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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가다… 황룡의 꿈 펼친 하늘이 내어준 요새 오녀산성
중국 환런(桓仁) | 이기환 사회에디터 http://leekihwan.khan.kr/ 입력 : 2014-10-29 21:19:28ㅣ수정 : 2014-10-30 15:50:52
환런(桓仁) 시내에서 8㎞쯤 달렸을까.
단풍이 곱게 물든 산길을 굽이굽이 돌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상상 속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 떡하니 솟아있다. 이름하여 오녀산성이다. 산과 마을을 수호하던 선녀 5명이 흑룡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해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고구려의 발상지라면서 뜬금없는 오녀산성이라니…. 하지만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어쩌랴.
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녹록지 않다. 입구에서 30~40분간 999계단을 힘겹게 오르다가 숨이 목젖까지 차오를 때면 정상(해발 820m)에 닿는다.
정상은 남북 길이 1.5㎞, 동서 길이 200~300m의 평평한 땅이다. 고구려 사람의 체취가 곳곳에서 풍긴다. 그들이 쌓았던 성벽의 흔적이 보이고, 그들이 마셨던 우물이 그대로 있다. 후대 사람들이 ‘소천지(小天地)’란 재치있는 이름을 붙였다. 궁궐터와 곡식창고, 대형맷돌 등의 유적·유구들이 잇달아 보인다. 고구려 군인들의 내무반터에서 온돌의 흔적이 보인다. 옛 문헌의 기록 그대로다.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 불을 때서 따뜻하게 만든다”(<후당서>)
‘운해송도(雲海松濤)’라 이름 붙인 전망대에 서면 100m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필자의 오금이 저려온다.
몸서리를 치며 살짝 눈을 들자 환런 시내와, 시내를 ‘역S자’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시선을 휘어잡는다.
“저 강이 역사서에 보이는 비류수(지금은 훈강·渾江)입니다. 고구려 역사의 탯줄이라 할 수 있는….”
신형식 전 이화여대 교수와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이 한목소리를 낸다. 답사단(강남문화원)을 이끈 최병식 강남문화원장은 “강과 강 유역의 도읍, 산성 등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소리친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시(桓仁市)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오녀산성 정상. 100m 수직벼랑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과연 천험의 요새다. 저 멀리 역S자 모양의 비류수가 보인다. 기원전 37년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비류수 가에 정착한 뒤 이곳 오녀산에 산성을 세웠다(기원전 34년). 환런(중국) | 사진작가 이오봉씨·강남문화원 제공
■ 주몽의 ‘기획 결혼’
2000여 년 전 저 비류수와, 이 산성에서 일어난 흥미진진한 역사를 되돌아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다.
“추모(주몽) 일행은 비류곡의 홀본(졸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建都) 세위를 다하지 못한 왕은 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하늘이 보내준 황룡의 머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광개토대왕 비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성왕조’는 이때의 상황을 부연 설명해준다.
“주몽이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렀다.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도읍하려 했다. 그러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무슨 말인가. 주몽은 동부여 태자(대소)의 추격을 피해 창졸간에 망명했다. 나라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짓고, 서쪽 산(오녀산)에 산성을 지을 작정이었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숨어있다.
<삼국사기>는 “도망친 주몽이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고 왕위를 이었다”고 했다. <삼국사기>는 이 기록 밑에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미망인인 소서노와 혼인했다”는 다른 설(說)도 소개했다. “소서노가 주몽의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과 함께…. 어떤 내용이 맞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눈에 들어, 혹은 능력있는 여인(소서노)을 얻어 창업의 날개를 달았음을 알 수 있다. 빈손으로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으로서는 ‘기획 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오녀산성 원경.
■ ‘듣보잡’ 취급당한 주몽
동명왕(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했다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비류수 상류에 기존의 비류국이 버티고 있었다. 행인국과 동부여, 북옥저, 낙랑국도 신생국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렸다. 중원의 한나라는 물론 선비와 말갈족 등 이민족도 위협적이었다. 주몽은 우선 비류국을 도모하기로 했다.
“기원전 36년 왕이 비류국을 찾아가자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명성왕조’)
송양이 동명왕을 ‘듣보잡’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러자 주몽은 “난 천제의 아들인데, 여기(비류수 유역)에 도읍을 정했다”고 말했다. 송양은 피식 비웃었다.
“우린 여러 대에 걸쳐 임금노릇을 했다. 여긴 땅이 좁아 두 주인이 나눠 가질 수 없다. 항복하는 편이 나을걸….”
