨 무려라 등 여러 전초 기지 성들을 상실함으로써 요서 지방에 대한 공격 역량이 사라지게 되었다. 

2) 고구려-당 전쟁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의 대당 강경책을 구실로 제1차 침공을 단행하였다. 당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 공방전에서 고전하게 되었다. 

안시성이 당군의 공격에도 수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성주 양만춘 장군의 지휘력에도 공이 있겠지만, 인접한 개평 지방의 철 생산에 따른 경제력에 힘입은 바도 컸다. 

당군은 가을 7월부터 9월까지 행해진 이 싸움에서 요동지역에서의 가용 작전 기간(겨울철이 다가옴)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지던 병참 지원 역시 6~7월의 우기 이후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참에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철륵 부족 설연타의 하북 침입으로 인하여 당군은 철수를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당 태종의 대 고구려 정벌 전략은 647년 이후 변화하여 강공과 돌파라는 정공법 대신에 3천~3만에 이르는 소규모 병력을 다수 편제하여 수륙 양면으로 교체 투입하면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백제의 멸망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의 제2전선의 형성은 전략적으로 지극히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이었던 것은 내분으로 실각한 연남생의 당으로의 투항이었다. 이를 계기로 당군은 50만 이상을 동원하여 신성, 남소성, 목저성 등 요하 및 압록강 연선의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그리고 668년 2월에는 고구려 최대 후방 전략 거점으로 기능하던 송화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평양성 진공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며 9월부터 시작된 평양성 공위전을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일체의 물적, 인적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3. 전쟁에 대한 역사 의식의 흐름 

598년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고구려-중국과의 기나긴 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책봉 체제로 인식되는 억압적 평화체제가 확립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또한 신라의 민족적 배신 행위로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면서 후기 신라 시대 이후, 우리 민족사가 전반적으로 보수화, 사대화되는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즉, 진취적이고 주체적이었던 민족 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계기가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재 선생은 묘청의 패배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고구려의 멸망이 그 궁극적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변 4강대국의 압력 속에서도 자주와 주체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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