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11320.html?_fr=mt2
MB 정부 블랙리스트 ‘예언’한 10년전 원세훈과의 만남
등록 :2017-09-17 17:41 수정 :2017-09-17 18:06
[한겨레 프리즘] 원세훈과 이진법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10년도 넘은 일인데, 그날 느낀 찝찝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의혹’ 취재팀에 파견을 갔을 때다. <한겨레>의 집요한 보도에 어떤 서울시 관계자는 우리를 으르고, 다른 서울시 관계자는 달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서울시 행정1부시장이었던 원 전 원장이 우리 팀과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약속 장소는 서울시청 근처 맥줏집. 음식은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어 직접 가져다 먹어야 했다. 원 전 원장은 그곳에 초로의 남자를 대동하고 왔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소개를 안 했다. 맥줏집에 앉아 있는 내내, 원 전 원장이 그를 대하는 눈빛과 턱짓은 마치 양반 주인이 노비를 대하듯 고압적이었다. 기자들한테 보이는 친절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날 식사 자리의 하이라이트는 그 남자가 원 전 원장이 먹을 음식을 대령할 때였다. 원 전 원장은 단 한 차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말석에 정물처럼 앉아 있다가 원 전 원장의 접시가 빌 때쯤 되면 다시 음식을 가져다줬다.
참, 무례하다 싶었다. 원 전 원장이 그 남자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을까. 더구나 초면인 기자들도 있는데. 우리를 대하는 모습도 가식처럼 보였다. 자기한테 필요하거나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그래서인지 ‘이명박 시장은 훌륭한 분’이라는 그의 이야기에선 아무런 울림도 느낄 수 없었다.
며칠 전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이명박 정부 시기 블랙리스트 문건 조사 결과를 보다가 그날 저녁 자리가 떠올랐다. 원 전 원장이 직접 지시해 2010년 3월 만들었다는 ‘엠비시(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엔 “공영방송 잔재 청산, 고강도 인적 쇄신, 편파 프로 퇴출에 초점을 맞춰 근본적 체질 개선 추진”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 중엔 “정부 비판 연예인 광고주에 반대 이메일 발송, 광고모델 교체 유도”, “특정 연예인 이미지 실추 유도 심리전” 같은 것도 포함돼 있었다.
우와, 세상에. 머릿속에 언론의 공적 기능,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 같은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국정원장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사람이 어떤 지경이 되면 국가기관에서 ‘브이아이피’(VIP) 심기를 보좌하겠다고 연예인의 인격살인을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실행하도록 만드는 걸까. 하긴, 행정고시 출신의 직업 공무원이 그간 해오던 일과 전혀 무관한 정보기관 수장에까지 오르려면, 의식의 흐름은 0과 1을 왔다 갔다 하는 이진법처럼 ‘나의 출세’와 ‘브이아이피 보위’ 사이만을 오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에 사람, 인권, 인격 같은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원 전 원장 재직 때 직원들이 일하다 말고 그의 개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는 주장까지 나온 걸 보면, 이런 추정이 망상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그를 알아본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본능도 경이롭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전방위적 불법사찰을 벌인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그를 이듬해 2월 국정원에 보낸 걸 보면 말이다. 결국 원 전 원장은 <문화방송>(MBC)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한국방송>(KBS)을 입맛대로 요리했다. 할 말 하는 연예인들은 일터를 잃었다. 원 전 원장이 한 이런 일들을 곱씹을수록 ‘악의 기원’이란 말이 입속을 맴돈다, 찝찝하게도.
조혜정 대중문화팀장 zesty@hani.co.kr
MB 정부 블랙리스트 ‘예언’한 10년전 원세훈과의 만남
등록 :2017-09-17 17:41 수정 :2017-09-17 18:06
[한겨레 프리즘] 원세훈과 이진법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10년도 넘은 일인데, 그날 느낀 찝찝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의혹’ 취재팀에 파견을 갔을 때다. <한겨레>의 집요한 보도에 어떤 서울시 관계자는 우리를 으르고, 다른 서울시 관계자는 달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서울시 행정1부시장이었던 원 전 원장이 우리 팀과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약속 장소는 서울시청 근처 맥줏집. 음식은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어 직접 가져다 먹어야 했다. 원 전 원장은 그곳에 초로의 남자를 대동하고 왔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소개를 안 했다. 맥줏집에 앉아 있는 내내, 원 전 원장이 그를 대하는 눈빛과 턱짓은 마치 양반 주인이 노비를 대하듯 고압적이었다. 기자들한테 보이는 친절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날 식사 자리의 하이라이트는 그 남자가 원 전 원장이 먹을 음식을 대령할 때였다. 원 전 원장은 단 한 차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말석에 정물처럼 앉아 있다가 원 전 원장의 접시가 빌 때쯤 되면 다시 음식을 가져다줬다.
참, 무례하다 싶었다. 원 전 원장이 그 남자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을까. 더구나 초면인 기자들도 있는데. 우리를 대하는 모습도 가식처럼 보였다. 자기한테 필요하거나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그래서인지 ‘이명박 시장은 훌륭한 분’이라는 그의 이야기에선 아무런 울림도 느낄 수 없었다.
며칠 전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이명박 정부 시기 블랙리스트 문건 조사 결과를 보다가 그날 저녁 자리가 떠올랐다. 원 전 원장이 직접 지시해 2010년 3월 만들었다는 ‘엠비시(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엔 “공영방송 잔재 청산, 고강도 인적 쇄신, 편파 프로 퇴출에 초점을 맞춰 근본적 체질 개선 추진”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 중엔 “정부 비판 연예인 광고주에 반대 이메일 발송, 광고모델 교체 유도”, “특정 연예인 이미지 실추 유도 심리전” 같은 것도 포함돼 있었다.
우와, 세상에. 머릿속에 언론의 공적 기능,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 같은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국정원장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사람이 어떤 지경이 되면 국가기관에서 ‘브이아이피’(VIP) 심기를 보좌하겠다고 연예인의 인격살인을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실행하도록 만드는 걸까. 하긴, 행정고시 출신의 직업 공무원이 그간 해오던 일과 전혀 무관한 정보기관 수장에까지 오르려면, 의식의 흐름은 0과 1을 왔다 갔다 하는 이진법처럼 ‘나의 출세’와 ‘브이아이피 보위’ 사이만을 오가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에 사람, 인권, 인격 같은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원 전 원장 재직 때 직원들이 일하다 말고 그의 개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는 주장까지 나온 걸 보면, 이런 추정이 망상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그를 알아본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본능도 경이롭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전방위적 불법사찰을 벌인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그를 이듬해 2월 국정원에 보낸 걸 보면 말이다. 결국 원 전 원장은 <문화방송>(MBC)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한국방송>(KBS)을 입맛대로 요리했다. 할 말 하는 연예인들은 일터를 잃었다. 원 전 원장이 한 이런 일들을 곱씹을수록 ‘악의 기원’이란 말이 입속을 맴돈다, 찝찝하게도.
조혜정 대중문화팀장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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