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12&section=sc7 
동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xqOavKPHnvY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1/4부) - 역사복원신문  http://tadream.tistory.com/2148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2/4부) - 역사복원신문  http://tadream.tistory.com/2149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3/4부) - 역사복원신문  http://tadream.tistory.com/2150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4/4부) - 역사복원신문  http://tadream.tistory.com/2151   

아시아를 정복한 고구리 철갑기병 (4/4부)
막강한 전투력으로 주변국들을 통합하는 고구리
역사복원신문ㅣ 기사입력 2011/11/07 [12:37]


기습공격은 기병의 기본전술이다. 기병들의 기습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 이제는 보병들 차례다. 하지만 여기서도 적 진영을 돌파하는 것은 철갑기병의 몫이다. 

인터뷰 여호규박사
“말이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적의 정돈된 진영을 교란시키고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약수리 고분벽화를 보면 철갑기병이 큰 편대를 이루고 있는데 적진으로 들어가는 돌파력은 엄청났다...... 잘 알려진 사례로는 관창이 백제의 오천 결사대를 돌파했다고 하는데 기마병을 타고 돌파했다고 나온다. 중장기병은 돌파력이 매우 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 치열한 육박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때는 기병들 보다 근접전에 유리한 창수와 검수, 부월수들이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퇴각하는 적을 쫓는 역할은 기병들의 몫이다. 고대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완전 쐐기를 박는 셈이다. 그러나 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이와 양상이 달라진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그들의 점령지에 수많은 성을 쌓았다. 당시 중국의 성이 대부분 한 줄로 늘어선 일자형인데 반해 고구려의 성들은 촘촘히 여러 겹으로 세워져있다. 특히 교전이 끊이지 않았던 요동지방의 경우 육지방어선과 비사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방어선을 같이 구축해놓았다. 그리고 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인터뷰 윤명철교수
“몇 개의 중심성 내지는 큰 성이 있습니다. 신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해양방어용인 비사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6내지 7개의 큰 성을 중심으로 해서 실질적인 관련체제를 맺고 있죠. 한성이 침략당하거나 또는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그 주변성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공격을 하면서 방어를 구축하게 됩니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50만의 대병력이 거점성인 안시성에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된 공격에도 성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당나라 군은 식량부족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 만다. 

인터뷰 김용만 박사
“당태종 군은 요동성에서 60만석의 식량을 빼앗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한 이유는 식량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기병대에 의해서 적의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에 당군이 어쩔 수 없이 패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당군은 요하 중류지역을 통해서 고구려를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후퇴할 때는 요하하구의 갯벌지대를 통과하므로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은 고구려 군대가 요하중상류지역에서 당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북쪽을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기...... 고구려 군은 성에서 보병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병들을 이용해서 보급로를 끊는 작전을 사용합니다.”  

공격받는 성에서는 보병들이 지켜내고, 다른 성의 기병들이 적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고구려 군의 전술은 이렇게 진행됐다.  

고구려가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50만 친위부대를 불과 수만의 병력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곧 보기합동전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기합동전술을 구사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은 보병과 기병의 투입시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철갑기병이 나서야 할 때라든가 궁수들이 활을 쏘아야 할 상황을 제 때 판단하지 않으면 이 합동전술은 쓸모없는 전술이 되고 맙니다. 그러자니 자연 교육받고 훈련된 장수가 필요합니다. 또한 전술을 소화해낼 훈련된 병사도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끝까지 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안시성에서 두 달이 넘도록 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끈질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이 용맹함, 투쟁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전쟁에 나가 굽히지 않고 각자가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 그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고구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늘 무예를 연습했다는 증거는 벽화 속에 남아있다.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에 씨름이 등장하고, 무용총에는 오늘날 택견과 태권도로 발전한 수박희의 모습이 보인다. 안악3호분의 수박희 역시 두 사람이 대련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주변에 도끼를 든 시종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여러 사람 앞에서 겨루기를 했던 모양이다. 무예를 익히고 겨루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 사람들의 그런 모습은 중국 기록에도 언급돼있다. 중국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연습한다는 대목이나 걷는 것이 달리는 것과 같다고 적어놓은 것으로 봐서 고구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무예를 연습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라 전체가 무예훈련을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육기관 경당에서 신분에 구별 없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글만이 아니라 활쏘기까지 가르쳤다.  

인터뷰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성립시기 자체부터 멸망할 때까지 중국과의 싸움 계속. 초기엔 중국 식민지 세력 몰아내는 데 주력했고,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됐다. 

고구려가 이 상무정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는 주몽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조 주몽은 바로 말 잘 타고 활 잘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시조로 삼을 정도로 상무정신은 고구려 정신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전호태 교수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시점엔 한쪽으론 주몽신앙을 전파. 주몽신화의 경우 주몽사당을 요지에 다 세워. 요동성 등지... 주몽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앙이 실제로 고구려 역사이후에도 오늘날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이 그와 유사한 시조 전설을 차용할 정도로 그 지역에 끼친 영향이 컸다.”  

고구려 사람들의 상무정신은 덕흥리 고분 벽화 마사희에도 잘 나타나있다. 젊은이들이 장대에 표적을 꽂아놓고 말을 달려 쏘아 맞추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이들 옆에 점수를 매기는 사람까지 있다. 오락시간조차도 무예 연습으로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구당서엔 고구려가 3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고구려 인구가 대략 350만 명. 따라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남자는 20% 정도인 70만 명 선이었다. 그런데 30만 명을 동원했다면 성인남자의 반수가 전쟁에 나간 것이다. 

인터뷰 여호규 박사
고구려는 사회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보다 군사력 측면 강했다. 한 군현 세력 몰아내면서 국가적 성장 이룩. 발전과정에서도 북방족과의 대결과정에서 영토 확장하면서 성장. 전쟁은 고구려 발전과정 가장 중요한 요소. 군사력 측면 사회 전체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구려의 군사력이 크게 성장한 4,5세기. 고분벽화의 문지기 모습이 달라졌다. 관리나 시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강한 힘을 표현한 역사가 등장한다. 심지어 찰갑으로 중무장한 병사의 모습까지 나타났다. 고구려가 얼마나 힘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숱한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1500년 전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성장은 이렇듯 튼실한 상무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 행렬도속엔 고구려 사람들의 그 처절한 고민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말에 갑옷을 입히고 세계 최초로 기병들에게 못신까지 신겨야겠다고 고안해낸 사람들. 무기별로 편제된 보병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낸 것이 고구려입니다. 이 군사력이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의 대원정을 가능케 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그 나라가 강대국이냐 약소국이냐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이 군사력입니다. 따라서 온 나라의 기술과 자원을 총동원해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이런 노력은 결국 나라 전체로 보면 기술과 자원개발을 서두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막강한 군사력이 경제력을 키우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역시 그런 과정을 밟았습니다. 

고구려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통합하고 고구려적 전통와 세계관으로 융화시켜 나갑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일대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대제국 고구려는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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