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2048

6.25 때 한강다리 폭파한 대령, 왜 무죄 선고 받았나
총살 당한 최창식 대령, 부인의 재심청구로 사후 '무죄'... 한 사람에게 죄를 몰아준 이승만 정권
17.09.21 10:54 l 최종 업데이트 17.09.21 10:56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박순옥(betrayed)


▲  한국전쟁 당시 서울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탱크.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950년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정부는 무책임했다. 전쟁 이틀 뒤부터 대통령이 피난 가기에 바빴다.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부는 서울에 머물 것"이라며 시민들을 안심시켜 놓고는 6월 27일 오전 2시, 국회에 통보도 않고 서울을 떠났다. 

미 국무성이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와 다나카 다쓰오 전 일본 통산성 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각에 이승만 대통령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대사한테 일본 망명 의사까지 전달했다. 이 내용은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교도통신을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이승만 정권은 6월 28일 새벽 2시 40분경 한강인도교마저 절단함으로써 시민들의 발을 꽁꽁 묶어놓았다. 그래서 서울 시민들은 피난의 적기를 놓쳤고, 이 때문에 상당수 시민들이 서울 수복 뒤에 북한군 부역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으로 피해를 입은 쪽은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었다. 고위층에서도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다. 

1921년 서울에서 출생한 최창식은 스물두 살 때인 1942년 12월 일본 육사를 56기로 졸업했다. 잠시 견습사관을 거친 뒤에는 일본군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일제 패망 당시에는 공병 대위였다. 이런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돼 있다.  

최창식은 일제 패망과 함께 위기를 맞았지만, 이것은 도리어 기회가 됐다. 미군정 하에서는 한국인 장교가 부족했다. 공병 장교는 더욱 더 그랬다. 최창식은 정부 수립 4개월 뒤인 1948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에 특채된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해방 후, 1948년 12월 특임 5기로 육군 소위로 임관해 육군 공병과 창설에 참여했다. 이어서 육군 제1공병단 단장을 거쳐 1949년 6월 육군 대령으로 육군본부 공병감으로 부임했다."

스물아홉 살에 공병부대 책임자가 된 것은 당시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1948년 12월에 국방부참모총장이 된 채병덕 준장도 임명 당시 34세였다. 국방부참모총장은 해군과 육군의 통합 지휘관이었다. 1949년 5월 이 직책이 없어지면서, 채병덕은 제2대 육군총참모장이 됐다. 그 해 10월 해임됐다가 1950년 4월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최창식은 위기에 봉착했다. 6월 27일 새벽 국회에서 한강 다리 폭파가 논의되고 서울 근교에서 포탄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그날 오전 11시 채병덕 총참모장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 

당시 한강에는 다리가 세 개 있었다. 서쪽에서부터 한강철교·한강교·광진교다. 한강교는 나중에 제1한강교로 불리다가 한강대교로 개칭됐다. 열차가 아닌 사람이 건너는 다리라고 해서 한강 인도교란 별칭이 있었다. 서울 여의도와 한강 이북을 잇는 다리가 서강대교·마포대교·원효대교다. 원효대교를 지나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강철교와 한강대교가 연달아 나온다. 광진교는 광장동과 천호동을 이어주는 다리다. 

한강다리 폭파하고도 군법회의에... 최창식 대령


▲  끊어진 다리.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의 임진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다리 폭파를 지시받은 최창식 공병감은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폭파 준비를 지시했다. 엄 중령은 오후 4시에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 그런데 국군이 다시 북상할 것이다, 미군이 올 것이다 등등의 소식이 들리면서 폭파는 잠시 지연됐다. 

그러다가 28일 새벽 1시쯤 북한군 전차 2대가 미아리고개에 출현하자, 채병덕 총장은 최창식에게 전화로 다시 한번 폭파 명령을 내렸다. 북한군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면 폭파하라는 명령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2시 20분쯤 한강 인도교를 건넌 채병덕은 인도교 남단에서 최창식에게 '좀 있다 폭파하라'는 지시를 한번 더 내리고 현장을 떠났다. 

3개월 뒤인 9월 21일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피고인 최창식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채 총장은 구체적인 폭파 시각은 지시하지 않았다.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면 폭파하라는 선에서만 지시했다. 

