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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비자금 폭로 10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의 10년
등록 :2017-09-09 09:40 수정 :2017-09-09 14:52
[토요판] 커버스토리
‘삼성 비자금 사건’ 10년, 전종훈 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0년 전 ‘삼성 문제’를 용기있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1998년에서 2004년까지 7년 동안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으로 있었던 김용철 변호사와 그의 양심 고백을 받아 여러차례 기자회견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교회 안팎의 핍박과 방해를 뚫고 삼성과의 싸움에 나선 까닭은 삼성이 거듭나고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경제민주화가 뿌리내리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를 세워야 할 검찰(특검)과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 비자금을 만들었던 삼성 총수 일가는 도리어 숨겨둔 돈 4조5천억원을 합법적으로 ‘획득’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불법 경영승계의 꼬리표마저 말끔히 털어냈다. 그때부터라도 삼성이 진정으로 변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괴이한’ 합병을 밀어붙였고, 이 과정에서 권력과 결탁해 국민연금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몰락과 함께, 삼성의 80년 가까운 역사에서 최초로 그룹 총수가 구속됐다. 2007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 삼성 비자금 폭로를 주도했던 전종훈 신부가 지난 1일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수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벌 받는 것은 법의 형평과 평등성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죗값을 안 치르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10년 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때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서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전종훈 신부는 “이번 사건의 처리가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도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의 지리산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꽤 거리를 두고 아래쪽에 서당 간판을 건 건물 한 채가 눈에 띌 뿐 인근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2층으로 된 조그마한 휴양원에는 전종훈 신부(이하 호칭 생략·61) 혼자 살고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여러 사람이 북적이는 휴양시설일 것이라는 상상은 빗나갔다.
그의 삶도 소박하고 담담했다. 기도와 차 마시기, 산책, 하루 한끼 식사하기가 하루 생활의 전부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회 문제를 얘기할 때는 사제단 대표 시절 사람들 속에 있을 때처럼 열정이 넘쳤다. 그가 앉은 책상 뒷벽에 걸린 ‘사제의 고백과 다짐’ 전문을 담은 액자가 잘 어울렸다.
-김용철 변호사가 고백한 삼성 비자금 문제를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상에 드러낸 지가 10년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을 지켜보는 느낌이 남다를 텐데.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돈을 탐하면 망하고, 돈을 가진 자가 권력을 탐하면 죽는다는 교훈을 조금이라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10년 전에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처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다. 특검이 이재용에 대해 12년을 구형할 때는 우리 사회의 경제민주화라든가 재벌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자는 뜻이었을 텐데 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하더라. 혹시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어주려는 수순이 아닌가, 또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10년 전에는 특검이나 법원이나 삼성을 노골적으로 봐준 것 아니냐?
“그렇다. 삼성 비자금을 찾아놓고도 이건희 회장의 돈이라고 되레 합법화해준 조준웅 특검뿐 아니라 그때는 법원이 아예 이 회장을 구속 안 시키기로 작정을 했던 것 같다. 번번이 봐주기 판결을 했다. 게다가 정부(이명박 정부)도 한심하더라. 삼성한테 뇌물을 받았던 검사 명단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일부 공개했음에도 그런 사람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되더라. 황교안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러니 돈 가지고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더 짙어지지 않았겠나.”
김용철의 삼성 비자금 고백, 사제단이 받아 10년 전 제기
“당시 억지 면죄부 받았으나 이재용 결국 구속…사필귀정”
“5년형 선고가 봐주기 아니길 합당한 죗값 치러야 민주주의”
“삼성 처리는 경제민주화와 문재인 정부 성공의 시금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 공여 등 혐의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할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재벌, 10년 전보다 더 비굴해져”
정의구현사제단은 2007년 10월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용철 변호사 명의의 계좌에 50억원의 삼성 비자금이 있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이어 같은해 11월 두 차례, 이듬해 3월 한 차례 등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이 검찰과 국세청 간부 등에게 떡값을 돌려왔던 사실과 떡값 명단 일부를 밝히는 등 삼성과의 ‘전쟁’에 앞장섰다.
-사제단이 대기업인 삼성 문제에 집중했던 이유는 뭔가?
“기업 삼성이 밉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삼성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었다. 삼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인정하지만, 1~2%에 불과한 지분으로 거대 기업을 지배하면서 비자금을 만들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이건희 일가의 잘못된 경영에 대해 이건 아니라고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거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구성원들이 있는데도 오너가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구조로는 한국 경제에 미래가 없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벌 받는 것은 법의 형평과 평등성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죗값을 안 치르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이재용 부회장도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자 했다고 재판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삼성의 최고책임자가 되고 난 뒤에도 과거의 관행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조금만 문제가 불거지면 그만합시다, 왜 발목을 잡느냐는 식의 얘기가 나온다. 잘못됐으면 뭐가 문제인지 밝혀내야 그런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데 우리는 잘못을 덮거나 잊어버리려고만 한다. 삼성 이재용도 마찬가지다.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잊어버렸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다시 같은 잘못이 나왔다. 이번에 이재용이 단죄받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면 이런 일은 또다시 나올 것이다. 또 다른 불행을 잉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도 불행해진다. 이번 사건의 처리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도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재용이 도중에 풀려나오면 경제민주화는 가능하지 않고, 결국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할 것이다.”
-10년 전 삼성 비자금 건과 비교해서 차이가 있다면 뭔가?
