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14479.html?_fr=mt1

김문기를 꺾은 건 교수와 학생의 연대였다
등록 :2017-10-14 09:20 수정 :2017-10-14 12:09

[토요판] 커버스토리
상지대 사람들, 끈끈한 연대로 비리 사학재단 몰아내고 ‘사학 민주화’ 주춧돌 놓은 10년 이야기



▶ 지난 8월 상지대는 ‘김문기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정대화(61) 교수를 총장직무대행으로 선임함으로써 1993년에 이어 두번째로 민주대학 시대를 맞았습니다. 2010년 김문기 전 총장 쪽의 옛 재단이 학교를 장악한 이후 만 7년의 싸움 끝에 얻은 결과입니다. 정 총장대행(이하 호칭 생략)은 요즈음 인근 고교를 찾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상지대에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공영 사학에 선정될 수 있도록 준비작업을 하는 등 학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를 찾아 민주화 투쟁 주역들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본관 2층의 총장실은 아직 어수선했다. 길쭉한 회의 탁자 뒤쪽 책장과 그 앞에는 김문기 전 총장이 사용했던 책들과 명패, 액자, 그림 등이 쌓여 있었다. 다시 돌아올 거니까 손을 대지 말라고 해서 그렇다고 했다. 김문기 책상에 있었던 난 화분 두개도 바짝 마른 채 한편에 놓여 있었다. 김문기는 정대화가 총장대행에 임명된 뒤에도 그동안 세차례 총장실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총장석에 말없이 앉았다 가는 등 자신의 흔적을 끊임없이 남기고 있다.

하지만 김문기 때와 달리 총장실은 이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그가 총장실에 발걸음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교수와 졸업생, 학생들이 수시로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상지대는 SKY 대학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상지대가 지향하는 교육은 1등을 뽑아 1등으로 졸업시키는 것이 아니라 뒷등을 뽑아 앞등으로 졸업시키는 성취 교육이다”라고 적었다. 상지대 정상화의 최전선에 섰던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이 본관 2층 총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상지대는 SKY 대학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상지대가 지향하는 교육은 1등을 뽑아 1등으로 졸업시키는 것이 아니라 뒷등을 뽑아 앞등으로 졸업시키는 성취 교육이다”라고 적었다. 상지대 정상화의 최전선에 섰던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이 본관 2층 총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0년부터 옛재단 상대 긴 싸움, 박근혜 정부 시절 김문기에 승리
총학생회가 선도 투쟁 물꼬 트고 교수·교직원, 농성 동참 등 가세

교수협 대표는 학생 단식 합류, 학생은 파면 교수에게 야외수업
교수 “투쟁 돌파구 학생 덕분” 학생들 “교수들 함께해 큰 힘”
교수협 중심엔 정대화 교수, 파면 굴하지 않고 투쟁 계속
지난 8월 총장직무대행 선임, 상지대 바로 세우기에 앞장
“SKY대학 되는 게 아니라 성취 교육이 상지대 철학”
“제1호 공영사학이 첫 목표 구성원 참여도 등 자격 충분”

-오랜 싸움에서 결국 이겼는데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정대화(정)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대학이 되어 무엇보다 좋다. 그리고 최근 10년 동안 굉장히 어려운 조건에서 대학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구성원들이 힘을 합치니까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기는구나라는 교훈을 우리도 얻고 세상에도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

-상지대가 이긴 것은 상지대만의 승리는 아닌 것 같다.

정 “우리는 우리 문제로 싸웠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학 민주화를 공개 영역으로 끌어올린 의미가 있다. 상지대의 승리가 사학 민주화의 좋은 불빛이나 촉매가 될 것이다. 최근 3~4년 동안 상지대에서 무슨 일을 하면 다른 문제 대학에서도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식이었다. 상지대의 경우가 다른 대학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지대 활동이 준거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리산으로 걸려온 운명적인 전화

