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821030228186

“고흥 앞바다에 있는 ‘독섬·독도·석도’가 증언합니다”
등록 :2017-08-21 20:01 수정 :2017-08-21 20:56

【짬】 우리문화가꾸기회 이훈석 상임이사

1970년대 숭례원, 1986년 김치박물관, 2004년 세미원 등 40여년간 한결같이 우리 문화유산 보전을 위해 헌신해온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 상임이사는 최근 10년간 독도와 동해 지킴이로도 활약하고 있다.
1970년대 숭례원, 1986년 김치박물관, 2004년 세미원 등 40여년간 한결같이 우리 문화유산 보전을 위해 헌신해온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 상임이사는 최근 10년간 독도와 동해 지킴이로도 활약하고 있다.

“4월20일 새벽 5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직 미명인데 무슨 전화일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남 고흥 봉래면 교동 이장인 신영길씨였다.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뭘 찾으셨어요?’ ‘전복껍데기를 찾았어요.’ 지난 2월 처음 뵈었을 때 신씨의 할아버지 그리고 윗대조 할아버지들께서 울릉도에서 배를 만들기 위해 벌목할 때 쓰시던 톱을 보여주면서, 옛날 독섬에서 가져왔다는 어른 머리 크기만한 전복껍데기 몇 개가 집안의 기물로 전해오고 있었는데 혹시 남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한 지 두달 만이었다.”

흡사 미스터리 소설의 도입부처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22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지하 1층 대강당에서 열리는 ‘독섬, 석도, 독도-고흥의 증언’ 학술심포지엄에서 이훈석(72) 우리문화가꾸기회 상임이사가 발표할 조사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찾았습니다. 전남 고흥 앞바다에도 독도와 석도와 독섬이 다 있습니다. 모두가 돌섬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고종 황제가 ‘칙령 41호’에서 명시한 ‘석도’가 바로 ‘독도’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겁니다.”

지난주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이 상임이사의 목소리에도 흥분이 담겨 있었다. 꼭 1년 전 이 칙령에서 명시한 ‘석도’가 바로 ‘독도’란 사실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첫 문헌기록인 1938년판 <조선어사전>을 발굴해 발표한 데 이어, 그 사전에 실린 ‘독: 돌의 사투리’(397쪽)가 실제 쓰인 사례를 찾아 전라도 지역을 뒤진 끝에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1900년 10월25일 고종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와 부속된 죽도(댓섬)와 석도를 조선의 고유 영토로 공표했다. ‘칙령 41호’는 ‘독도’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일본 쪽 기록인 1904년 9월 ‘군함신고행동일지’보다 4년 앞선다. 또한 일본 내각에서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명명하며 영토 편입을 결정한 뒤 ‘시마네현고시 제40호’에 수록한 1905년 2월보다는 5년 앞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 정부나 학계에서는 ‘칙령’에 적힌 ‘석도’가 ‘독도’와 같다는 문헌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고종 칙령41호 ‘석도=독도’ 입증 위해 지난해 최초 ‘조선어사전’ 발굴 이어 
독도서 배 만들었던 목수 후손 찾아 
전라도 사투리 ‘돌=석=독’ 실제 확인, 오늘 국회도서관 ‘고흥의 증언’ 심포지엄 
“후손들 짐 되지 않게 우리땅 명백히”

‘가로 24㎝, 세로 15㎝’ 대형 전복껍데기를 들고 심포지엄에 참석할 예정인 신 이장도 “어릴 적엔 여기에 밥도 담아 먹고 그랬다. 어릴 때는 그게 우리 동네 독섬에서 잡아온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동해바다 독도인 것 같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 이장의 증언대로, 옛 고흥의 뱃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가서 배를 만들면서 ‘독도’를 ‘석도’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돌'을 ‘독'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돌섬'을 ‘독섬'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적을 때는 뜻을 따서 ‘석도’(石島)라고 하거나 음을 따서 ‘독도’(獨島)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조사해보니, 실제로 지금도 고흥에는 ‘독섬'(도화면 덕중리 산322)과 ‘독도'(금산면 오천리 산28), 그리고 ‘석도'(과역면 연등리 산264, 신곡리 산68)는 두 곳이나 있었다. 원래 모두 ‘독섬'이었으나, ‘석도'와 ‘독도'는 지적도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각각 다르게 표기됐고, 너무 작아 기록되지 않은 ‘독섬'만 옛 이름대로 남게 된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전남 고흥군 봉래면 교동 이장이자 대대로 배를 만들어온 목수인 신영길씨가 19세기 말 고조부대에 울릉도와 독도에서 가져온 대형 전복 껍데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지볼트의 일본풍물기 <닛폰>에 실려 있는 나가사키 표류 조선인들의 배. 고흥 주민들은 배 만드는 장인인 보재기와 잠녀들이 타고 다니던 ‘보재기 배’라고 증언했다.


1935년 독도에 건너간 바다사자잡이 일본인들과 한국인 해녀들 모습. 오키노시마 동사무소 제공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28번지에 있는 독도.

이 상임이사는 이번에 필리프 지볼트의 일본 조사 기록인 <닛폰>(1832년)에 등장하는 나가사키 표류 조선인 초상화와 조선의 배 그림에 대한 고흥 노인들의 증언도 소개한다. “배 그림을 본 70대 주민 다섯명의 입에서 일제히 ‘보재기 배’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보재기(잠수부의 사투리)와 잠녀(해녀)들은 백정처럼 천대를 받아, 집단으로 배로 이동하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았고, 60여년 전만 해도 더러 눈에 띄었어요.” 그는 “울릉도·독도는 일찍이 안용복과 전라도 사람 뇌헌 스님 일행의 답사와 항로의 개척 이래 고흥을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에 의해 조선산업기지로 발전했다. 해마다 어선과 보재기 배가 일본에 표류했다는 지볼트의 기록을 보더라도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선조들이 배를 만들고 해조류를 채취하며 살았던 조선 땅이란 의미”라고 덧붙였다.

전남과 경북도가 공동후원하는 이 심포지엄에서는 일본 최고의 음운학자로 꼽히는 오구라 신페이(1882~1944)가 “‘돌'이란 단어를 전라도 지역에서 ‘독'으로 발음했다”고 조사해놓은 기록(이동식 전 한국방송 정책기획본부장), 문세영(1888~?)이 편찬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1938년 초판본)의 학술적 가치(이종훈 춘천교대 교수)에 대해서도 발표와 토론을 할 예정이다. 또한 ‘푸른 눈의 한옥지킴이’ 피터 바돌로뮤(선박 컨설팅 업체 IRC 부회장)가 외국인의 시각에서 ‘서첩-독섬, 석도, 독도’를 분석해 발표한다.

지난해 말로 12년간 헌신했던 경기 양평 두물머리 세미원 활동을 접고 우리문화가꾸기 사업에 몰두 중인 이 상임이사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독도의 방어로는 다음 세대에 짐을 더 지워주게 된다. 명약관화한 증거를 밝혀내 다툼을 끝낼 수 있도록 역사의 그물을 더 넓고 깊게 펴고자 한다”고 이번 심포지엄의 취지를 밝혔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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