“편법과 불법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를 완성하려 했다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과거에는 비자금을 만들어서 승계를 마무리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등의 방법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거와 확연하게 달라진 점은 재벌이 비겁하고 비굴해졌다는 것이다. 이건희와 정주영 등 과거의 재벌 오너는 불법과 로비 등 잘못을 저지른 게 드러났을 때도 최소한 비굴하게는 안 굴었다. 지금은 자기가 오너이자 경영 책임자인데도 ‘나는 바보다, 아랫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한국 경제에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삼성 비자금 실태가 드러난 뒤 사회적 압력이 거세지자, 삼성은 이건희 회장 퇴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22일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 하지만 이 회장은 경영위기 등의 명분을 내세워 2010년 3월24일 전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 변호사가 기억해낸 관리 대상자만 78명
특검(박영수) 수사 과정에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장충기와 삼성전자 사장 박상진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확보됐다. 미래전략실의 2인자이자 삼성의 대외업무를 총괄했던 장충기의 전화기에 남아 있던 메시지는 삼성이 국가기관을 어떻게 장악해서 부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검찰청의 범죄 정보와 국세청의 세무조사 정보뿐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감사원 사무총장 인사에 대한 정보까지 삼성은 고스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감사원 사무총장 인사에는 심지어 직접 개입한 정황까지 나왔다. 또 자신들을 감시해야 할 공정거래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오히려 일선 행동대 내지는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은 듯한 내용도 있다. 전직 검찰총장과 언론사 간부 등 유력인사들이 보낸 각종 청탁 메시지도 쏟아졌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도 삼성이 정치인과 검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힘있는 자들을 어떻게 일상적으로 관리하고 있는지가 드러난 바 있다. 삼성은 당시에도 지연이나 학연이 있는 마크맨을 통해 ‘관리 대상’들에게 뇌물성 떡값이나 고급 선물을 제공했다.
-국정원 기조실장(이헌수)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한 정보를 장충기 사장에게 직접 건네주는 것을 보면 삼성의 유력인사 관리가 10년 전보다 더 치밀해진 것 같지 않나?
“그럴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청와대가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존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야 삼성과 권력의 유착이 더 구체화됐을 것이다. 삼성의 정보력이 국정원보다 낫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왔기에 장충기 문자는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더 깊은 내막이 있을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그 적폐를 이번에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과거 이건희 회장이 여러번 법의 심판대에 올랐으나 집행유예 등으로 매번 빠져나온 데 비해 이번에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됐다. 그 차이가 뭐라고 보나?
“국민의 힘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10년 전에도 이랬다면 그 당시 특검도 그렇게 흐지부지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제단에서 삼성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때 고민은 없었나?
“당시 <한겨레> 기자와 천주교 신자인 분을 통해 저한테 얘기가 들어왔다. 당시 피정 중이어서 김 변호사를 함세웅 신부님한테 소개했다. 일단 본인 얘기를 들어보자고 해서 원로 신부 몇 분과 사제단 임원이 김 변호사를 만나서 고백을 들었다. 얘기를 들은 뒤에 고민에 빠졌다. 문서가 아니라 전부 구술뿐이었기 때문에 이걸 믿어도 되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이 매우 구체적인데다 그와 생활을 같이 해보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계좌를 확인해보니 실제로 삼성 돈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재벌의 나쁜 관행을 바로잡고 경제민주화 화두를 던지자는 결심을 했다. 김 변호사의 기억력이 엄청나더라. 그가 기억해낸 삼성의 로비 대상자가 무려 78명이었다. 그중 일부를 언론에 공개했는데 당사자들이 고소를 못 하더라.”
당시 사제단이 삼성 떡값을 받았다고 1차(2007년 11월12일)로 밝힌 공직자는 임채진(검찰총장 후보), 이귀남(대검 중수부장), 이종백(국가청렴위원장)이었다. 2차 공개(2009년 3월5일) 때는 이종찬(청와대 민정수석), 김성호(국정원장), 황영기(우리금융지주 전 회장) 등 3명을 더 밝혔다. 그러나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은 이들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내사 종결 처분했다.
사제단 활약 싫어한 천주교회 , 전 신부에 3년간 ‘강제 안식’
“권력·돈과 결탁한 교회가 세상 아픔을 안을 수 있나”
“침묵한 교회와 성직자가 이명박·박근혜 연장의 주범”
“종교는 비판의 성역 아냐 교회도 이제 제자리 찾아야”
‘네가 교회 주인이냐’며 안식년 강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2007년 11월12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연 ‘삼성과 검찰의 회개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전종훈 신부(가운데)가 뇌물검사 3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삼성을 건드리지 말라는 압력이 천주교 내부에서 엄청 강했던 것으로 안다.
“신부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경제도 나쁜데 왜 삼성을 건드리느냐고 난리도 아니었다. 과거 독재정권과 싸울 때보다 내부 견제가 더 심했다. 한번은 광주에 가서 강연을 하는데 신도들조차 자식들 취직을 못 하게 됐다고 항의하더라. 권력이나 재벌과 싸우는 것은 괜찮은데 교회와 부딪히는 게 제일 힘들었다.”
-천주교는 내부 규율이 매우 강한데 상부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싸웠던 것은 왜인가?
“십자가의 길을 살아야 하는 신부는 세상일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즉 십자가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게 되는데 이 자문이야말로 사제가 세상에 내놓는 응답이다. 이 응답이 누군가에 의해 제동이 걸려서는 안 된다. 그건 자기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위해 마지막으로 사제를 찾아왔는데 나마저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건 윤리적으로도 안 된다.”