상지대의 뿌리는 1955년 원홍묵이 설립한 관서대의숙이다.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 1972년 임시이사로 파견된 김문기는 2년 뒤인 1974년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상지대를 인수했다. 이후 김문기의 상지대는 교비 횡령과 부정 입학 등을 수시로 저질러 대표적인 비리 사학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과정에서 용공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1986년 가을 학생들이 전임강사 채용 비리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자, 학교 기획실장(김문기 사위)이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등의 삐라를 만든 뒤 교정에 뿌려 학생 150여명이 고초를 겪게 만든 희대의 조작 사건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첫해인 1993년 당시 여당(민주자유당)의 3선 의원이자 학교 이사장이던 김문기가 사학 비리와 관련해 구속되면서 상지대는 ‘대학 정상화’의 첫발을 뗐다. 교육부에서 파견한 임시이사에 이어 2004년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상지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 사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2007년 대법원이 김문기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한 데 이어 이명박 정부 때 구성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사학재단의 주인 찾아주기를 명분으로 2010년 옛 비리 재단 쪽 인사의 이사회 복귀를 허용함으로써 상지대는 다시 김문기 손아귀로 넘어갔다. 2014년 3월 김문기의 둘째 아들 김길남이 이사장으로 선출됐으며, 다섯달 뒤인 그해 8월에는 김문기가 총장이 됐다. 학교에서 쫓겨난 지 21년 만의 재등장이었다. 하지만 김문기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의 복귀는 상지대 구성원들로 하여금 다시 싸움에 나서도록 한 자충수였다.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이 학생식당에서 <한겨레> 취재진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이 학생식당에서 <한겨레> 취재진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문기가 돌아오니까 자연스럽게 투쟁의 불꽃이 튄 건가?

정 “그렇지는 않다. 김문기 아들이 이사장이 되고 김문기 본인이 총장이 되는 5개월 동안 학교가 오히려 조용했다. 김문기가 학교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약간 위축됐다고 할까 그런 상태였다. 당시에는 교수협의회도 잘 안 움직였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깬 것은 학생들이었다. 당시 방학 중이어서 나는 지리산에 가 있었다. 산 위에서 총학생회장(윤명식)의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했어?’라고 물었더니 ‘올라가려고요’라고 하더라. 내가 ‘이미 올라와 있는데’라고 했더니 그가 ‘아니, 말고요. 2층이요’라고 말했다. 2층은 총장실을 뜻한다. 그제서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하고 산을 내려와서 학교로 돌아왔다. 그때 학생들이 돌파구를 안 열었다면 싸움은 굉장히 늦어졌을 것이다.”

1991년 총학생회장을 맡아 학원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 졸업(1996년) 뒤 학교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진광장(총무부장)은 “2007년 대법원 판결과 2010년 사분위의 상지대 정이사 추천을 거치면서 김문기 세력이 학교의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엿보이자, 교직원 가운데도 저쪽으로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문기가 온 뒤에 교직원 식당에 가면 직원들이 나와 눈을 안 마주칠 정도로 분위기가 썰렁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학생들이 총장실 앞 복도에서 농성을 시작한 것은 김문기가 총장이 된 지 사흘 만인 8월17일(일요일)부터였다.

-학생들이 투쟁에 먼저 나선 것은 의외다. 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매년 주체들이 바뀌기에 전통이나 역사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 “상지대만의 독특함이 있는 것 같다. 학원 민주화 투쟁 경험이 선배들을 통해 학생회 간부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되고, 또 학생들도 김문기 덕분에 스스로 학습하는 부분이 있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1986년의 용공 조작 사건인 것 같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 얘기를 들으면 김문기와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자연스레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

이날 인터뷰가 끝날 무렵, 2014년 총학생회 부회장이었던 박준성이 마실 가듯 아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총장실에 나타났다. 그에게 학생들이 먼저 투쟁에 나선 까닭을 물었다. “싸움이야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이 먼저 하는 게 당연하지만, 솔직히 당시 저는 김문기도 생각이 바뀔지 모르니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대응하자는 쪽이었다. 그런데 윤명식 회장이 완강했다. 막상 싸워보니까 오히려 김문기가 과거보다 더 심해진 것을 알겠더라. 시험기간에 전기세 나온다고 전기 끊고 학생들을 학교에 못 있게 했다.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교육부 감사 끌어낸 교수·학생의 단식

학생들이 물꼬를 텄지만, 상지대의 반 김문기 투쟁에는 교수들과 교직원 등 학교의 나머지 두 주체들이 철저하게 함께했다. 학생들의 농성 돌입 열흘 뒤 교수협의회가 동조 농성을 시작했으며, 한달 뒤에는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가 공동으로 야외 천막농성장을 만들어 장기전에 들어갔다. 교직원 노조도 천막을 쳤다. 이어, 그해 11월에는 교육부의 상지대에 대한 감사를 촉구하면서 정대화와 총학생회 간부 7명이 함께 단식투쟁을 벌였다. 결국 교육부가 11월 말부터 종합감사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인 2015년 3월 김문기의 해임을 요구하는 감사 결과가 발표됐다. 1차적인 승리였다.

