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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어느 일본인에 대하여
일본 천황을 죽이겠다는 음모에 가담한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하면서도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후세 다쓰지가 영화 <박열>에 등장한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08일 화요일 제516호

최근 개봉한 영화 <박열>은 일제강점기 일본 천황(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인’ 조선인 박열과 그 연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재로 했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개 이런 말을 했어. “영화 제목을 잘못 지었군. 이건 <박열>이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씨의 연기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지만 영화 속에서 가네코의 무게는 주인공 박열을 여러모로 압도해. 조선인 박열의 시에 감동해 그를 찾아가서 동거를 제안하는 용감한 여성, 일본에서 덴노(천황)가 일종의 ‘신(神)’이었던 시절, 그를 죽이겠다는 음모에 가담한 강단 넘치는 무정부주의자의 삶의 궤적이란 그 자체로 영화를 넘어서는 스펙터클일 테니까.

가네코 후미코의 아버지는 가네코의 어머니를 싫어했고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어. 태어나면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 돼버린 그녀의 유년 시절은 참혹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해.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어머니가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았던 와중에 가네코의 어린 시절이 행복할 리 없었겠지? 그러던 중 친척이 살던 조선으로 건너와 충청북도 청원 부근에서 지냈던 가네코는 그곳에서 중대한 경험을 하게 돼. 바로 1919년 폭발한 3·1 운동이었어.



1926년 옥중에서 재판관의 배려로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아래). 위는 영화 <박열>의 한 장면. ⓒDaum 갈무리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맞서는 조선인들의 영상은 그녀의 뇌리 깊숙이 박혀. 그녀는 조선인들에게 친밀감을 느꼈지. 하지만 일본인 할머니는 그녀가 조선인과 어울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의 구박을 받았다고 해. 가네코의 소학교 학적부에는 고막이 터지는 등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구나.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금강 주변을 지나는 철로에서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고 회고하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금강의 물줄기 앞에서 삶의 가치를 붙들게 돼.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직 사랑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가 발견한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상(아나키즘)이었고, 그 동지들 속에서 만난 연인이 박열이었던 거야.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박열과 가네코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어난 검속에서 천황 폭살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돼. 박열이야 조선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만큼이나 강고하고 튼튼하게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토로했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아(自我)를 확대하는 것이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회유하려 했던 일본인 판사, 당신은 일본 사람 아니냐며 얼러보려는 판사에게 가네코는 이렇게 쏘아붙였지.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조선독립운동)을 속 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

이 두 연인을 도왔던 변호사가 있어.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영화 <박열>에도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이 후세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우리 변호사 포시진치(후세 다쓰지의 우리말 발음)”로 불린 사람이었어.

그가 열네 살 때였던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이어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하지.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어.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마을 사람 하나가 돌아와서는 조선인들을 쫓으며 죽여댄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벌리는데, 후세 다쓰지는 어린 나이임에도 커다란 분노와 함께 조선인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고 해.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 이미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글을 썼다가 일본 당국의 조사를 받을 만큼 조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1919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이 단행한 2·8 독립선언을 변호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과의 연대에 나섰어. 그는 유학생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려는 시도에 맞서 이렇게 외치지. “학생 신분으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된단 말인가? 당치도 않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변호한 변호사 후세 다쓰지. ⓒGoogle 갈무리

“조선인에게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

관동대지진 이후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모습에 몸둘 바를 몰라 하던 그는 이렇게 고백했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 동포 6000명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름들과 함께하게 돼.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변호인이 그였고, 영화 <밀정>의 주인공이라 할 김시현과 황옥을 변호한 이도, 신분 차별이 철폐된 뒤에도 인간 취급을 못 받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사 운동을 지원한 이도, 1차·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맡아 법정투쟁을 벌인 이도 후세 다쓰지였어. “저는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법정투쟁과 항의에 협력하는 것이 저의 의무임을 통감합니다(조선공산당 사건 공판 개시를 앞두고 보낸 편지).”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건 기본이고, 감옥살이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변호사를 조선 사람들은 마음 깊이 담아두게 돼. 후세 다쓰지의 손자는 우유가 귀하던 시절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꼬박꼬박 공짜로 넣어주던 우유를 기억하고 있지. 후세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일 조선인 유종묵은 이렇게 고인을 추모한다. “선생님은 조선인에게 아버지와 형 같은 분이었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 그들은 그렇게 ‘조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소중한 생의 일부를 아니 그 이상을 다져넣었단다. 그들이 그런 삶을 택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 아빠는 그들이 보여준 애정이 약자에 대한 연민과 강자의 횡포에 저항하는 양심이라는, 인류라는 종(種)이 지녀온 특성, 가냘프지만 끊어지지 않고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DNA의 발현이라고 생각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맹자의 말이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장 15절)”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 인류는 광기와 잔인함으로 뒤덮인 역사 속에서도 양심의 고삐를 끝내 놓지 않았고, 더욱 많은 인류의 더욱 넓은 자유는 그 양심들이 다진 토대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니까.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는 ‘조선’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양심에 따라 약한 이들, 슬픈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거야.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박열이 전향하여 “일본 국민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것을 보았더라도(박열의 전향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을 거야. 후세 다쓰지 역시 그와 조선의 인연을 맺어주었다 할 2·8 독립선언을 쓴 춘원 이광수나 주동자였던 서춘, 백관수 등이 변절하여 친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실망하지 않았을 거야. 그들이 사랑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의 약자들이었으니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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