사제단 대표로서 삼성 비자금 폭로에 앞장섰던 전종훈은 2008년 8월 갑작스러운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 안식년은 원래 7년에 한번씩 주어지지만, 그는 3년 만에 다시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느닷없는 안식년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삼성 임직원을 통해 교회에 숱한 압력이 들어왔다. 그러던 차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미사를 주관했더니 위에서 ‘네가 교회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면서 나보고 외국에 나가라고 하더라. 외국 가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기에 거부했더니, 그런 인사를 내더라.”
2008년 6월30일 밤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사제단의 시국미사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전경버스에 의해 원천봉쇄됐던 서울시청 광장을 시민의 품에 되돌려주는 등 평화집회 분위기를 다시 살렸다.
-사제단의 활동을 막기 위한 조처라는 얘기가 당시에 있었다. 기분이 어땠나?
“보통 안식년은 미리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하는데 내 경우는 그런 준비가 된 게 없어서 머물 거처도 없었다. 참 화가 났다. 마침 4대강에 반대하는 생명과 평화를 위한 오체투지(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는 절)가 있어 참석했다.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오체투지가 화를 가라앉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천주교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약자의 편에 있었던 것 같은데 삼성 비자금 사건 등에서 보듯 언젠가부터 오히려 강자 편에 있는 때가 많더라.
“그렇다. 교회가 봐야 할 것을 애써 외면하고, 개입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서야 할 곳에 안 나선다. 지금이 때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때가 어딨나. 때는 지금이고 바로 여기다. 그게 깨어 있는 자, 깨어 있는 교회의 본분이다.”
이른바 ‘안기부 엑스(X)파일’과 관련해 2005년 8월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항의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진상규명과 특검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종교인 소득 있는데 왜 세금 안 내나”
-왜 그렇게 변했나?
“근저에는 교회가 가진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 소유가 많으니 지킬 것이 많고, 그러다 보니 세상을 제대로 보고 지킬 수 없게 된 거다. 종교 과세 문제를 봐라.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는 것은 당연한데 왜 종교인은 소득이 있으면서도 세금을 안 내려 하나.
십자가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난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도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선택할 때는 가장 가난한 것을 먼저 택하라는 거다. 가난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즉 필요한 사람에게 내 것을 내주는 행위다. 그게 바로 공동선인데 교회가 외면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불행한 시대를 끊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앞장서서 연장시켜준 주범 중 하나도 바로 교회이고 성직자다. 말하고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한 결과다. 대부분이 권력과 야합을 했다. 권력이나 돈과 결탁을 했는데 세상의 아픔을 안을 수 있겠나.”
한국 천주교회를 비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렇게 세게 얘기하다가 또 안식년에 처해지면 어떡하냐’고 웃으면서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맞짱 떠야지. 뺏길 것도 없다. 언론도 이제는 종교를 두려워하지 마라. 종교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아니라, 교회도 누군가의 지적으로 제자리로 가야 한다.”
2008년 9월 서울 수락산성당의 주임신부 자리에서 강제로 내려온 전종훈의 길은 길 위에 있었다. 2008년 가을과 이듬해 봄에 수경(당시 화계사 주지), 문규현(사제단 신부) 등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임진각까지 오체투지를 하면서 길에서 보냈다. 오체투지의 노독도 안 풀린 2009년 6월 중순 전종훈은 서울 용산으로 달려갔다. 그해 11월 말까지 남일당 참사 피해 유가족들과 함께 용산의 차가운 거리에서 살았다. 그 뒤에도 그는 국회 앞 4대강 반대 농성, 제주 강정마을,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투쟁장,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등 약자들의 투쟁 현장에 늘 함께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때부터 지난 4월 배가 인양될 때까지 무려 2년 동안 팽목항을 지켰다. 어느새 ‘길 위의 신부’가 그의 별명이 됐다.
-세월호 때는 요양 중이었는데 다시 팽목항으로 갔다.
“2011년 9월에 3년의 안식년이 끝나고 서울 우이동성당에 발령을 받았다. 1년 반 정도 주임신부로 있었는데 오체투지 때 다친 손목과 무릎 부상이 도져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래서 2013년 5월 다 내려놓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 후 1년 뒤쯤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몸도 아프고 거리가 멀어서 자주 못 갔는데 아이들 모습이 자꾸 떠올라 그게 더 힘들었다. 그래서 세월호 1주기 미사를 현지에서 드린 뒤 아예 팽목항에 남았다.”
-강제 안식을 당한 뒤에는 길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원래 그럴 작정이었나?
“그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갔을 뿐이다. 용산참사 유가족이나 팽목항의 세월호 유가족 등과 함께 길에서 지내다 보니까 나의 삶의 지표가 여기구나 싶더라. 교회에 앉아서 신자들과 오순도순 생활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길에서 만난 기쁨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어도 나에게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2007년 11월5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이들 중엔 검찰 최고위 간부도 여럿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왼쪽 둘째는 전종훈 신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단식 중인 명진에게 “이길 것” 격려 전화
전종훈은 1970년대 후반부터 명동성당 청년부에서 평신도 활동을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따라 동네 성당(홍제동)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신부가 되면 이런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984년 늦은 나이에 가톨릭대에 입학했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신학대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1990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항상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 곁에 있었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지리산에 들어갈 때까지 사제단 대표로 활약했다.
