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658년 시라무렌 초원의 고구려군 거점 공격
<88>측천무후의 등장
2013. 12. 18   14:47 입력

결정적 승리 거두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거란 지배에 타격 줘 
측천무후가 황후되면서 대고구려 강경파 산동집단 세력 강화

동몽골 초원의 모습. 658년 동몽골의 시라무렌 초원 일대에서 고구려와 당의 대규모 기병전이 벌어졌다. 필자제공

측천무후의 행차 모습을 묘사한 역사그림. 후궁이던 무조는 655년 당나라 황후 자리에 올라 흔히 측천무후로 불린다. 690년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측천무후는 대고구려 강경파였던 산동집단과 결탁했기 때문에 그녀의 행적은 당시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료사진

658년 6월 여름 시라무렌 초원은 무성했다. 가축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초평선 멀리 누런 먼지가 일어났다. 요령성 조양에 위치한 당나라 영주도독부의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초원에 어느 고지 언덕에 위치한 고구려의 봉수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동쪽으로 가면서 연이어 연기 기둥이 올라갔다. 당군의 출현은 금세 현지 주둔 고구려 주력군단에 알려졌다. 

서역의 상황변화는 동방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아시아에서 서돌궐을 격파해 해체한 당은 동쪽으로 그 칼끝을 돌렸다. 시라무렌에서 고구려의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당은 전쟁을 시작했다. 초원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적봉진(赤烽鎭)의 고구려 군대가 가장 먼저 당 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날 이 봉화대 상주 군인들은 자신들이 운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그들은 전투부대의 요원이라기보다 고구려의 조기경보체계의 가장 선봉에 위치한 신경세포들이었다. 평소에 교대로 흩어져 광활한 초원을 순찰하면서 당군이 몰려오는지 감시하다 당군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곧바로 봉수대에 알리는 것이 그 임무였다. 당군의 공격을 받은 적봉진은 이내 함락됐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영주도독겸 동이도호 정명진(程名振)과 우령군장군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적봉진을 공격해 뽑았는데 목을 벤 것이 400여 급이었고, 포로로 잡은 것이 100여 명이었다.” 

● 당, 고구려 거란 지배에 타격

푸른 초원은 금방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가 됐다. 봉수를 통해 당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즉시 원군을 출동시켰다. 고구려 장군 두방루(豆方婁)가 기병 3만을 이끌고 적봉진이 위치한 그 초원에 나타났다. 고구려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장군 정명진은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거란군을 동원했다. 그들은 당나라 예하 송막도독(현 내몽골 파림우기 일대) 거란 족장 이굴가(李窟哥)의 부락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군대가 이끄는 거란족 기병과 고구려 군대가 통솔하는 말갈·거란 기병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중국 기록들 사이에 서로 다른 사실을 전한다.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현경 2년(658) 다시 정명진이 설인귀를 이끌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자치통감’은 “고려에서 두방루를 파견하여 무리 3만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는데 (당의 장군) 정명진은 거란으로 맞아서 치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는데, 목을 벤 것이 2500급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일방적으로 고구려군이 당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당군도 여기에 상응하는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설인귀 전을 보면 직후 시라무렌뿐만 아니라 요동에서도 벌어졌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돌궐과 싸우고 돌아온 양건방(梁建方)과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요동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웠다. 전선은 금방 교착됐다. 먼저 군대를 움직이는 쪽이 불리해지는 판국이었던 것 같다.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양군의 소수 병력이 서로 활을 쏘는 사격전이 벌어졌다. 설인귀가 말을 타고 고구려 진지로 쳐들어가 활을 연방 쏘자 맞아 넘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구려군에도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었는데 석성(石城) 아래에서 당군 10명 이상이 그에게 맞아 죽었다. 설인귀가 그를 향해 단기로 달려들었다. 마침 그 고구려 궁수는 화살이 떨어져 활을 쏘지 못했고, 설인귀에게 생포됐다고 한다. 

고구려에서 철수하면서 설인귀는 장군 신문릉(辛文陵)과 함께 시라무렌에서 고구려 휘하의 거란족을 습격한 것 같다. 그들은 고구려 휘하에 있던 거란왕(契丹王) 아복고(阿蔔固)와 여러 수령들(諸首領)이었다. 흑산(黑山)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거란족이 패배했다. 아복고와 수령들이 포로가 됐고, 낙양으로 끌려갔다. 당군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시라무렌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에 타격을 줬던 것 같다.

● 당, 페르시아까지 팽창 

신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주력이 향후 요동에 묶일 것이고, 남하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당은 당시 한반도 통일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당은 서돌궐을 제압한 후 서역에서 지배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당고종은 서돌궐을 도륙(都陸)과 노실필(弩失畢) 두 부족연맹으로 분할했다. 이리(伊犁)계곡과 이식-쿨(Issyk-Kul) 지역에 있던 서돌궐의 옛 영토에 당의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다. 러시아령 타쉬켄트와 옥수스(Oxus) 계곡 일대의 신강(新疆) 서부에 위치한 서돌궐의 종주권하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도 659년까지 중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당제국은 지배하에 새로 들어온 서쪽 끝의 영토를 ‘페르시아(波斯)’도호부라 불렀다. 당은 파미르 고원 너머 서쪽으로 지나치리만큼 팽창하고 있었다. 서역지배에 많은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고 있었다. 관건은 당조정의 선택과 결정이었다.

● 산동파의 등장

658년 그해 신라의 대당외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장안에 상주하고 있던 신라의 외교조직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전년부터 신라왕 김춘추의 3남 문왕이 당나라 조정에서 정지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 조정 내부에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654년 말 무조(武照 : 측천무후)가 음모를 꾸며 황후인 왕씨를 폐위시키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황후가 됐다. 여기에 반대하던 원로정치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은 실각했고, 무조를 밀어준 이세적이 부상했다. 향후 둘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세적은 대장군으로 하북평원의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무조를 반대한 장손무기, 저수량, 한원(韓瑗), 래제(濟) 등은 태종대 귀족이었던 서북의 관롱군사집단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반면 무조의 지지자인 이세적 등은 하북평원지방 출신으로 귀족의 세습적 특권인 음서보다는 과거를 통해 관계에 들어온 태행산맥 동쪽의 산동집단이다. 왕황후파와 무조의 대립은 관롱집단과 산동집단이라는 두 정치 엘리트집단 사이의 정치적 패권 다툼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한 이세적과 산동집단의 정치적 부상은 신라에 희망이었다. 산동파의 거두 이세적은 저수량과 이대량 등이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을 반대했을 때도 유일하게 찬성한 자였다. 신라왕자 문왕은 656~7년 당에 체류하는 기간에 무조의 지지자들인 산동집단에 다가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정지작업은 659년 김인문이 당 조정에 들어와 청병을 성사시키는 바탕이 됐으리라.

당시 당 고종은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657년에 황제는 여름궁정에서 휴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격일마다 겨우 집무를 봤다. 얼마 동안 부분적인 중풍과 심한 시력 감퇴를 가져왔다. 비록 병이 회복됐다고는 하나 계속 재발했다. 그때마다 무조는 제국을 쉽게 주무를 수 있었다. 황제는 의지가 약해서 자신의 만만찮은 배우자가 자신과 조정에 강요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