김문기는 해임(2015년 7월)된 이후에도 여전히 학교를 사실상 장악한 채 자신을 반대하는 교수와 학생, 교직원들을 징계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문제가 해결된 듯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곪아들어갔기에 더 힘든 시기였다. 이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교수와 학생들의 연대였다. 지난해 여름 총학생회장(정성훈)과 부학생회장(배준)이 교육부의 재감사를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가자, 교수협 대표인 김명연이 단식에 나서면서 학생들의 단식을 중단시켰다. 대신 학생들은 교육부와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까지 200㎞가 넘는 길을 도보 행진했다. 결국 지난해 8월 교육부의 특별종합감사가 다시 실시됐고, 그 결과 김문기를 떠받치던 이사회의 이사 전원에 대한 임원취임 승인 취소 조처가 나왔다. 2010년 사분위 사태 때부터 따지면 7년 만에 상지대 구성원들이 이뤄낸 완벽한 승리였다.

본관 2층 총장실 한편엔 총장 선임이 취소된 김문기 전 총장의 개인 사물이 아직도 쌓여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본관 2층 총장실 한편엔 총장 선임이 취소된 김문기 전 총장의 개인 사물이 아직도 쌓여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상지대는 구성원들의 연대가 강하게 오랫동안 유지됐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진광장 “그렇다. 어느 한 주체로만으로는 안 됐을 것이다. 교직원과 교수, 학생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싸웠기에 우리는 이겼다. 수원대를 보면 이인수(총장)가 그렇게 엉망으로 하는 데 대해 교수 몇 명이 열심히 싸웠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고 있지 않나.”

정 “왜 우리 학교에서는 구성원들이 잘 뭉칠까를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요령부득이다. 직원사회를 잘 건사한다고 할까 학생들이 잘못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진광장 부장 같은 이가 선배로서 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이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누가 한사람이나 한쪽에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상지대는 약간 특이한 면이 있다. 또, 총학생회장의 개인 성향 등에 따라 학생들이 변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잡아준 것은 교수협의회라고 할 수 있다. 교수협은 지난 10년간 일관되게 방향을 유지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 덕분이었다. 학생들이 치고 나가면 교수들이 같이 가는 등의 상호관계 속에서 대오가 유지된 것 같다.”(상지대 교수협의회는 전체 교수의 70%가 참여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박주환(박) “2011년과 12년에 사분위 사태와 관련해 덕성여대, 세종대 등과 연대 투쟁을 할 때였다. 다른 대학은 교수가 기껏해야 한두명 등 소수만 참가했다. 그래서 다른 대학은 플래카드 하나 거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는데 우리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학생들이 투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교수들이 판을 깔아준 게 있다. 2011년으로 기억하는데, 한번은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교수님들이 늦게 왔는데 경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여기는 안 된다고 해서 약간 위축됐다. 그때 정대화 교수가 나타나서 ‘당신들 뭐야’라면서 고함치자 경찰들이 쫄더라. 그런 식으로 늘 교수들이 함께 있어서 굉장히 많은 힘이 됐다.”(박주환은 2012년 총학생회장을 지낸 뒤 상지대 투쟁과 관련한 영상기록을 빠짐없이 해왔다.)

두번째 안식년도 포기

정대화는 공고한 연대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상지대 투쟁의 중심에는 늘 정대화가 있었다. 2010년 사분위 사태 때 그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여름 내내 서울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 후문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는 등 반 김문기 투쟁을 이끌었다. 2011년 미국에서 보내려고 했던 안식년도 포기하고, 교수협의회 대표 자리를 기꺼이 맡았다. 안식년 포기는 2004년에 이어, 교수협 대표는 2005년에 이어 모두 두번째였다. 세 주체의 연대 투쟁을 이끄는 상지대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런 정대화는 김문기에게 눈엣가시였다. 김문기는 총장이 되던 날 정대화를 징계위에 회부해, 교수직에서 파면(2014년 12월)했다. 재단 쪽은 2011년에만 11차례(지금까지 총 41차례)나 정대화를 고소 또는 고발했다.

-파면된 뒤 교수 연구실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다가 2015년 2월의 주말 새벽에 학교 쪽 인사들로부터 습격을 당했던데.

정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교수들과 학생들도 모두 귀가하고 나 혼자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학교 쪽에서 보낸 사람 4명이 문을 강제로 부수고 쳐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30분간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 물을 떠 줬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는데 물을 마시자 그제서야 말이 제대로 나오더라.”