-사제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신부가 된 이듬해인 1991년 강경대군 치사 사건에 항의한 교구별 단식기도에 참석하는 걸 시작으로 거의 해마다 단식을 했을 정도로 그동안 한번도 편안히 산 적이 없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용산이다. 그때 정말 추웠고,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경찰과의 싸움도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다. 유가족 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명도 없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신부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권력에 맞서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삼성과의 싸움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으면 내 일로 알고 어디든 갈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여기 있을 것이다. 한발 떨어져 있으니 세상이 더 잘 보인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도 되는데 아쉬움도 있고 부족함도 깨닫는다. 더 낮아져야 할 것 같다.”
휴양원과 인근 식당을 오가며 진행된 인터뷰는 한밤이 돼서야 끝났다. 그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조계종 적폐 청산을 위해 단식농성 중이던 명진(전 봉은사 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명진 스님은 단식 18일째인 지난 4일 병원으로 이송되며 단식을 중단했다.) “못 가봐서 미안하다. 끝내 이길 것이다. 몸조심하라.” 아무도 찾지 않는 산속에 있지만, 그의 삶이 존재하는 곳은 ‘길 위’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전종훈 신부가 경남 하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교회가) 선택할 때는 가장 가난한 것을 먼저 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동선을 교회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며 “교회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용철 “삼성이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없는데…”
김용철 변호사가 27일 오후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등을 수사하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모시고 온 기사라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편 사제단 신부들은 피의자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것 등에 항의 면담을 거절했다. 왼쪽은 김영식 신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할 얘기 없다”며 인터뷰 끝내 사양 “삼성 말고 지금 일에 최선 쏟고파”
7년째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맡아 “광주 교육계 깨끗해졌다” 평 듣기도
“삼성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전혀 없는데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삼성과 관련해서는 내 역할은 10년 전에 끝났다.”
10년 전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용철(59) 전 삼성 법무팀장(현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이하 호칭 생략)은 전화 통화에서 “삼성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더 없다”며 찾아오지도 말라고 말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안고 지난달 28일 광주로 무작정 찾아갔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김용철은 2010년 12월 광주교육청의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공개 경쟁을 통해 채용됐다. 그는 “교육감(장희국)과 아무런 인연이나 안면이 없었다. 직업 없이 놀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친구들이 개방형 감사담당관 자리에 응모해보라고 권했다. 고향에 가서 일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내려왔다”며, 짧게 근황을 설명했다. 전설적인 특수부 검사였던 그가 감사 책임자가 된 뒤 광주 교육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그는 학교 건축이나 각종 공사와 관련한 입찰 비리, 촌지 수수 등의 낡은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맡은 일마다 일벌백계로 다뤘다. 광주교육청의 한 출입기자는 8일 “김 감사담당관이 취임 직후부터 엄한 잣대를 들이대자 초기에는 일선의 반발도 있었지만, 차츰 적응해 지금은 광주의 교육계만큼은 아주 투명하고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김용철은 1989년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과 서울지검에서 줄곧 특수부 검사로 일했다. 검사는 정의감 강한 그에게 딱 맞았다.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사람을 폭행한 처남을 구속하도록 한 일은 법조계에서 유명하다. 그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친가와 처가 형제들과 의절해야 했다.
김용철은 1995년에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 때 검찰의 전설을 하나 만들었다. 1996년 전두환 비자금을 파던 중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전두환의 돈 61억원을 찾아냈다. 부담을 느낀 정권과 검찰 고위간부들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지만, 그는 김석원 자택을 뒤져 사과상자에 담긴 현금을 압수했다. 이 일로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자, 그는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옷을 벗었다.
“기업에 들어가서 법조인 역할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합리적 경영기법을 갖춘 일류 기업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삼성을 생각한다> 121쪽) 그는 변호사 말고 인사팀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했지만, 삼성은 그를 처음부터 법무실에 배치했다. “그때부터 검찰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뇌물성 현금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종종 받았다. 나는 이런 지시를 때로 이행했고, 때로 거부했다.”(<삼성을 생각한다> 125쪽) 삼성 조직과 불화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2004년 7월 스스로 삼성 임원(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그만둔 최초의 사람이 됐다.
삼성은 김용철이 2007년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등을 이유로 법무법인 ‘서정’에 압력을 넣어 변호사 김용철을 내쫓도록 압박했다. 김용철이 2007년 10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가 삼성 비자금과 자신이 삼성에서 저질렀던 불법 행위들을 양심고백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파장은 엄청났다.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이 구성돼, 삼성이 숨겨놓은 돈 4조5천억원을 찾아냈다. 그러나 특검은 이 돈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의 차명재산이라며 삼성에 돌려주고,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조준웅의 아들은 이후 특채로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건희는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아, 오랫동안 따라다니던 불법 경영권 세습 꼬리표를 거의 ‘말끔히’ 털어냈다. 넉달 뒤 대통령 이명박은 이건희 1인에 대해 특별사면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개인은 그것이 비록 영광스럽더라도 힘들다. 김용철 역시 양심고백 이후 “정의의 사도”라는 찬사와 박수 못지않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삼성은 나에게는 과거다. 지금은 현재의 내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 봤듯이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 그가 던진 짧은 이야기다. 김용철의 미래를 조용히 지켜보는 게 그에게 빚진 사람들의 몫이리라는 생각에 그와 기쁘게 헤어졌다.
