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8322

하루아침에 탕녀로 추락한 성악가, 비극적 최후가 아프다
1926년 8월 4일, '사의 찬미'를 현해탄에서 완성한 윤심덕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미선(iosono) 17.08.06 14:47 최종업데이트17.08.06 14:47 

1919년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기운은 하늘 높이 고양됐다. 일본 밑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온 민족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 헌병의 총칼에 뛰어들었다. 그 정도로 그때는 기운이 넘쳤다. 

그랬던 기운이 1920년대 들어 급격히 꺾였다. 일제의 억압 기술은 교묘해졌고 우리 민족의 삶은 열악해졌다. 저항의 동력도 줄어들었다. 

3·1운동 같은 큰일을 겪고 나서 기운이 꺾이다 보니, 한층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이끌었던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들이 거의 다 순국하거나 투옥되거나 망명했기 때문에, 이 땅의 분위기는 더욱 더 다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는 대중음악에도 반영됐다. 1920년대에는 우울한 노래들이 유행을 탔다. 3·1운동 직후부터 유행한 '희망가'가 대표적이다. 말이 '희망가'지, 사실은 '절망가'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희망가'라는 제목과 달리 애절한 가사와 곡조 때문에 '절망가'로도 불렸다. 

'희망가', 아니 '절망가'뿐만 아니었다. 이 시기 노래는 대체로 애절하고 우울했다. 훗날 친일파가 되는 홍난파가 '봉숭아' 멜로디를 만든 것도 1920년이었다. 홍난파가 처음에 붙인 멜로디 제목도 '애수'였다. 이 멜로디를 보고 김형준이 "울 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가사를 붙였다. 

시대 정서를 따라 애절하고 서글픈 노래들이 유행한 1920년대. 이 시대 분위기를 가장 처절하게 담았을 뿐 아니라, 가수의 극적인 최후로 인해 온 민족의 관심을 끈 노래가 있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하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그것이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

윤심덕이 애인 김우진을 끌어들여 현해탄에 뛰어듦으로써 '사의 찬미'를 완성한 날이 1926년 8월 4일이다. 금년 8월 4일은 금요일이었지만, 그 해 8월 4일은 수요일이었다. 

윤심덕은 물의 날인 수요일에 현해탄 물속에 뛰어들어 자기 노래를 완성했다. 노래 곡조와 가사에 더해 8월 4일에 벌어진 가수의 비극적 최후가 당시 우리 민족의 기구한 팔자와 교묘히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이 노래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다.  


▲윤심덕.ⓒ 위키커먼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수선(水仙)이었다. 아명도 물과 관련이 있었다. 집안은 서민 가정이었다. 서민 출신치고는 학교를 많이 다녔다.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그 뒤 소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했다. 

윤심덕은 전통적 여인과는 달랐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았다. 부끄러움도 없었다. 수줍어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경멸했다. 노는 것도 달랐다. 예술의전당 이사장이었던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의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녀는 겁이 없고 모험심이 강했다. 그래서 사내아이들과 바다에 뛰어들기도 잘 했다. 하루는 그녀가 하루 종일 없어져서 야단법석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어부를 졸라서 온종일 바다에 나갔다가 밤에서야 돌아온 게 아닌가."

윤심덕은 그 시대 여성들이 흔히 갖고 있었던, 남자에 대한 존경심도 없었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들한테도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헷갈리는 말을 썼다.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예의 없는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움을 사지는 않았다. 언제나 인기 최고였다.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묘한 인물이었다.  

윤심덕은 남자한테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전통적 여인과 달랐다. 그는 키가 크고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성격도 화통했다. 남자들한테도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늘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깊이 사귀지는 않았다.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윤심덕 때문에 상사병을 앓는 사람도 많았다. 그것이 정신병으로 이어져 총독부병원(지금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은 남자도 있었다. 이렇게 남자들이 매달렸지만, 그는 남자한테 인생을 걸지 않았다. 

윤심덕의 꿈은 세계적 성악가였다. 그에게는 자기 인생이 더 중요했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편의 성공을 자기의 성공으로 인식했지만, 윤심덕은 여자 인생은 여자 자신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 가정이란 제약에 굴하지 않고 미국인 의사(여성)의 후원도 받고 본인도 돈을 버는 방법으로 학교 공부를 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게 27세 때인 1923년이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유명했다. 일본 유학 중에 한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한 적이 있었다. 관객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성악가가 귀했다. 그래서 그의 클래식 노래, 그의 인간됨됨이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태에서 27세 때 귀국해 본격적 성악가의 길을 걸었다. 

지금도 성악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윤심덕은 그 시대에 성악으로 인기를 끌었다. 공항 패션이란 말이 있다. 윤심덕의 경우는 공항 패션이 아니라 전차 패션이었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전차를 탔느냐까지 보도될 정도였다. 인기 최고였던 것이다. <신여성> 1926년 2월호에 이런 기사가 있다. 

"윤심덕 아씨는 …… 일전에 누가 전차 안에서 보니까, 검은담비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두 손에는 보석 달린 금반지가 번쩍번쩍하는데." 

