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4748

미국인 목사가 폭로한 전두환의 거짓말
아놀드 피터슨 목사가 쓴 <5.18광주사태>... 폭탄 투하 계획 등 밝혀
17.08.28 10:18 l 최종 업데이트 17.08.28 10:18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박순옥(betrayed)

황 총리와 환담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  지난 2015년 6월 29일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뻔뻔한 거짓말을 많이 한다. 그것도, 주권자인 국민을 상대로 그렇게 한다.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는 주장은 귀여운 거짓말에 속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한 학살이 자위권 차원의 방어행동이었다는 주장은 뻔뻔함을 넘어 파렴치함에 도달한 거짓말이다. <전두환 회고록 1> 제4장에서 그는 이런 거짓말을 한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상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사격을 한 것은 군인복무규율과 위수령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자위권 행사 요건에 딱 들어맞는 경우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을 계기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비상계엄이 실시됐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제주를 포함한 전국에 확대 실시했다(5·17 조치). 이 조치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물리력을 행사하며 대항했기 때문에 공수부대원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부하들의 그 같은 행위에 대해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 바로 다음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자위권이라는 것은 상급자가 부여하는 권한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갖고 있는 형법상의 정당방위의 권리처럼 군인 스스로 갖고 있는 생존권 방호의 권리다."

광주 살상은 부하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벌인 일이지 자신이 시킨 일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1980년 광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놀드 피터슨(Arnold Peterson) 목사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목청껏 외친다. 계엄군이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광주에서는 그 어떤 폭력 시위도 없었다고 <5·18 광주사태>(1995, 풀빛)란 증언록에서 말한다. 1995년에 한국어로 펴낸 이 책에서 그는 시위대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노래를 불렀고, 시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마치 축제 같은 것이었다."

광주 학생들의 시위를 보면서 피터슨은 찬송가 하나를 떠올렸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한테도 익숙한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찬송가였다. 

"그들의 언어는 강했으나, 여전히 시위에는 축제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기독교 찬송곡인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같은 곡조를 띤 노래들 속에 반영되어 있었다."

2016년 연말 이래의 촛불혁명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를 떠올렸다. 피터슨 목사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보면서, 강물처럼 평화롭게 흐르는 축제 분위기를 연상했다. 계엄군이 자위권을 발동할 만한 분위기, 시민들에 대한 살상을 정당화할 만한 분위기가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위 회고록에서 이렇게 강변한다.

"무장 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 행위는 특정 목표 점령을 위한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정 목표는 물론 전남도청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결사 작전으로 공수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피터슨 목사 "광주 시민군, 계엄군 위협하지 않았다"


▲  지난 1995년 5월 1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15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등의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인 아놀드 피터슨 목사(50. 가운데)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80년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지상으로 총을 내려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피터슨 목사는 미국 남침례회 소속이었다. 1980년 5월 18일은 그에게도 뜻 깊은 날이었다. 위의 증언록에 따르면, 한국 침례교와 플로리다 침례교협의회가 공동 주관하는 한·미 전도대회가 광주에서 5월 18일부터 4일간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대회를 준비하느라, 미국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5월 18일 이전에 광주 시내를 많이 돌아다녔다. 5월 18일부터는 대회 참가자들의 신변을 돌보느라 시내를 많이 돌아다녔다. 또 자동차를 운전했기 때문에 시내 곳곳을 기동성 있게 다닐 수 있었고, 미국인이기 때문에 계엄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5·18 현장의 사관(史官)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미국 대사관 및 주한미군과의 협조 하에 미국인 구출 작업에도 관여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광주 시내에서 그는 한국군의 양해를 받고 미국 측과 전화 연락을 했다. 이처럼 그는 침례교 선교사인 동시에 미 대사관 대리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광주 시민 쪽에 유리한 증언을 조작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고도의 신빙성을 갖고 있다. 

피터슨 목사는 5·17 조치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시민들이 먼저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증언록의 '5월 18일'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5월 18일에 광주에 주둔한 한국 군인들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해 터무니없는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시위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터무니없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피터슨이 목격한 것은 시민들이 계엄군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계엄군이 자위권을 고려해야 할 정도의 상황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두 눈으로 지켜본 것은, 계엄군이 평화적인 시위대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한테까지 폭력을 행사하여 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키는 장면이었다. 위 대목은 그런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피터슨은 계엄군이 조선대·전남대에 집중 배치돼 학생 시위대만 통제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계엄군이 대학뿐 아니라 도시 전역을 무대로 일반 시민들까지 광범위하게 자극하고 다녔다고 폭로한다. 증언록의 '5월 18일'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행동은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데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도 무분별하게 공격했다."