하동/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삼성 비자금 폭로 10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의 10년
등록 :2017-09-09 09:40 수정 :2017-09-09 14:52
[토요판] 커버스토리
‘삼성 비자금 사건’ 10년, 전종훈 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0년 전 ‘삼성 문제’를 용기있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1998년에서 2004년까지 7년 동안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으로 있었던 김용철 변호사와 그의 양심 고백을 받아 여러차례 기자회견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교회 안팎의 핍박과 방해를 뚫고 삼성과의 싸움에 나선 까닭은 삼성이 거듭나고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경제민주화가 뿌리내리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를 세워야 할 검찰(특검)과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 비자금을 만들었던 삼성 총수 일가는 도리어 숨겨둔 돈 4조5천억원을 합법적으로 ‘획득’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불법 경영승계의 꼬리표마저 말끔히 털어냈다. 그때부터라도 삼성이 진정으로 변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 삼성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괴이한’ 합병을 밀어붙였고, 이 과정에서 권력과 결탁해 국민연금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몰락과 함께, 삼성의 80년 가까운 역사에서 최초로 그룹 총수가 구속됐다. 2007년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 삼성 비자금 폭로를 주도했던 전종훈 신부가 지난 1일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수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벌 받는 것은 법의 형평과 평등성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죗값을 안 치르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10년 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때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서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전종훈 신부는 “이번 사건의 처리가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도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의 지리산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꽤 거리를 두고 아래쪽에 서당 간판을 건 건물 한 채가 눈에 띌 뿐 인근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2층으로 된 조그마한 휴양원에는 전종훈 신부(이하 호칭 생략·61) 혼자 살고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여러 사람이 북적이는 휴양시설일 것이라는 상상은 빗나갔다.
그의 삶도 소박하고 담담했다. 기도와 차 마시기, 산책, 하루 한끼 식사하기가 하루 생활의 전부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회 문제를 얘기할 때는 사제단 대표 시절 사람들 속에 있을 때처럼 열정이 넘쳤다. 그가 앉은 책상 뒷벽에 걸린 ‘사제의 고백과 다짐’ 전문을 담은 액자가 잘 어울렸다.
-김용철 변호사가 고백한 삼성 비자금 문제를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상에 드러낸 지가 10년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을 지켜보는 느낌이 남다를 텐데.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돈을 탐하면 망하고, 돈을 가진 자가 권력을 탐하면 죽는다는 교훈을 조금이라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10년 전에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처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다. 특검이 이재용에 대해 12년을 구형할 때는 우리 사회의 경제민주화라든가 재벌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자는 뜻이었을 텐데 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하더라. 혹시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어주려는 수순이 아닌가, 또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10년 전에는 특검이나 법원이나 삼성을 노골적으로 봐준 것 아니냐?
“그렇다. 삼성 비자금을 찾아놓고도 이건희 회장의 돈이라고 되레 합법화해준 조준웅 특검뿐 아니라 그때는 법원이 아예 이 회장을 구속 안 시키기로 작정을 했던 것 같다. 번번이 봐주기 판결을 했다. 게다가 정부(이명박 정부)도 한심하더라. 삼성한테 뇌물을 받았던 검사 명단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일부 공개했음에도 그런 사람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되더라. 황교안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러니 돈 가지고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더 짙어지지 않았겠나.”
김용철의 삼성 비자금 고백, 사제단이 받아 10년 전 제기
“당시 억지 면죄부 받았으나 이재용 결국 구속…사필귀정”
“5년형 선고가 봐주기 아니길 합당한 죗값 치러야 민주주의”
“삼성 처리는 경제민주화와 문재인 정부 성공의 시금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 공여 등 혐의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할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재벌, 10년 전보다 더 비굴해져”
정의구현사제단은 2007년 10월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용철 변호사 명의의 계좌에 50억원의 삼성 비자금이 있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이어 같은해 11월 두 차례, 이듬해 3월 한 차례 등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이 검찰과 국세청 간부 등에게 떡값을 돌려왔던 사실과 떡값 명단 일부를 밝히는 등 삼성과의 ‘전쟁’에 앞장섰다.
-사제단이 대기업인 삼성 문제에 집중했던 이유는 뭔가?
“기업 삼성이 밉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삼성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었다. 삼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인정하지만, 1~2%에 불과한 지분으로 거대 기업을 지배하면서 비자금을 만들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이건희 일가의 잘못된 경영에 대해 이건 아니라고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거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구성원들이 있는데도 오너가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구조로는 한국 경제에 미래가 없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벌 받는 것은 법의 형평과 평등성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죗값을 안 치르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이재용 부회장도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자 했다고 재판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삼성의 최고책임자가 되고 난 뒤에도 과거의 관행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조금만 문제가 불거지면 그만합시다, 왜 발목을 잡느냐는 식의 얘기가 나온다. 잘못됐으면 뭐가 문제인지 밝혀내야 그런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데 우리는 잘못을 덮거나 잊어버리려고만 한다. 삼성 이재용도 마찬가지다.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잊어버렸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다시 같은 잘못이 나왔다. 이번에 이재용이 단죄받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면 이런 일은 또다시 나올 것이다. 또 다른 불행을 잉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도 불행해진다. 이번 사건의 처리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도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재용이 도중에 풀려나오면 경제민주화는 가능하지 않고, 결국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할 것이다.”
-10년 전 삼성 비자금 건과 비교해서 차이가 있다면 뭔가?
