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38&key=20061228.2202019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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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4>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3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4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쪽구들'에 앉아 '수이자(殊異字)'로 편지 써
남쪽의 신라와 같은 말 쓰고 독자 문자 사용
기와집·초가집에 온돌… 빈부 관계없이 이용
블라디보스토크= 조해훈 문화전문기자 massjo@kookje.co.kr  
입력: 2006.12.27 19:57 / 수정: 2006.12.27 오후 8:26:44
 


지난 해 8월 한국과 러시아 공동 조사단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 조사한 발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 이곳은 발해 시기 수도 중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 제공


▲발해인의 문화

지난 11월19일 기자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중요한 유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박물관 2층에 다행히 찾으려는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발해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 청동상(靑銅像)이었다.

발해는 자체 문헌기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관리의 모습뿐 아니라 의복에 대해 고증할 자료가 적어 이 유물이 중요한 것이다. 문헌상으로는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관리들의 등급별(9품 18계) 복식 규정이 기록돼 있는 정도이다. 이 청동상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인근 마을에서 발견된 것으로 관복을 입고 서류 두루마리 같은 둥근 막대를 든 채 근엄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현지 학자들은 크라스키노성에서 일본과 신라로 사신이 왕래했으므로, 당시 파견된 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돼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청동기마인물상'도 말에 탄 관리의 모습으로 추정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의 청동상과 비교할만 하다.

이 청동상에 묘사된 발해의 관리, 즉 사신들은 일본에 사절로 가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814년 발해 대사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왕효렴은 5편의 한시를 남겼으며, 양태사, 석인정, 석정소, 배정, 배료 등이 지은 시도 일본에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시인들은 배정을 '칠보지재(七步之才)', 즉 7보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재사라고 감찬해 마지 않았다. 배정의 아들 배구도 일본 문단에서 '독보지재(獨步之才)'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의 문학 수준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려줄 뿐더러 문학이 양국 문화교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는 이 청동상 외에 연화문이 양각된 수키와와 암기와가 전시돼 있다. 이는 발해 시기 불교가 중흥했다는 증명으로 볼 수 있다. 발해 시기에 조성된 사찰의 터가 현재 40여 곳에서 발견됐다. 북송의 왕흠약 등이 1013년에 완성한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보면 '714년에 (대조영)이 왕자를 당나라 수도 장안에 파견하여 불법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발해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적극 권장한 것으로 해석된다.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3대 문왕 대흠무 시기였다. 불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발해 유물로는 석등탑, 대석불, 사리함, 돌사자머리, 비석, 귀부, 여러 가지 불상 등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유물이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흥륭사에 있는 석등탑 및 대석불과 역시 발해진 백묘촌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그외 발해는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는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太常寺)'를 둘만큼 음악과 춤 등이 발달했다. '발해국지장편'과 '금사(金史)' '거란국지' 등에 발해의 음악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발해인의 문자와 언어


위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전시 중인 발해 청동 관리상과 연화문 수키와, 발해 문자인 '수이자'.

최근 국내 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학자들도 발해의 문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발해는 공식적인 외교문서와 자료 등에는 한문을 사용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한자 사용의 보충적 수단으로 '수이자(殊異字)'를 만들어 일부 사용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수이자는 발해의 기와나 벽돌에서 주로 발견된다.

발해문자는 중국의 유명한 발해 연구자인 김육불 선생이 1930년 대에 처음 그 존재를 주장했다. 이후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잘못 새긴 글자라고 고집해 왔다. 발해 문자를 연구하고 있는 대진대 사학과 김재선 교수는 "'이태백전서·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서 당으로 보낸 서신이 있었는데 온 조정에서 이를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태백은 이를 해독하고 회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며 "이태백이 742년에서 744년까지 한림원공봉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의 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발해 말기 일본을 방문한 발해 사신 2명의 이름이 '주부리'(·목현의 수령)와 '마부리'(·석현의 수령)이었는데, 당시 한 관리만이 이 글자를 알고는 '이국(발해)에서 만든 글자라고 하자 발해 사신이 매우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재선 교수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발해 '문자기와'는 모두 370개이라며 이 발해문자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한자의 형태와 일치한 문자로 한자와 형태는 같으나, 한자의 뜻은 없고 음만 빌린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문자는 135개로 발해문자 전체의 36%를 차지한다. 둘째 한자와 유사한 문자로 전체의 41%에 달하며 총 154개이다. 셋째 두 문자 이상으로 이뤄진 문자로 전체의 17%이며 총 62개다. 넷째 총 12개의 문자로 전체의 3%에 해당하며, 다섯째는 부호문자로 전체의 3%인 11개이다. 정효공주 무덤에서도 문자벽돌 3장이 출토됐다. 

