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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7> 발해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육정산 고분군
정혜공주 묘비 독립국가 정체성 확인 대발견
1949년 고분 발견 50~60년대 발굴 80년대 국내 알려져 
장례·무덤 양식 등 고구려 계승…황상 칭호 자주성 증명
부산일보 | 20면 | 입력시간: 2007-02-24 [16:23:15]



3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둔화에 도착하였다. 시내에 있는 발해의 '강동 24개 돌유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었다. 아침은 연변대학 초대소에서 녹두죽과 찐빵으로 하였다. 다양한 곡식죽은 중국에 갈 적마다 맛있게 먹는 음식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점심은 입에 맞는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둔화는 조선족자치주이면서도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장국'(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물만두 등 비교적 우리의 식성에 맞는 요리로 점심을 떼울 수밖에 없었다. 

둔화에는 모두 다섯 차례 정도 가보았지만 육정산고분군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문 때는 육정산에 올라가서 정혜공주묘 발굴터와 다른 무덤군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유적지는 잡풀이 무성했으나 발굴 후 유적 뒤처리를 말끔히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유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다행이었다. 그 뒤에는 고분군 울타리 밖에서 안내간판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안내간판조차 아예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2003년 여름 모 통신회사에서 후원한 중고생들의 답사 인솔 때에는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고 입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정각사(正覺寺)만 볼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비공식적이나마 육정산고분군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방문이 늘고 모 방송국에서 이곳의 관리실태를 한국 입장에서 비판한 후,접근이 까다로워졌다. 최근 중국당국이 발해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위해 전반적인 발굴을 하면서부터 더욱 경계가 심해졌다. 지난해 여름에는 둔화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이 다른 샛길로 빙 돌아 고분군 경계와 안내간판이 있는 곳까지만 들렀다가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발해 귀족들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49년이었다. 중국 건국 후 학교운영비를 마련할 방도를 궁리하던,둔화의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이 옛 무덤이 많은 이곳에서 보물을 꺼내야겠다고 '도굴'을 하던 중 보물은 나오지 않고 글자가 새겨진 돌 등이 나왔는데,이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 발굴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내막이 겨우 알려졌을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발해유적 가운데 몇 군데의 도성급 유적들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동기야 어떻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나마 그때 발굴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육정산 '고분군의 구역'(墓區)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제1구역에선 왕실귀족들의 무덤이 30여 기,제2구역에선 중·하급관리와 일반인들의 무덤이 5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대부분 발굴되었다. 최초의 발굴은 연변박물관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1953~1957년 지린성문물관리위원회와 지린성박물관이,1959년 8월에는 지린성박물관에서 그리고 1964년에는 북한과 공동발굴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 발굴에 대한 소식이 한국과 일본 등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0년 이후였다. 1956년 진유푸(金毓)와 옌완장(閻萬章)의 정혜공주묘에 대한 글과 1965년 북한의 '력사과학'에서 소개한 자료가 1980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번역·소개되었다. 중국도 80년대부터 발해사 연구가 크게 일어나면서 정혜공주묘비 등에 대하여 왕청리(王承禮) 등이 다시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하였는데 50~60년대 발굴의 중요성이 컸음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제1구역에는 묘비가 나와 확인된 정혜공주묘가 있다. 그로부터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제2대 무왕 대무예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 '진릉(珍陵)'도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돌사자와 벽화조각,꽃무늬벽돌과 질그릇 손잡이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정혜공주 묘비의 발굴은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발해사에 있어서 대발견이었다. 이는 1980년 지린성 화롱현(和龍縣)에서 발견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함께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21행 725자의 정혜공주묘 비문은 높이 90cm,너비 49cm,두께 29cm로 현재 창춘(長春)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그녀가 문왕의 둘째 딸로 출가하였고 남편이 그녀보다 먼저 죽었으며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 40세로 죽었다는 사실과 정혜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보력 7년 11월에 진릉 서원(西原)에 배장(陪葬)되었다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3년상을 치른 셈인데 이는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장례 풍속으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이 확인된 셈이다. 또한 발해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발해의 자주성을 확인케 한 증거가 되었다. 

무덤양식도 고구려식 돌방무덤(석실봉토묘)이며 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 길이 있고,여기서 널길을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4면이 돌방이며 천정은 고구려식의 고임천정(말각천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비문은 그 아버지 문왕이 '대흥(大興)'에서 불교적 색깔이 있는 '보력(寶曆)'으로 연호를 고쳤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즉위시가 아닌 때에 개원(改元)했다는 것은 정치의 개혁 및 유신과 관련이 있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문왕이 전제군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적혀 있어 문왕이 불교이념을 중심으로 국가통합을 의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 북쪽에서 바라본 육정산 전경. 여섯 봉우리가 있어 육정산(六頂山)으로 불리며 맨 오른쪽에 603m의 주봉이 보이고 그 뒤편 남쪽에 정혜공주묘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정혜공주묘지석. 


▲ 제1무덤구역 2호분의 정혜공주묘. 뒤쪽 조금 솟아난 부분이 남아 있는 봉분이다.


▲ 육정산 고분군 입구. 안내비문이 뒤로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 석공의 실수로 한 획이 빠져 '륙정산 옛 무덤떼'가 아닌 '륙정산 엿 무덤떼'가 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1993년 촬영)


▲ 지금은 입구에 '륙정산 옛 뭇묘지'로 고쳐져 있다(2006년 촬영).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대조영 무덤은 어디 있을까
육정산 물적 증거 없어 상경성서 발견 가능성
20070224T162326 | 수정시간: 2009-01-11 [22:23:50] | 20면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대중상)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와 견해는 없다. 대중상은 건국 전에 병사하여 그 무덤을 어떻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조영 역시 발해 건국자 태조로서 묘비명이 나올 법도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발해 건국터가 둔화였고 이곳이 40여 년간 도성이었기에 둔화 육정산에 그들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아직까지 물적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로 보아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육정산보다 오히려 그 품격 면에서 뛰어난 헤이룽장성 닝안시(寧安市) 상경성에 대조영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상경성은 160년간 해동성국(발해)의 안정적 수도 역할을 한 곳이기에 이곳에 발해를 건국한 태조의 무덤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후대가 이곳에 화려한 궁성을 축조하고 태조와 그 아버지 대중상의 무덤까지 옮겨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석실분으로 벽화가 있는 삼령분 등이 대조영의 무덤으로 유력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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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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