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38&key=20061209.22016200222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1> 대조영 발해 건국지 동모산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1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2>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28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3> 160년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영욕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2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4>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3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4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2>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지린성 둔화시 영승촌이 첫 도읍지"
육정산 발해 고분군과 지척… 5개 건축터 확인
3대 문왕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도 돈화서 발굴
중국측 "목단강 오동성이 수도" 주장… 위치 논란
조해훈 문화전문기자 massjo@kookje.co.kr  입력: 2006.12.08 20:06 / 수정: 2006.12.09 오전 3:25:07 



▲구국 위치 논란과 육정산 정혜공주묘

중국 지린성 둔화시 오동성(敖東城)을 찾았을 땐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날씨가 차가웠다. 지린성 정부가 1981년 4월 10일에 지린성 중점 문화유물보로단위로 공포한 오동성의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오동성은 당조시기 발해국(기원 698년~926년) 초기의 도읍이다. 성자리는 장방형이며 곽성과 왕성으로 이루어졌고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낯선 사람이 와서 사진을 찍고 비석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는 목도리를 얼굴까지 친친 감은 인근 구멍가게 여주인이 나와서 "여기가 발해왕이 살았던 성터예요"라고 말을 걸어온다.

발해의 첫 도읍지인 구국(舊國)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구당서' 등에 대조영이 동모산과 그 아래에 도읍지를 정하고 구국이라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더 구체적인 언급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조영, 즉 발해 고왕이 건국 초기에 동모산과 그 인근에서 10년간 통치하다가 나라가 안정되고 물산도 크게 늘어나자 동모산 인근인 목단강 충적평야에 도성을 수축한 것이 오동성이라는 주장과 오동성에서 남쪽으로 약 10㎞떨어진 곳에 있는 영승(永勝) 유적이 구국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 

오동성은 내외 두 성을 가진 회(回)자 모양의 성으로 돌절구, 질그릇, 무기류, 쇠가마, 수레바퀴와 벽돌, 기와 등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1985년 둔화시 조선족 중학교 전복록 교사가 쓴 오동성 답사기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으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동네 곳곳에 성벽을 뜯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만 흩어져 있다. 중국 측은 발해국은 홀한성으로도 불리는 오동성을 57년간 수도로 삼았으며, 홀한주를 구국이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당나라 시기 목단강을 홀한하라고 불렀는데, 홀한하 연안에 건립됐다고 해서 홀한성이라고 명명하고, 홀한성을 중심으로 한 목단강 유역을 홀한주라고 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한 후 평지에 성을 쌓고 첫 도읍지로 정했다는 곳 중의 하나인 중국 지린성 둔화시 오동성. 성터는 흔적이 없고 지린성 정부가 세운 표지석만 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다. 조해훈 기자
 
방학봉, 장월영 등 조선족 학자들은 영승을 구국이라고 주장한다. 영승은 둔화시의 발해 유적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이 유적의 북쪽에 육정산 발해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승 유적이 있는 영승촌은 600명가량 거주하는 농촌마을로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여기서 5개의 건축터가 확인됐으며, 회색기와와 와당, 도기편, 당나라의 개원통보와 송나라의 숭녕통보가 발견됐다. 한규철 경성대 교수와 송기호 서울대 교수도 이 영승촌이 구국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조심스레 밝혔다. 이 유적에서 약 4㎞ 지점에 유명한 육정산 고분군이 있다. 육정산 고분군은 오동성과 영승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발해 왕족들의 무덤군인 육정산 고분군에는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뿐만 아니라 대조영과 2대 무왕, 3대 문왕의 무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워낙 도굴이 심해 주요 고분은 봉분의 일부만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가 육정산 고분군을 찾았을 때는 중국 당국이 고분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빙 둘러친 것은 물론 초소에 경비하는 사람을 세워 두었고, 흙을 가져가기만 해도 엄벌에 처한다는 표지판까지 서 있었다. 

중국 연변대학 최문호, 오봉협 교수 등이 1949년 9월 정혜공주묘를 발굴함으로써 그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발해 초기 도읍지의 위치를 가늠하게 됐다. 정혜공주묘도 도굴이 극심했는데, 무덤 안에서 비석 한개와 돌사자 두개, 옥구슬, 도금한 구리못 등을 수습했다. 출토된 이 비석이 중요했다. 비문에 700여 자에 달하는 해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을 통해 육정산이 발해 왕실의 묘지라는 것을 알게 됐고, 둔화가 발해의 구국이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비문을 근거로 왕의 무덤인 진능은 정혜공주 무덤에서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도굴로 인해 확인시켜줄 만한 유물 등이 없어 아직 대조영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도가 상경용천부에 있을 때도 왕족이 죽으면 이 곳 구국까지 모셔왔다고 한다.

