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 위키

고구려/왕 2011. 10. 22. 11:25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B%AA%85%EC%84%B1%EC%99%95


동명성왕 

평양 동명왕릉에 있는 동명성왕 동상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은 고(高)씨이며, 원래 성은 해(解)이다. 는 주몽(朱蒙)으로, 추모(鄒牟), 주모(朱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라고 한다. 시호는 동명왕(東明王)의 성스런 덕(聖)을 이은 왕(王)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상해의 상(象)은 중(衆)자의 오기로부터 유래일 수도 있다. 이유립은 해모수의 연대와 주몽의 연대를 볼 때 주몽이 해모수의 직계 아들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해모수의 후손으로 불리지가 존재한 것으로 보면 연대가 맞다고 주장한다.[1]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및 《동명왕편》은 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면서 부여 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짜맞춘 것이다. 역사계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주몽이 해모수와 동명왕의 혈통이거나 또는 계승자인 것은 분명하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어여쁜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동명왕 해모수(解慕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 연못안에 세 처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세 처녀를 모처로 유인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욕을 채우려 하였다. 훤화, 위화는 힘을 다해 탈출하였으나 유화는 그만 해모수에게 붙잡히게 된다. 

하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너는 대관절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듯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하니 해모수가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높은 문족과 혼인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말하자, 하백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며 해모수를 시험해 본 뒤, 곧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며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하백은 가죽주머니에 술에 크게 취한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내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주머니를 뚫고 울면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유화를 버리고 홀로 떠나버렸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함부러 남자를 만난것을 나무라며 시녀 몇명을 붙여준 뒤 귀양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柳花)를 만나고, 유화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더니 마침내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유화가 아이가 아니라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유화에게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다. 그 뒤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소와 말은 알을 피해 갔고,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자라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동명왕(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해부루 고주몽은 배다른 형제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주몽은 연대상으로 해부루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동명왕의 아들이라기보다 동명왕의 혈통으로서 권력에서 소외되어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주몽을 데리고(또는 임신한 상태로) 금와왕의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일곱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의 구려국(句麗國) (혹은 졸본부여)에 이르게 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유력자였던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 주몽은 졸본(卒本)에 구려국의 뒤를 이어 높을 고(高)를 붙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자신의 성(姓)을 ‘고’(高)라 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2]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의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국’이라고도 한다)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동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이에 주몽은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하지만 금와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이었던 대소왕자가 왕위에 오르면서(기원전 19년 전후)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는 이전과 달리 급속도로 악화된다.    
 
    
기원전 19년 여름 음력 4월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어머니 예씨 부인과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삼았으며,[3] 그 후 5개월 뒤에 40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4] 

동명왕의 무덤 

동명왕릉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훗날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할 때 함께 평양으로 옮겨왔다고 추정된다.     

주몽을 둘러싼 논쟁  

탄생년도  
 
삼국사기》는 주몽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58년으로, 《삼국유사》는 기원전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37년인 것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졸본부여와 고구려   
 
 
《삼국사기》는 주몽의 건국 이야기와 더불어 주몽이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한 후,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구려본기〉)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주몽이 결혼한 사람이 바로 소서노임을 밝히고 있다.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며, 주몽과 같은 부여종실 출신인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내였다. 그러나 우태가 죽은 후, 29세의 나이로 다시 주몽과 혼인하였다.(온조 중심의 백제건국신화로 비추어 소서노가 주몽의 친척뻘인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를 낳았고 우태가 죽자 주몽과 재혼하여 온조를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일부 중국 사학자들과 북조선의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보장왕 대의 기사(27년 음력 2월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를 내세워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00년경으로 추정한다.[5] 

위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친 후, 졸본부여의 귀족인 연타취발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졸본부여의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00년경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어떠한 사료도 없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보장왕 대의 기사는, 주몽 이전의 졸본부여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판단된다.

졸본은 홀본, 흘본, 흘승골, 골본으로도 불리며 흘승골의 승(升)은 본(本)의 오기로부터 기인한다. 그 이름은 발해의 솔빈부를 거쳐 지금의 하얼빈에까지 남아있다. 몽골의 동쪽 지역에서는 코릴라이족 출신의 메르겐이 동몽골 지역을 거쳐 자기의 일족 '솔론'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로써 고려나 한국을 부르는 솔롱고스의 어원이 되었다. 발음이 변천되었겠지만 몽골어로 메르겐(Mergen)은 명궁의 뜻이고, 주우(Zöv)는 '바른'의 뜻으로서 '주우 메르겐'은 주몽이 곧 '선사자(善射者, 활 잘쏘는 이)'란 말이라고 한 것과 같다. 중국 동북부의 넌장(눈강)현을 '메르겐'이라고도 부르니, 인명이나 지명으로 유추할 때 만주 일대가 고구려의 건국지인 것은 확실하다. 엄리대수는 눈강, 흑룡강(아무르 강), 송화강 등 여러 가설이 있지만, 아무르 강과 연관지을 수 있다. 지명을 정치적 인위적으로 새로 붙이지 않는다면 과거로부터 부르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몽과 동명왕의 별개 인물설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 인물이라는 이야기는, 서기 60년 후한의 왕형이 쓴 『논형』에 나오는 다음 같은 기록에 근거하는 듯하다. 
 
 
"북쪽 이민족 탁리국(고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놓고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의 활 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위의 기록은 바로 동명왕의 탄생, 건국 설화인데, 동명왕을 부여의 건국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근거해 동명왕이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자라고 보는 견해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주몽과 동명왕이 겹쳐지면서 붙여진 후세의 명칭이라는 것이다. 

이 동명왕 신화를 보면 고주몽 신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동명왕 신화가 원본이고 고주몽 신화는 그 모조 신화라고 보는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천손의 후예라는 천손의식이 굉장히 강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건국자 주몽은 그 무엇보다 신령하고 대단한 존재로 신격화될 필요가 있었고 그런 고구려인들이 이용한 것이 바로 부여의 건국자이자 영웅 동명왕 신화였다는 것이다. 즉, 부여가 망하면서 고구려는 동명왕 신화를 자신들의 시조 고주몽의 신화로 둔갑시키고, 고주몽의 왕호도 동명성왕으로 바꾸었는데, 그 후 고구려의 국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원본인 동명왕 신화는 거의 잊혀지고 그 모조 신화인 고주몽 신화가 원본인 것처럼 인식되며 널리 퍼졌다는 것이 주몽과 동명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주장하는 측의 견해이다.
   

가계


주석

  1.  이유립이 계연수의 이름으로 저작한 환단고기에 의하면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 고진(高辰)이고, 그의 손자가 불리지(弗離支)이며, 불리지의 아들이 바로 주몽이라고 설정하였다.
  2.  기원전 37년~:《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二十一年...이하) 참조.
  3.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3.
  4.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3.
  5.  고구려는 언제 건국되었을까?, 《오마이뉴스
  6.  백제 온조왕의 어머니가 기원전 6년에 61세로 죽었다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이 있다
 
참고   


바깥고리

네이버캐스트 - 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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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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