세상은 윤심덕이 돈 방석에 앉은 줄 알았다. 가족들도 그랬다. 방송이나 음반으로는 돈을 좀 벌었지만, 음악 콘서트 출연은 거의 무료였다. 방송이나 음반보다는 콘서트를 위주로 했으니, 실제 수입은 얼마 안 됐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가족들은 윤심덕만 믿고 평양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윤심덕은 가족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남동생이 누나만 믿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윤심덕의 고민은 깊어갔다. 윤심덕을 밀착 취재하던 기자가 이 사실을 알아내 신문에 실었다. 그러자 수많은 남자 독지가들이 후원을 자청했다. 고민 끝에 윤심덕은 그중 한 사람의 돈을 받기로 결심했다. 서울 갑부 이용문의 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후원금을 받으러 그 집 문턱을 넘은 게 엉뚱한 방향으로 보도됐다. 윤심덕의 몸과 이용문의 돈이 거래된 것처럼 기사화된 것이다. 그러자 비난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그는 하루아침에 탕녀로 전락했다. 가는 데마다 손가락질이었다. 성악가 윤심덕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귀국 2년 만인 29세 때였다. 

하루아침에 탕녀로

하루아침에 추락한 윤심덕은 만주에서 잠시 요양을 했다. 그런 뒤 국내로 돌아와 연극배우로 변신했다. 당시엔 여배우가 기생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성악가는 존경받았지만, 여배우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윤심덕은 여배우로 이미지 변신을 하고자 했다. 애인 김우진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김우진은 극작가에다가 목포 갑부의 아들이었다. 아호는 수산(水山)이었다. 그에게도 물 水가 들어갔던 것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도쿄 유학 중에 만났다. 둘은 동갑이었다. 김우진은 조용한 샌님이었다. 활달한 윤심덕은 그런 김우진이 좋았다.  

윤심덕은 다른 남자들은 다 무시해도, 김우진만큼은 아버지나 스승처럼 대했다. 김우진이 기혼자였지만, 윤심덕의 눈에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남자일 뿐이었다. 바로 그 김우진이 배우의 길을 권유했다.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주려 했던 것이다. 

윤심덕이 연극배우가 됐다는 소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데뷔 무대에는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연기가 수준 이하였다. 연기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대사만 외워 출연했던 것이다. 급조된 배우였던 것이다. 성악 투로 대사를 암기했다. 혹평은 당연했다. 

윤심덕을 고용한 극단 토월회는 그를 상업적으로만 이용했다. 윤심덕의 연기력에는 신경을 써주지 않고, 그 명성을 이용해 관객을 끄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렇게 소모품으로 전락한 윤심덕은 한 달 만에 배우를 포기했다. 극단은 한 달간 큰돈을 벌었지만, 윤심덕은 재기불능에 빠졌다. 관객이 많이 모였기에 극단은 돈을 벌었지만, 그 많은 관객이 주연배우를 흉보고 돌아갔기에 윤심덕은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윤심덕이 할 수 있는 일은 라디오 출연과 음반 취입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김우진이 일본으로 떠났다. 김우진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진보적이고 서구적 지식인이라, 1920년대 한국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 일단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윤심덕도 일본으로 향했다. 세 가지 이유로. 첫째, 미국행 배를 타고자 일본으로 가는 여동생을 배웅할 목적이었다. 둘째, 김우진을 만날 목적이었다. 셋째, 이토 레코드사에 가서 음반을 낼 목적이었다. 

이때 준비해간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다. 애초에 이토 레코드사와 계약한 26곡에는 '사의 찬미'가 없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뒤에 윤심덕이 갑자기 제안을 했다. '사의 찬미'도 녹음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사의 찬미' 가사지.ⓒ 한국유성기음반

윤심덕의 심경을 표현하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나중에 이미자·박재란 등이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좀 변형됐다. 위 가사는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에 근거해 있다.  

'사의 찬미' 남기고 동반자살

녹음을 끝낸 윤심덕은 김우진을 찾아갔다. 함께 죽자고 제안했다. 당신이나 나나 한국에서 살기는 힘드니 함께 죽자는 것이었다. 김우진은 윤심덕을 말렸다. 처음엔 말렸다. 하지만, 결국 동의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부산행 배를 탔다. 배가 일본을 떠나 대마도 옆을 지날 때였다. 1926년 8월 4일 수요일 새벽 4시였다. 두 사람은 유서와 구두를 남기고 현해탄 물속에 뛰어들었다. 아명이 수선인 윤심덕은 아호가 수산인 김우진을 끌어들여 물의 날 새벽에 그렇게 '사의 찬미'를 완성했다. 윤심덕 최후의 공연이었던 것이다. 향년 서른이었다. 김우진도 서른이었다.  

 2008년 2월 대마도 가는 배 안에서 찍은 현해탄.
▲2008년 2월 대마도 가는 배 안에서 찍은 현해탄.ⓒ 김종성

윤심덕의 죽음은 엄밀히 말하면 타살이었다. 세상이 그를 탕녀로 몰았고, 어디도 갈 데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현해탄에 뛰어든 것은 세상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타살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세상의 집중 포화가 낳은 결과였다.

이 죽음으로 윤심덕은 또 한번 욕을 먹었다. 유부남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으니, 비난이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토 레코드사는 떼돈을 벌었다. 계약에도 없었던 '사의 찬미'로 큰돈을 번 것이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극적인 삶과 최후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이 노래가 지속적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의 우울하고 처절한 분위기가 '사의 찬미'가 풍기는 정서와 상당히 맞아떨어졌다. 이런 요인이 이 노래를 불후의 명곡으로 만들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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