“편법과 불법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를 완성하려 했다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과거에는 비자금을 만들어서 승계를 마무리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등의 방법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거와 확연하게 달라진 점은 재벌이 비겁하고 비굴해졌다는 것이다. 이건희와 정주영 등 과거의 재벌 오너는 불법과 로비 등 잘못을 저지른 게 드러났을 때도 최소한 비굴하게는 안 굴었다. 지금은 자기가 오너이자 경영 책임자인데도 ‘나는 바보다, 아랫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한국 경제에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삼성 비자금 실태가 드러난 뒤 사회적 압력이 거세지자, 삼성은 이건희 회장 퇴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2008년 4월22일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 하지만 이 회장은 경영위기 등의 명분을 내세워 2010년 3월24일 전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김 변호사가 기억해낸 관리 대상자만 78명
특검(박영수) 수사 과정에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장충기와 삼성전자 사장 박상진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확보됐다. 미래전략실의 2인자이자 삼성의 대외업무를 총괄했던 장충기의 전화기에 남아 있던 메시지는 삼성이 국가기관을 어떻게 장악해서 부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검찰청의 범죄 정보와 국세청의 세무조사 정보뿐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감사원 사무총장 인사에 대한 정보까지 삼성은 고스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감사원 사무총장 인사에는 심지어 직접 개입한 정황까지 나왔다. 또 자신들을 감시해야 할 공정거래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오히려 일선 행동대 내지는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은 듯한 내용도 있다. 전직 검찰총장과 언론사 간부 등 유력인사들이 보낸 각종 청탁 메시지도 쏟아졌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도 삼성이 정치인과 검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힘있는 자들을 어떻게 일상적으로 관리하고 있는지가 드러난 바 있다. 삼성은 당시에도 지연이나 학연이 있는 마크맨을 통해 ‘관리 대상’들에게 뇌물성 떡값이나 고급 선물을 제공했다.
-국정원 기조실장(이헌수)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한 정보를 장충기 사장에게 직접 건네주는 것을 보면 삼성의 유력인사 관리가 10년 전보다 더 치밀해진 것 같지 않나?
“그럴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청와대가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존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야 삼성과 권력의 유착이 더 구체화됐을 것이다. 삼성의 정보력이 국정원보다 낫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왔기에 장충기 문자는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더 깊은 내막이 있을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그 적폐를 이번에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과거 이건희 회장이 여러번 법의 심판대에 올랐으나 집행유예 등으로 매번 빠져나온 데 비해 이번에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됐다. 그 차이가 뭐라고 보나?
“국민의 힘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10년 전에도 이랬다면 그 당시 특검도 그렇게 흐지부지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제단에서 삼성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때 고민은 없었나?
“당시 <한겨레> 기자와 천주교 신자인 분을 통해 저한테 얘기가 들어왔다. 당시 피정 중이어서 김 변호사를 함세웅 신부님한테 소개했다. 일단 본인 얘기를 들어보자고 해서 원로 신부 몇 분과 사제단 임원이 김 변호사를 만나서 고백을 들었다. 얘기를 들은 뒤에 고민에 빠졌다. 문서가 아니라 전부 구술뿐이었기 때문에 이걸 믿어도 되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이 매우 구체적인데다 그와 생활을 같이 해보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계좌를 확인해보니 실제로 삼성 돈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재벌의 나쁜 관행을 바로잡고 경제민주화 화두를 던지자는 결심을 했다. 김 변호사의 기억력이 엄청나더라. 그가 기억해낸 삼성의 로비 대상자가 무려 78명이었다. 그중 일부를 언론에 공개했는데 당사자들이 고소를 못 하더라.”
당시 사제단이 삼성 떡값을 받았다고 1차(2007년 11월12일)로 밝힌 공직자는 임채진(검찰총장 후보), 이귀남(대검 중수부장), 이종백(국가청렴위원장)이었다. 2차 공개(2009년 3월5일) 때는 이종찬(청와대 민정수석), 김성호(국정원장), 황영기(우리금융지주 전 회장) 등 3명을 더 밝혔다. 그러나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은 이들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내사 종결 처분했다.
사제단 활약 싫어한 천주교회 , 전 신부에 3년간 ‘강제 안식’
“권력·돈과 결탁한 교회가 세상 아픔을 안을 수 있나”
“침묵한 교회와 성직자가 이명박·박근혜 연장의 주범”
“종교는 비판의 성역 아냐 교회도 이제 제자리 찾아야”
‘네가 교회 주인이냐’며 안식년 강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2007년 11월12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연 ‘삼성과 검찰의 회개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전종훈 신부(가운데)가 뇌물검사 3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삼성을 건드리지 말라는 압력이 천주교 내부에서 엄청 강했던 것으로 안다.
“신부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경제도 나쁜데 왜 삼성을 건드리느냐고 난리도 아니었다. 과거 독재정권과 싸울 때보다 내부 견제가 더 심했다. 한번은 광주에 가서 강연을 하는데 신도들조차 자식들 취직을 못 하게 됐다고 항의하더라. 권력이나 재벌과 싸우는 것은 괜찮은데 교회와 부딪히는 게 제일 힘들었다.”
-천주교는 내부 규율이 매우 강한데 상부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싸웠던 것은 왜인가?
“십자가의 길을 살아야 하는 신부는 세상일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즉 십자가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게 되는데 이 자문이야말로 사제가 세상에 내놓는 응답이다. 이 응답이 누군가에 의해 제동이 걸려서는 안 된다. 그건 자기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위해 마지막으로 사제를 찾아왔는데 나마저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건 윤리적으로도 안 된다.”