'속일본기' 권13에 발해가 남쪽의 신라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왕족이었던 고씨 귀족들이 대거 참여해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것처럼 피지배 주민들도 대다수가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고구려계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더더욱 지배층 일부에서라도 중국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는 설명했다.


▲발해인의 생활

발해의 왕족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기와를 덮은 궁전에서 살았고, 관료귀족들도 기와집에서 살았다. 발해의 중심지구와 남부, 서부의 일반 평민들은 규모가 작고 구조가 간단하기는 하나 역시 실내에 칸을 나눈 지상건물인 초가집에서 살았다. 변경지대와 낙후한 지역의 평민들은 지상건물, 혹은 반움집, 움집에서 생활했다고 중국의 발해 연구자 김태순은 '발해시기의 평민주택을 논함' 주제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발해 시기 발해인들을 구분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빈부에 관계 없이 온돌을 놓고 방을 데웠다는 사실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저서 '한국 고대의 온돌'에서 현재까지 한반도 북부와 연해주 및 만주 동부를 중심으로 확인된 쪽구들 관련 고대 주거지는 모두 92개 유적에 527개이며, 이는 크게 초기 철기시대, 고구려, 발해의 3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온돌의 초기 형태라고 해서 '쪽구들'로 명칭하고 있다. 그는 발해의 주거지는 현재까지 37개 유적에서 185기가 조사됐는데, 쪽구들이 있는 것이 93기, 없는 것이 70기이고, 불명이 22기로 유무가 확인된 163기에서 쪽구들 주거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57.1%라는 통계를 냈다. 송 교수는 "발해 쪽구들은 그 구조에서 ㄱ자형·2고래가 가장 많은 데에 비해 그 이전의 초기 철기시대와 고구려 때에는 ㄱ자형·외고래가 가장 많다"며 "따라서 발해 때에 평면 형태는 변함없이 ㄱ자형이 중심을 이루지만, 고래 숫자에서는 외고래에서 2고래로 진전됐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방학봉 연변대 교수도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발해국이 건립되기 전 말갈인 살림집터에서는 부뚜막, 굴뚝, 고래뚝, 조돌 등 시설이 갖추어진 전형적인 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발해는 남송 때의 홍호가 쓴 '송막기공' 권상발해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부일처제를 택했다. 발해는 또 농작물로 조 벼 보리 밀 기장 수수 피 콩 들깨 메밀 등을 재배했으며 주식물은 조였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 중경현덕부 관할 하의 한 개 주인 '노성'에서 나오는 벼와 중국 길림성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인 책성의 된장이 유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요사(遼史)'에는 '발해의 요리사가 쑥떡을 올렸다'고 기록해 발해인들이 쑥떡을 즐겨 먹었으며, 왕효렴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발해 사람들은 술을 빚어 잘 마셨던 것도 생활의 한 단면이다. 



# 경성대 한규철 교수 인터뷰

- "온돌은 우리 고유의 문화"



"온돌(구들)은 우리나라 특유의 생활문화입니다. 고구려의 온돌을 계승 발전시킨 발해의 온돌 습속을 볼 때도 발해는 중국보다는 우리나라 계열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발해의 온돌 습속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1990년 대 초반부터 이 부문에 대해 연구를 해온 한규철(사진) 경성대 교수는 "우리나라 발해 연구자들도 이제 이 부문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가 남긴 문헌이 하나도 없는 실정에서 발해의 문화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온돌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첫 발해 연구자이기도 한 한 교수는 발해의 문자에 대해서도 "요즘 발해 연구의 또 다른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발해문자, 즉 '수이자'를 일정 부분 사용한 것으로 본다"며 "이는 신라가 이두문자를 만들어 쓴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발해의 독립적인 문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또 "우리는 한자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지금은 한글을 통해 이런 부분을 많이 극복했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한 발 물러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객관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당도 인정했던 발해 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은 물론 당과 일본과의 교류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을 맺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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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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