위 군법회의 판결문에 따르면, 채병덕이 지나가고 10여쯤 지난 2시 30분경, 최창식은 한강철교 폭파를 집행한 데 이어 2시 40분경 한강 인도교 폭파를 집행했다. 이때 한강 인도교에는 4천 명 정도가 있었다. 이 중에서 500~800명 정도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차량은 약 50대 추락했다. 

한편, 한강철교 폭파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철교를 구성한 3개의 다리 중 하나만 폭파됐다. 그래서 한강 교량 절단으로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겠다는 계획은 부분적 성공에 그쳤다. 한편, 광진교 폭파는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  한강대교. 한강 이북의 이촌한강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강 다리 폭파로 북한군의 남진은 어느 정도 지연됐다. 하지만, 폭파 시점은 객관적으로 부적절했다. 최선의 폭파 시점은 북한군이 한강교 북단에 도달했을 시점이다. 하지만, 채병덕은 북한군이 시내에 진입했을 때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최창식은 이 명령을 그대로 집행했다. 최창식은 공병감이었으므로 재량권을 발휘할 수도 있었지만, 채병덕의 명령을 그대로 집행했다. 

9월 21일 군법회의에서 재판장 문대섭 대령은 "설령 채 총장이 폭파 명령을 내렸더라도, 폭파 시각은 피고의 재량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창식은 "만약 시간이 좀더 지연됐다면 적에게 한강교가 점령됐을지 모르지 않습니까?"라며 "시각에 관해서는 저에게 재량권이 없었으며, 저는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라고 답변했다. 

폭파 시각을 좀만 늦췄다면 북한군이 한강교를 점령했을 거라는 최창식의 판단은 사실과 달랐다. 북한군 전차가 한강교 북단에 출현한 시각은 28일 오전 10시였다. 폭파 7시간 반 뒤였다. 7시간 반이나 빨리 폭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최창식한테도 판단을 잘못 내린 책임이 있었다. 보다 큰 책임은 이승만 정권에 있지만, 그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악의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난민 행렬, 군용차량 행렬, 북한군 포탄 소리 때문에 상황의 긴박성을 과도하게 인식했을 수도 있다. 그의 판단에는 27일 새벽 2시 40분쯤 폭파하는 게 최선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진지한 판단 끝에 폭파를 집행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이 있다. 1962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다리가 폭파된 그 시각에 부인 옥정애(당시 25세)는 첫 돌이 안 된 아들과 함께 서울 시내 친정집에 있었다. 다리 폭파 뒤에 피난을 못 간 점을 볼 때, 한강 이북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가족을 서울 시내에 둔 채 다리를 폭파해야 했다면, 그 나름으로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폭파는 성급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군 병력 4만 명과 군사 장비가 한강 이북에 묶였다. 이것은 개전 초기에 한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린 원인 중 하나였다. 한강 다리 폭파는 여러 모로 실패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전비행죄로 총살... 부인의 재심 청구로 사후 '무죄선고'


▲  한강대교 북단에서 찍은 한강철교. ⓒ 김종성

채병덕 총장이 한강 다리 폭파를 최초로 명령한 시점은 6월 27일 오전 11시다. 이 날 새벽에 열린 국회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채병덕의 폭파 명령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회에서 논의된 사안을 총참모장이 임의로 결정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리 폭파가 정부 차원에서 결정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9월 21일 군법회의에서는 최창식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채병덕은 이미 7월에 전사했다. 그래서 최창식한테만 책임이 떠넘겨졌다. 최창식 본인의 책임에 더해 정권 차원의 책임까지 떠넘겨진 것이다. 한 사람한테 죄를 몰아준 셈이다. 

최창식의 죄목은 국방경비법 제27조의 '적전 비행죄'였다. 적 앞에서 비행이나 근무 태만을 저질러 아군에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적전 비행을 저지른 것은 이승만 정권이지만, 그런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최창식은 재판 당일인 9월 21일 총살형을 선고받고 그날 곧바로 사형집행을 받았다. 그는 권력을 쥐려고만 했지 국민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하급자들에 대해서도 조금도 책임질 줄 모르는 이승만 정권의 불행한 희생양이었다. 

1964년 11월 최창식은 사후에나마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의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부인 옥정애의 재심 청구를 받은 재판부는 무죄 선고라는 결단을 내렸다. 너무나 억울한 희생양이었다는 동정 여론에 더해, 이승만 정권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가 무죄 선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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