결국 동명왕과 송양은 활쏘기로 승자를 가렸는데, 송양이 대적할 수 없었다.(<삼국사기>)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은 <고기(古記)> 등을 인용, 나라의 운명을 건 ‘벼랑 끝 결투’ 장면을 현장중계한다.
“네가 천제의 후손이라고? 헛소리마라. 활쏘기로 겨루자.”(송양)
송양은 사슴 표적을 100보 안에 놓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동명왕은 옥(玉)으로 만든 가락지를 100보 안에 걸어놓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정확히 옥가락지를 꿰뚫었다. 동명왕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고구려주민들의 생명수였던 천지.
■ 주몽, 황룡 타고 승천하다
한숨을 돌린 동명왕은 창업 4년째(기원전 34년) 미뤄뒀던 성곽과 궁궐을 건설했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34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일주일간이나 빛을 분간하지 못했다.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세운 성’, 즉 오녀산성인 것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이때의 상황을 드라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검은 구름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했다. 오직 수천명의 소리가 들렸다. 토목 공사를 하는 것 같았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했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의미심장한 기록이 또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전 35년 황룡이 나타나고, 상서로운 구름이 보였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고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동명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국 황룡은 주몽(추모), 즉 동명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녀산성의 온돌유적.
■ 수성에만 만족하지 않은 아들
동명왕은 창업(기원전 37년)-비류국 접수(기원전 36년)-성곽 및 궁실 축조(기원전 34년) 등 나라의 기틀을 잡는다.
이어 행인국(기원전 32년)과 북옥저(기원전 28년)마저 정벌, 성읍으로 삼았다. 고구려 시대의 개막이었다. 주몽(동명왕)을 죽이려던 동부여도 고구려의 기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4년(동명왕 14년) 동명왕의 생모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다. 동부여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고구려는 동부여의 처사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사신을 부여로 보내 토산물을 보냈다. 바야흐로 동부여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19년 동명왕은 홀본성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타고 승천했다.(광개토대왕비문)
노심초사 나라의 기틀을 잡느라 지존(至尊)의 자리를 즐기지 못했던 동명왕이 아니었던가. 22살에 창업했고, 19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다가 겨우 마흔살 언저리에 승천한 것이다.
그가 품었던 ‘황룡의 꿈’은 맏아들 유리(왕)에게 이어졌다. 아버지가 말 위에서 이룩한 ‘창업(創業)’의 기틀 위에 나라를 유지해야 할 ‘수성(守成)’도 유리왕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 면에서 개국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비축해서 나라의 기틀을 쌓는 데는 이 깎아지른 듯한 지형의 (오녀)산성이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유리왕은 ‘수성(守成)’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간직한 ‘황룡의 대업’을 펼치기 위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 황룡의 현신
주변의 소국을 속속 흡수함에 따라 먹여 살려야 할 경작지도 더 필요했다. 당연히 천도론이 제기됐다.
“기원후 2년(유리왕 21년) 설지(제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었다. ‘국내 위나암(현 지안 퉁거우·集安 通溝)은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오곡을 키우기 알맞습니다.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생산됩니다.’”
설지는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무진하고, 전쟁의 걱정도 면할 것”이라고 천도를 강력히 추천한다. 유리왕 역시 설지의 천도론을 좇았다.
이듬해인 기원후 3년 10월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성을 쌓았다.
“지안은 천혜의 도읍지 터입니다. 북위 41도의 북쪽 지방이지만 노령산맥이 북풍을 잘 막아주고…. 여기에 우산(북)과 용산(동)이 울타리가 되고, 남쪽에는 서해 바다로 나가는 압록강이 온대 계절풍을 실어나르고…. 그런 의미에서 지안을 두고 ‘새외(塞外)의 소강남’이라 일컫고 있습니다.”(신형식 교수)
고구려는 두번째 도읍에서 424년간(유리왕 22년 기원후 3~장수왕 15년 기원후 427년) 주몽이 꿈꿨던 ‘황룡의 꿈’을 마음껏 펼쳤다.
필자는 지금 이 순간 오녀산성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숨어 저 멀리 실개천처럼 흐르는 비류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37년간의 도읍은 그 몫을 다한 뒤 황룡의 전설로 남았다. 구름 사이로 햇빛의 줄기가 뻗어 땅과 통한다. 혹 황룡의 현신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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