사제단 대표로서 삼성 비자금 폭로에 앞장섰던 전종훈은 2008년 8월 갑작스러운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 안식년은 원래 7년에 한번씩 주어지지만, 그는 3년 만에 다시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느닷없는 안식년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삼성 임직원을 통해 교회에 숱한 압력이 들어왔다. 그러던 차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미사를 주관했더니 위에서 ‘네가 교회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면서 나보고 외국에 나가라고 하더라. 외국 가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기에 거부했더니, 그런 인사를 내더라.”
2008년 6월30일 밤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사제단의 시국미사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전경버스에 의해 원천봉쇄됐던 서울시청 광장을 시민의 품에 되돌려주는 등 평화집회 분위기를 다시 살렸다.
-사제단의 활동을 막기 위한 조처라는 얘기가 당시에 있었다. 기분이 어땠나?
“보통 안식년은 미리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하는데 내 경우는 그런 준비가 된 게 없어서 머물 거처도 없었다. 참 화가 났다. 마침 4대강에 반대하는 생명과 평화를 위한 오체투지(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는 절)가 있어 참석했다.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오체투지가 화를 가라앉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천주교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약자의 편에 있었던 것 같은데 삼성 비자금 사건 등에서 보듯 언젠가부터 오히려 강자 편에 있는 때가 많더라.
“그렇다. 교회가 봐야 할 것을 애써 외면하고, 개입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서야 할 곳에 안 나선다. 지금이 때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때가 어딨나. 때는 지금이고 바로 여기다. 그게 깨어 있는 자, 깨어 있는 교회의 본분이다.”
이른바 ‘안기부 엑스(X)파일’과 관련해 2005년 8월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항의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진상규명과 특검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종교인 소득 있는데 왜 세금 안 내나”
-왜 그렇게 변했나?
“근저에는 교회가 가진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 소유가 많으니 지킬 것이 많고, 그러다 보니 세상을 제대로 보고 지킬 수 없게 된 거다. 종교 과세 문제를 봐라.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는 것은 당연한데 왜 종교인은 소득이 있으면서도 세금을 안 내려 하나.
십자가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난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도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선택할 때는 가장 가난한 것을 먼저 택하라는 거다. 가난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즉 필요한 사람에게 내 것을 내주는 행위다. 그게 바로 공동선인데 교회가 외면하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불행한 시대를 끊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앞장서서 연장시켜준 주범 중 하나도 바로 교회이고 성직자다. 말하고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한 결과다. 대부분이 권력과 야합을 했다. 권력이나 돈과 결탁을 했는데 세상의 아픔을 안을 수 있겠나.”
한국 천주교회를 비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렇게 세게 얘기하다가 또 안식년에 처해지면 어떡하냐’고 웃으면서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맞짱 떠야지. 뺏길 것도 없다. 언론도 이제는 종교를 두려워하지 마라. 종교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아니라, 교회도 누군가의 지적으로 제자리로 가야 한다.”
2008년 9월 서울 수락산성당의 주임신부 자리에서 강제로 내려온 전종훈의 길은 길 위에 있었다. 2008년 가을과 이듬해 봄에 수경(당시 화계사 주지), 문규현(사제단 신부) 등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임진각까지 오체투지를 하면서 길에서 보냈다. 오체투지의 노독도 안 풀린 2009년 6월 중순 전종훈은 서울 용산으로 달려갔다. 그해 11월 말까지 남일당 참사 피해 유가족들과 함께 용산의 차가운 거리에서 살았다. 그 뒤에도 그는 국회 앞 4대강 반대 농성, 제주 강정마을,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투쟁장,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등 약자들의 투쟁 현장에 늘 함께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때부터 지난 4월 배가 인양될 때까지 무려 2년 동안 팽목항을 지켰다. 어느새 ‘길 위의 신부’가 그의 별명이 됐다.
-세월호 때는 요양 중이었는데 다시 팽목항으로 갔다.
“2011년 9월에 3년의 안식년이 끝나고 서울 우이동성당에 발령을 받았다. 1년 반 정도 주임신부로 있었는데 오체투지 때 다친 손목과 무릎 부상이 도져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래서 2013년 5월 다 내려놓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 후 1년 뒤쯤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몸도 아프고 거리가 멀어서 자주 못 갔는데 아이들 모습이 자꾸 떠올라 그게 더 힘들었다. 그래서 세월호 1주기 미사를 현지에서 드린 뒤 아예 팽목항에 남았다.”
-강제 안식을 당한 뒤에는 길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원래 그럴 작정이었나?
“그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갔을 뿐이다. 용산참사 유가족이나 팽목항의 세월호 유가족 등과 함께 길에서 지내다 보니까 나의 삶의 지표가 여기구나 싶더라. 교회에 앉아서 신자들과 오순도순 생활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길에서 만난 기쁨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어도 나에게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2007년 11월5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이들 중엔 검찰 최고위 간부도 여럿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왼쪽 둘째는 전종훈 신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단식 중인 명진에게 “이길 것” 격려 전화
전종훈은 1970년대 후반부터 명동성당 청년부에서 평신도 활동을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따라 동네 성당(홍제동)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신부가 되면 이런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984년 늦은 나이에 가톨릭대에 입학했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신학대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1990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항상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 곁에 있었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지리산에 들어갈 때까지 사제단 대표로 활약했다.