박 “그날 새벽에 연락받고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정 교수님이 몸을 떠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그 상황을 상상만 해도 무섭지 않나.”

-강제로 납치하려고 했던 걸까?

정 “전례가 있다. 1985년에 교원 부당 인사에 항의하면서 이사장실에서 농성하던 교수 3명을 재단 쪽에서 고압 소방호스로 진압한 뒤 이들을 수안보와 장호원, 이천에 분리 감금했다. 그러고는 징계위를 열어 해임했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이겼지만 학교에는 끝내 못 돌아왔다. 내 연구실이 전선 사령부처럼 되니까 자기 눈앞에서 나를 치워버리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은 순번을 정해 정대화 연구실을 지켰다.

박 “두달 동안 정 교수님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면서 당번을 섰다. 개인 일정들을 다 빼야 하니까 굉장히 힘든 일인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굳이 험하게 싸우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분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앞장서는 데 대해 다들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때 어떤 교수님이 이렇게 얘기하더라. 신념과 상관없이 저 사람(정대화)을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는 거기에 있다고 말이다. 싸움이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념과 정의 때문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런 연대의식이 더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김근주(2009년 총학생회장)는 졸업한 뒤 계약직으로 학교 일을 하거나 교수협의회 일을 도와주면서 학생과 교수 간의 가교 역을 해왔다. 김근주도 인터뷰 중간부터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2011년 교수협 대표로 정대화를 뽑은 데 대해 “정 교수님이 그동안 투쟁에 가장 앞장서는 등 구심점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여론이 형성됐다. 자기희생적인 그런 모습에 학생들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정치학자인 정대화는 상지대가 ‘민주 사학’으로 한참 자리잡을 때인 1996년 3월 교수로 부임했다. 1984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바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 상지대에 온 직후 초대 법인 사무국장(5년)과 기획처장을 잇따라 맡는 등 처음부터 학교 일에 열심이었다. 보직을 마친 뒤에는 총선 낙선운동(2000년) 등 학교 바깥에서 자신의 전공인 정치개혁 시민운동을 주로 벌였다. 그를 다시 학교로 불러들인 것은 2010년 사분위 사태였다.

2010년 8월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후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지대 구성원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0년 8월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후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지대 구성원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비리 사학재단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덕성여대·상지대 등의 대학생들이 2012년 7월12일 오후 비리 사학의 퇴출을 촉구하며 서울 보신각에서 출발해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비리 사학재단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덕성여대·상지대 등의 대학생들이 2012년 7월12일 오후 비리 사학의 퇴출을 촉구하며 서울 보신각에서 출발해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문기와 잘 해보시죠” 은밀한 회유

-교수들이 서로 양해하는 안식년이 예정돼 있었기에 학교 일에서 적당히 발을 뺄 수도 있었을 텐데.

정 “상지대에 오기 전부터, 또 오고 나서도 쭉 관심있게 했던 게 시민운동이다. 시민단체들과 반부패 정치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김문기 쪽이 다시 돌아온다는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학교 밖에서는 텔레비전에 나와 좋은 얘기를 떠들면서 학교 일에는 침묵하면 거짓말쟁이밖에 더 되나. 미국에 집까지 계약해놓았던 안식년이고 뭐고 다 포기해야 해서 집 식구들한테는 정말 미안했다. 아내한테 양해를 구했더니 ‘당신이 교수협 대표로 뽑아달라고 광고했지 않느냐. 기자회견할 때 마이크 잡고, 가운데 서고 할 때부터 다 알아봤다’고 하더라. 사실 그랬다. 안식년 나가려고 생각했다면 2010년 여름 사분위 투쟁 끝난 뒤에 학생들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됐는데 그해 11월말까지 뛰어다니다가 12월에 연구년 간다니까 사람들한테 동의가 안 되는 거였다.”

-고비마다 사학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셈인데 언제부터 투사가 됐나?

정 “사적으로 얘기하자면 대학 때 안 한 것을 벌충한 부분이 있다. 75학번인데 군대를 먼저 갔다 왔더니 일반 학생운동권에서 안 받아주더라. 반독재 시위 때 개인 차원에서 열심히 돌은 던지고 했는데 체계적으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교수가 된 뒤에 순전히 김문기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렇게 됐다. 하하.”

-김문기 쪽에서 회유는 없었나?

정 “김문기가 2014년 총장 된 직후에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만나자는 얘기가 몇번 있었다. ‘총장님(김문기)과 학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고, 정 교수가 그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천막 치고 농성만 합니까’라고 하더라. 거기에 대해 내가 저들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나갔더니 그다음부터는 그런 일도 없었다.”

