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2361396

전쟁 포화 아래서도 해맑은 아이들, '슬프지만 아름다운'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30 - 마지막] '평화 통일의 비망록'이 되길
17.09.21 16:34 l 박도(parkdo45) 


1953. 7. 27. 판문점, 정전회담 조인식, 2년여 동안 1천 시간 가까운 격렬한 논쟁으로 지루하게 끌어오던 정전협정 조인식은 1953. 7. 27. 오전 10시 정각 양측대표가 착석하여 11분 만에 끝났다. 왼쪽 책상에서는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 장군이, 오른쪽 책상에서는 북한 측 남일 장군이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NARA

세균탄

1999년 8월 4일, 그날 나는 독립지사 후손 김중생, 이항증 두 선생의 안내로 중국 동북지방 하얼빈 일대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그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거지인 하얼빈역 플랫폼을 답사한 뒤 거기서 가까운 옛 일본영사관, 동북열사기념관 등지를 둘러봤다. 

그날 우리 일행은 장춘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명 '마루타부대'라고 일컬어지는 731부대로 갔다. 마루타(まるた)란 통나무를 뜻하는 일본어로 산 사람을 마치 통나무처럼 다루기 때문에 붙어진 별칭이었다.

그곳은 지난날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 731특수부대 요원들이 항일연군 포로나 몽고인, 러시아인 등을 생체 실험도구로 썼던 악명 높은 부대가 있던 곳으로, '땅 위의 지옥'과 같았다.


세균탄피 일본군 731부대 죄증진열관에 전시된 세균탄 탄피. ⓒ 박도

731부대원들은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우(石井四郞)의 이름을 딴 '이시이식 배양기' 4500개를 갖췄다. 그들은 수만 마리의 실험용 쥐를 기르며 각종 병균이나 진드기, 벼룩 등 해충들을 번식시키며 세균탄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세균탄의 위력은 그 어떤 무기보다 뛰어나서 적지에 투하하면 한꺼번에 다량의 인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이 세균탄으로 숱한 인류가 고통스럽게 생명을 잃을 뻔했다. 

일본 패망 후 731부대원들은 실험 자료들을 미국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날 '침화일군 제731부대 죄증진열관'에 전시된 여러 가지 실험용 기구와 방독면, 실험용 동물 우리 등을 돌아봤다. 한쪽 모서리에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투하했다는 세균탄피도 세워져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세균탄 투하를 극구 부인하고, 북한과 중국은 1952년 2월에 만주 일대에 투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국제과학조사단이 현장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참가했던 영국의 학자 조셉 니담은 '미국이 세균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98% 확신한다'고 말했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제1권 275쪽


b81 1953. 6. 서울, 반공포로들이 풀려난 다음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만세!”를 부르짖고 있다.ⓒ NARA

반공포로 석방

정전협정 조인을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18일 밤.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국 포로수용소에서 약 2만 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이 일시에 석방됐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보장해 달라는 복선이 깔린 일종의 시위였다. 전 세계는 이 조치에 경악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8년 재임 중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으로 전해진다. 그는 "미국은 우방을 잃은 대신 적을 하나 더 얻었다"라고 개탄했다. 처질 영국 수상은 이승만 대통령을 '배반자'로 비난하며 미국 정부에 이승만 대통령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 직에서 쫓아내라고 비밀리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승만 대통령의 이 조치는 막 닻을 내리려던 정전협정회담에 새로운 암초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전협정 회담장에 앉은 쌍방은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이 돌발사태에 유엔군은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고 확약함으로써 마지막 암초는 곧 제거됐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마침내 동쪽 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실무자가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입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쪽 입구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실무자가 들어와 판문점 정전회담장에 착석했다. 

양측 대표는 서로 목례도, 악수도 없었다. 정전회담장은 시종 냉랭한 분위기였다. 정전회담장에는 북쪽으로 세 개의 탁자를 나란히 배치해뒀다. 

세 개의 탁자 중 가운데 탁자를 완충 경계지역으로 양쪽 탁자에 앉은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들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정본 9통, 부본 9통의 정전협정문에 부지런히 서명을 했다. 양측 대표가 서명을 마치자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에 건넸다.


1953. 7. 7. 판문점, 유엔군 측 해리슨 대표(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를 비롯한 연락장교 일동.ⓒ NARA


1951. 7. 16. 개성, 정전회담장에 나타난 공산군 측 대표. 왼쪽부터 중국군 대표 세팡(謝芳), 덩화(鄧華), 인민군 남일 대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NARA

한국 대표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날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기 서른여섯 번씩 서명을 했다. 정전협정 조인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유엔군 전폭기가 하늘에서 무력 시위라도 하듯, 정전회담장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폭탄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양측 대표는 10여 분간 서명을 마쳤다. 