-사제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신부가 된 이듬해인 1991년 강경대군 치사 사건에 항의한 교구별 단식기도에 참석하는 걸 시작으로 거의 해마다 단식을 했을 정도로 그동안 한번도 편안히 산 적이 없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용산이다. 그때 정말 추웠고,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경찰과의 싸움도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다. 유가족 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명도 없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신부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권력에 맞서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삼성과의 싸움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으면 내 일로 알고 어디든 갈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여기 있을 것이다. 한발 떨어져 있으니 세상이 더 잘 보인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도 되는데 아쉬움도 있고 부족함도 깨닫는다. 더 낮아져야 할 것 같다.”
휴양원과 인근 식당을 오가며 진행된 인터뷰는 한밤이 돼서야 끝났다. 그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조계종 적폐 청산을 위해 단식농성 중이던 명진(전 봉은사 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명진 스님은 단식 18일째인 지난 4일 병원으로 이송되며 단식을 중단했다.) “못 가봐서 미안하다. 끝내 이길 것이다. 몸조심하라.” 아무도 찾지 않는 산속에 있지만, 그의 삶이 존재하는 곳은 ‘길 위’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전종훈 신부가 경남 하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 앞에서 <한겨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교회가) 선택할 때는 가장 가난한 것을 먼저 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동선을 교회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며 “교회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용철 “삼성이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없는데…”
김용철 변호사가 27일 오후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등을 수사하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모시고 온 기사라며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편 사제단 신부들은 피의자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것 등에 항의 면담을 거절했다. 왼쪽은 김영식 신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할 얘기 없다”며 인터뷰 끝내 사양 “삼성 말고 지금 일에 최선 쏟고파”
7년째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맡아 “광주 교육계 깨끗해졌다” 평 듣기도
“삼성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바뀌고, 변화할 기미도 전혀 없는데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삼성과 관련해서는 내 역할은 10년 전에 끝났다.”
10년 전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 비자금’의 실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용철(59) 전 삼성 법무팀장(현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이하 호칭 생략)은 전화 통화에서 “삼성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더 없다”며 찾아오지도 말라고 말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안고 지난달 28일 광주로 무작정 찾아갔으나,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김용철은 2010년 12월 광주교육청의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공개 경쟁을 통해 채용됐다. 그는 “교육감(장희국)과 아무런 인연이나 안면이 없었다. 직업 없이 놀고 있을 때 광주에 있는 친구들이 개방형 감사담당관 자리에 응모해보라고 권했다. 고향에 가서 일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내려왔다”며, 짧게 근황을 설명했다. 전설적인 특수부 검사였던 그가 감사 책임자가 된 뒤 광주 교육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주변의 평이다. 그는 학교 건축이나 각종 공사와 관련한 입찰 비리, 촌지 수수 등의 낡은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맡은 일마다 일벌백계로 다뤘다. 광주교육청의 한 출입기자는 8일 “김 감사담당관이 취임 직후부터 엄한 잣대를 들이대자 초기에는 일선의 반발도 있었지만, 차츰 적응해 지금은 광주의 교육계만큼은 아주 투명하고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광주일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김용철은 1989년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과 서울지검에서 줄곧 특수부 검사로 일했다. 검사는 정의감 강한 그에게 딱 맞았다.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사람을 폭행한 처남을 구속하도록 한 일은 법조계에서 유명하다. 그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친가와 처가 형제들과 의절해야 했다.
김용철은 1995년에 시작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 때 검찰의 전설을 하나 만들었다. 1996년 전두환 비자금을 파던 중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전두환의 돈 61억원을 찾아냈다. 부담을 느낀 정권과 검찰 고위간부들이 수사 중단을 요구했지만, 그는 김석원 자택을 뒤져 사과상자에 담긴 현금을 압수했다. 이 일로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자, 그는 검찰 조직에 환멸을 느끼고 옷을 벗었다.
“기업에 들어가서 법조인 역할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합리적 경영기법을 갖춘 일류 기업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삼성을 생각한다> 121쪽) 그는 변호사 말고 인사팀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했지만, 삼성은 그를 처음부터 법무실에 배치했다. “그때부터 검찰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뇌물성 현금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종종 받았다. 나는 이런 지시를 때로 이행했고, 때로 거부했다.”(<삼성을 생각한다> 125쪽) 삼성 조직과 불화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2004년 7월 스스로 삼성 임원(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그만둔 최초의 사람이 됐다.
삼성은 김용철이 2007년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등을 이유로 법무법인 ‘서정’에 압력을 넣어 변호사 김용철을 내쫓도록 압박했다. 김용철이 2007년 10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가 삼성 비자금과 자신이 삼성에서 저질렀던 불법 행위들을 양심고백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파장은 엄청났다. 삼성 비자금 특검(조준웅)이 구성돼, 삼성이 숨겨놓은 돈 4조5천억원을 찾아냈다. 그러나 특검은 이 돈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의 차명재산이라며 삼성에 돌려주고,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조준웅의 아들은 이후 특채로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건희는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아, 오랫동안 따라다니던 불법 경영권 세습 꼬리표를 거의 ‘말끔히’ 털어냈다. 넉달 뒤 대통령 이명박은 이건희 1인에 대해 특별사면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개인은 그것이 비록 영광스럽더라도 힘들다. 김용철 역시 양심고백 이후 “정의의 사도”라는 찬사와 박수 못지않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삼성은 나에게는 과거다. 지금은 현재의 내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 봤듯이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 그가 던진 짧은 이야기다. 김용철의 미래를 조용히 지켜보는 게 그에게 빚진 사람들의 몫이리라는 생각에 그와 기쁘게 헤어졌다.
하동/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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