▲구국에서 중경으로 천도

대조영의 손자인 3대 문왕 대흠무는 둔화에 있었던 구국에서 742년 중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린성 화룡시 서고성자촌이 중경이며, 도읍이 상경으로 옮겨간 후로는 중경현덕부가 소재했었다. 여기서 대흥말년(755년)까지 약 13년 동안 거주했다. 중경현덕부는 두도평원의 서북쪽, 지금의 화룡시 서성향 소재지에서 동쪽 두도진에서 화룡으로 가는 길의 남쪽에 있는 서고성이다.

연변대 방학봉 교수는 발해가 구국에서 중경으로 천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즉, 둔화보다 서고성 일대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따뜻할 뿐 아니라 고구려 시기 산성 등이 있어 고구려 고토에 대한 통치가 손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대조영과 2대 왕 무왕까지 40년간 발해는 무력으로 주변의 여러 종족을 통일했는데, 차츰 문치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당나라와 신라, 일본, 거란 등과 교류하기에 수월한 곳을 찾다가 중경을 적지로 꼽았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옛 중경현덕부는 농사를 짓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다행히 길로 이용되고 있는 외성이 남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지린성 당국이 서고성을 복원, 백두산과 연계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민들을 중경현덕부 도로 건너 맞은 편으로 이주시키는 중이라고 말했다. 발해 중경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으나 1980년 서고성에서 가까운 지점인 용두산 고분군에서 문왕의 넷째딸이자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 무덤이 발견됨에 따라 중경이 서고성으로 굳혀졌다.

불교를 크게 부흥시킨 문왕은 자신의 넷째딸의 무덤 위에 탑을 쌓아 불교적인 장례를 치렀다. 육정산에 묻힌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 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했다. 정효공주 묘에서 발해에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발견됐다. 정혜공주 묘비와 함께 정효공주의 묘비도 발해사 연구에 더없이 좋은 1차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발해 사람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정효공주묘를 둘러보고 과수원 길을 돌아 아래 벽돌공장으로 내려왔다.문득 이들 두 공주가 부왕이 살아 있을 때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문왕이 너무나 슬퍼 '정사를 보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애통해 했다는 어느 기록이 떠올라 가슴을 적셨다. 


# 수문장 등 12인상 문왕 넷째딸 정효공주 묘

- 발해의 현존 유일한 벽화


정효공주의 무덤은 중국 지린성 화룡시 용수향 용해촌 산록에 있다. 지린성 정부가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정효공주 묘비 탁본.

정효공주는 792년 6월 9일 사망해 그해 11월 28일 기묘시에 매장됐다. 정효공주 무덤은 15개의 계단을 따라 내려간 4m 깊이에 있다. 공주의 묘비에 "강물 흐르는 곳에 만든 무덤은 깊고 어두웠다"고 적혀 있다.

무덤의 천장을 길다란 돌로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렇게 천장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은 고구려식이라고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밝혔다. 

무덤칸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았으며, 문 출입구와 동·서·북 3벽의 회칠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수문장(무사), 시종 무관(시위), 내시, 악사 등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수문장, 시종 무관 등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장검 철퇴 활 등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악사와 내시는 복두(머리수건)를 하고 박판, 공후, 비차 등 악기를 가진 채 서 있다. 회벽 위에 철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나서 물감으로 형상화 한 다음 맨 나중에 먹선을 가지고 완성했다고 한다. 무덤은 무덤길, 무덤문, 안길, 무덤칸과 탑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정효공주묘를 발굴했던 정영진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소장은 기자와 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정효공주묘를 발굴하러 들어가보니 도굴꾼들이 버린 100년 전 물건이 있어 놀랐다"며 "그나마 무덤 안에 발해의 유일한 벽화가 남아 있어 발해의 문화와 풍속을 연구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하다"고 설명했다.

정효공주 묘비는 '무덤문(높이 1.2, 두께 0.9m)을 갑자기 봉하자니 (상객들은)처량한 기분이 차 넘쳤다'고 적고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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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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