-오랫동안 싸우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후회한 적은 없나?

정 “그런 적은 전혀 없고, 내가 학생들과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나는 교수로 있으면서 왜 학교가 교수를 괴롭히나 또는 직원을 괴롭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적었다. 대신 어떻게 학생을 간첩으로 몰아가나, 학생들이 니네 장난감이냐는 분노는 많았다. 교수가 지식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수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할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교수의 할 바를 나름대로 다 한 것 같다. 잘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설령 잘 안 돼서 내가 파면돼 돌아오지 못했더라도 교수의 할 바를 했다고 대답할 것 같다.”

정대화가 총장직무대행이 된 후 상지대는 2013년부터 지정됐던 재정지원 제한 대학에서 풀렸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등 ‘정상화’의 길을 다시 걷고 있다. 그러나 과제들도 만만치 않다. 김문기가 재단을 장악한 뒤 급격히 나빠진 신입생 충원율(2016년 93%)이나 재학생 중도 탈락률(2016년 8.2%)을 개선해야 한다. 또, ‘민주 사학’ 당시 한때 강원도에서 입시 경쟁률 2위를 기록했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정대화는 지난달 자신의 페이스북에 “상지대는 SKY 대학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상지대가 지향하는 교육은 1등을 뽑아 1등으로 졸업시키는 것이 아니라 뒷등을 뽑아 앞등으로 졸업시키는 성취 교육이다. 공부를 잘해야 하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뛰어나고 협력하는 책임감 있는 일꾼을 기르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김문기 이전 상지대가 공영 사학 모습”

-앞으로 과제는?

정 “오늘 오전에 인근 고교에 가서도 얘기했는데, 내가 할 일은 교육은 교육답게 대학은 대학답게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건 구성원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첫 성공 여부는 내년에 교육부가 선정할 공영사학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제1호 공영사학이 됨으로써 상지대가 민주화됐고 발전됐다는 것, 또 승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게 목표다.”

-공영사학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건가?

정 “교육부가 검토 중인데, 상지대의 지금 모습, 그러니까 2010년 김문기가 들어오기 전의 모습이 공영사학과 유사했다. 이사회가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움직이고, 구성원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사회가 협력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따라서 상지대는 제1호 공영사학이 될 수 있는 자격과 역량을 갖췄다고 자신한다.”

2014년 11월 상지대는 김문기에게 반대하는 정대화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2014년 11월11일 ‘한국 정치론’을 수강하던 학생 80여명이 정 교수의 야외 단식농성장으로 책상을 옮겨 수업을 듣고 있다. 상지대 제공
2014년 11월 상지대는 김문기에게 반대하는 정대화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2014년 11월11일 ‘한국 정치론’을 수강하던 학생 80여명이 정 교수의 야외 단식농성장으로 책상을 옮겨 수업을 듣고 있다. 상지대 제공

2015년 3월24일 상지대 강의동 출입구에 ‘수업 거부’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5년 3월24일 상지대 강의동 출입구에 ‘수업 거부’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원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대화가 외부 일정 때문에 오후 2시에 자리를 먼저 뜨기 직전 현 총학생회장(원진섭)과 부학생회장(김용준)이 뒤늦게 인터뷰에 참여했다. “우리가 이겼다는 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다. 장기간 싸우면서도 분열없이 사학 비리의 큰 세력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후배 간 끈끈한 정, 교수와 학생 간의 단합력 때문이다. 이런 힘으로 간다면 10년 전의 중부권 명문사학 그 이상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원진섭) “여러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는 뜻깊은 해를 맞고 있다. 올해 안, 늦어도 내후년까지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본다.”(김용준) 학생들의 생각이나 바람도 총장이나 선배들과 같았다. 학교를 나올 때 다시 한번 정문 위의 플래카드에 눈이 갔다. ‘여기는 대학민주화의 성지 상지대학교입니다’라는 문구가 ‘상지대 총학생회’라는 작은 글씨와 함께 힘차게 펄럭였다.

원주/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상지대 총장직에서 해임된 김문기(맨 뒷자리 왼쪽)가 지난 9월18일 총장실을 찾아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왼쪽 줄 앞에서 둘째) 등이 회의를 주재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상지대 제공
상지대 총장직에서 해임된 김문기(맨 뒷자리 왼쪽)가 지난 9월18일 총장실을 찾아 정대화 총장직무대행(왼쪽 줄 앞에서 둘째) 등이 회의를 주재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상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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