그런 뒤 그들은 정전협정서를 교환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2분이었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은 회담장 분위기조차 글자 그대로 '정전'이었지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소련이 정전협정을 제의한 지 25개월 만에, 모두 765차례 회담 끝에 이뤄졌다. 이날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기자단도 유엔군 측 기자는 100명 정도였고, 일본인 기자도 10명이었는데, 한국인 기자는 단 2명뿐이었다.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 참여없이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날 정전협정 서명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정전협정문에는 서명 시점에서 12시간이 지난 뒤부터 전투 행위를 중지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유엔군 전폭기들은 북한의 비행장과 철로들을 폭격했고, 유엔군 해군 전함들은 동해바다에서 원산항 쪽으로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휴전직전 최후 순간까지 서로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53. 4. 13. 판문점, 부상 포로가 돌아온 즉시 앰뷸런스로 후송되고 있다. ⓒ NARA

전쟁에서 교전국간 페어플레이나 자비를 바랄 순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시작인 북한의 기습 남침에서 유엔군의 마지막 북폭까지 이 나라 백성들의 생명이나 인권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더티(Dirty, 더러운)한 전쟁으로 세계전쟁사에 남았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그제야 정전협정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155마일 휴전선에 총성이 멎었다. 3년 1개월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양측이 서로 승자라고 우기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일단 정전됐다.


1950. 10. 12. 미 미조리 군함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 NARA

강대국 사이에서 놀아난 한민족

이 기간 동안 양측에서 민간인 포함 약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단장의, 원한과 통곡의 휴전선을 남겼다. 

이와 반면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침체기의 경제를 부흥시킴과 동시에 서방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할 만큼 태평양전쟁 패전의 잿더미를 재건시키는 데 원동력으로 삼았다. 

또한 북한은 전쟁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공고히 굳혔고, 남한 역시 흔들리던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힘없는 백성들만 소련제·미국제 무기를 들고 내 핏줄, 내 형제를 원수처럼 서로 무참히 죽이는 어릿광대짓을 했다. 강대국의 이해타산에 놀아난 참으로 어이없는 전쟁이었다. 

아직도 한국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잠시 쉬는 '정(휴)전' 상태로 한반도는 어정쩡한 화약고로 남아 있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양측의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도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지 않았나. 남과 북 모두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군사력 증강을 꾀했다. 

결국 국제 무기업자들의 농간에 놀아난 셈이다. 양측의 애꿎은 백성들은 민생에 더욱 허덕이고, 젊은이들의 고귀한 생명만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1953. 7. 26.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 NARA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중국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였다. 북한은 이를 근거로 남한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전협정은 물론 평화협정으로의 전환과정에서 아무런 당사자로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한국전쟁의 직접 교전당사자로서 한국전쟁을 매듭짓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결과 평화협정의 체결은 당연히 남북한 간에 논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이승렬 '64주년 한반도 정정협정의 주요 쟁점과 과제' 국회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2017년 7월 31일)

이제는 한국전쟁 당사자였던 남과 북 및 미국 그리고 중국 등 관계자들이 다시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우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체결해야 한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 통일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런데 평화적인 협상이란 서로 양보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 특히 남과 북의 백성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상대의 지난날 잘못을 용서하고, 그 아픔에 서로 공명할 때 비로소 남북 평화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실 남과 북의 백성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피해자다. 

한국전쟁 70돌이 가까워지고 있다. 남과 북 백성들은 이제라도 분단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남북 백성들은 슬기로운 지혜를 모아 국토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도 다시 분단 이전 상태로 돌려놔야 한다. 

5000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무척 슬기로웠다. 그렇기에 나는 한반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확신한다. 

남과 북의 백성들이여! 이제는 분단의 미몽에서 깨어나라.


1953. 7. 27. 유엔군 야전 참호에서 병사들이 정전 소식을 전달받고 있다.ⓒ NARA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기를

30회로 연재해온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기획이 조국 평화 통일의 길을 여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이 기획을 연재하는 목적이요, 목표였다. 

나는 2004년, 2005년 그리고 2007년 세 차례 미국에 방문해 연 70여 일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출근했다. 그곳에 있는 수십만 장의 한국 관련 사진과 문헌을 검색하면서 때로는 가슴 아팠고, 눈물을 흘리면서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문서를 스캔해 입수했다.


1951. 10. 26. 부산. 어린이들의 티 없는 웃음.ⓒ NARA


1951. 11. 18. 한 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도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 NARA

그런 가슴 먹먹한 가운데도 어린 소년소녀들의 구김살 없는 밝은 표정을 봤을 때는 우리 민족의 내일을 낙관했다. 

그동안 애독해주시고 성원해주시며 후원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 원고를 다시 깁고 보태고 가다듬은 뒤 '한국전쟁 비망록'으로 펴낼 예정이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 올린다.

2017년 9월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글방'에서 박도 올림 


1953. 7. 30.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NARA


1953. 7. 28. 개성, 중국군 펑더화이(彭德懷) 총사령관이 정전 협정 조인에 서명하고 있다.ⓒ NARA


1953. 7. 29.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정전협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NARA


1953. 8. 12. 판문점, 북한군 포로들이 유엔군에서 지급한 옷을 벗거나 찢어서 도로가에다 버린 채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NARA


1953. 8. 6. 북한으로 돌아가는 인민군(여) 포로들이 열차 밖으로 인공기와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부르짖고 있다. ⓒ NARA


1953. 10. 11. 판문점. 한 북한군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북으로 돌아가자 북한 측 대표들이 환영하고 있다.ⓒ NARA


1954. 1. 20. 중국군 포로 가운데 자유중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이 자유중국기, 태극기, 성조기와 장개석 총통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NARA


1954. 2. 16. 판문점, 북측 대표가 북으로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설득하고 있다. ⓒ NARA

덧붙이는 글 | * 2004년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에 이어 이번 연재에도 미처 오마이뉴스 독자에게 소개하지 못한 1000여 컷의 한국전쟁 사진과 북한 측 노획 자료는 다음 기회에 다른 연재로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