거리에 다니는 시민들만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계엄군은 아무 집에나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고 10대 중반 이후의 학생이나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했다. 심지어 계엄군 병사가 공포 분위기를 악용해 특별한 이유 없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장면도 있었다. 증언록의 '5월 19일' 편에서 피터슨은 이렇게 기억한다. 

"한 사건은 특별히 생생하게 기억된다. 어느 교차로에서, 매력적으로 생긴 여성 한 사람만 태운 택시 옆에서 (나는 차를 탄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통을 지휘하는 경찰이 '교차로를 통과하라'고 택시에 신호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어느 공수부대 대원이 걸어와서 택시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차 지붕에 곤봉을 내려놓더니, 젊은 여성에게 나올 것을 요구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을 살상하는 계엄군도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를 악용해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하는 계엄군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갖가지 장면들을 보고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기에 피터슨이 <5·18 광주사태>라는 증언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피터슨이 증언록을 쓴 개인적 동기는 '자기 치유'였다. 기록이란 행위를 통해 정신과 기억을 가다듬고 상처를 치유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번역자인 정동섭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저자는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치유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5·17 조치와 광주 학살을 계기로 전두환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최규하 정부를 무력시켰다. 그래서 5·17 조치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바로 이 5·17 쿠데타 하루 전이었다. 5월 16일 집권여당인 공화당에서 전두환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종필 증언록> 제5부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공화당은 긴박감이 감돌던 그 전날 16일 긴급 당무회의를 열었다. 3시간 40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최 대통령에게 전달할 위기관리와 수습 대책을 결정했다. 정치 일정을 대폭 단축하고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치 일정을 대폭 단축한다는 것은 개헌과 차기 정부 구성을 서두른다는 의미였다. 군부가 아닌 민간 정부가 조속히 정치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두환이 싫어하는 일이었다. 

계엄해제 역시 전두환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계엄을 해제하면 군부가 힘을 잃고 전두환도 무력해진다. 계엄해제 요구권은 국회에 있다. 국회는 5월 20일 개회될 예정이었다. 5월 20일에 계엄이 해제되면 전두환은 권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자면 5월 20일 이전에 명분이 생겨야 했다. 계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할 명분이 필요했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자극하고 사태를 키운 행위는 전두환한테 그런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계엄군, 광주 폭탄 투하 계획 있었다" 


▲  아놀드 피터슨이 쓴 <5·18 광주사태>. ⓒ 김종성

광주 시민들을 자극하고 학살하는 계엄군의 악행은 '지상'에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공중'에서도 이루어졌다. 피터슨은 광주 상공에서 헬리콥터를 자주 목격했다. 5월 21일 오후 2시에는 헬기가 광주 전역을 비행하며 전단지를 살포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전단지에는 계엄사령부 공고문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날 3시 15분경 이후로 목격한 헬기에서는 전단지가 아닌 다른 것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총알이었다. 전두환이 주권자인 국민들을 상대로 공중 사격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증언록의 '5월 21일' 편에서 피터슨은 자신이 직접 촬영한 헬기 사진들을 증거물로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헬리콥터는 3시 15분쯤 사격을 시작하여 5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하여 사격을 하였다. (사진 속의) 헬기 아래쪽을 자세히 살피면 화기가 발사되는 것을 알리는 불빛이 보인다."

증언록의 '5월 26일' 편에는 훨씬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날 피터슨은 주한미군 공군기지에 있는 데이브 힐과 전화 연락을 했다. 미국인 구출 작업을 위해서였다. 이 전화통화는 도청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데이브 힐은 뭔가를 말할 듯 말 듯하면서, 피터슨에게 빨리 떠날 것을 종용했다. 

"대화하는 중에 데이브는 다시 한번 우리 더러 떠날 것을 종용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밝힐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불길하게 말했다."

이 문장을 근거로 추론해보면, 데이브 힐이 아놀드 피터슨에게 '전화상으로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지금 광주를 떠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해집니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모양이다. 데이브 힐이 하려 했던 말이 피터슨은 궁금했다. 그래서 나중에 데이브 힐을 만나 그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들었다. 한국군이 그 계획을 변경시키도록 미군이 압력을 행사한 것 같다."

위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은 헬기 사격을 실행한 것에 그치지 않고, 공군 전투기를 동원해 광주를 폭격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주권자인 국민들의 머리 위로 폭탄 투하까지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두환은 국민들한테 "29만원 밖에 없다"며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자위권 차원에서 부득이하게 광주 시민들을 살상했노라는 파렴치한 거짓말까지 늘어놓고 있다. 국민들을 상대로 헬기 사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주인을 상대로 폭탄 투하까지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니, 그 정도 거짓말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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