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90000&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70310000172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9> 발해의 자존과 슬픔이 있는 곳-정효공주묘
묘비에 '자주' 새기고,벽화에 '문화' 남기다
36세 요절 문왕의 넷째 딸 불교식 장례 고구려식 무덤
역법·풍습 등 시대상 확인 중경 위치 서고성설 뒷받침
'고구려 양식' '당나라 풍' 한국과 중국 유물해석 이견
부산일보 | 20면 | 입력시간: 2007-03-10 [16:14:40]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 12명의 인물 벽화가 있는 정효공주묘 무덤 안칸 동벽도('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 부르는 것 같았고,경대(鏡臺)에서 한 쌍의 방울새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 딸 정효(貞孝)공주로서 이 내용은 그녀의 묘비 중의 일부이다. 

정효는 죽은 후에 붙여지는 이름인 시호로서 그녀는 757년 즉 문왕 대흥(大興) 21년에 태어나 대흥 56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인 문왕은 발해에서 가장 장수한 '황상(皇上)'이었다. 

정효공주묘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 용두산(龍頭山)에 위치한 유적으로 1980년 10월에 발견되었다(이곳은 발해 5경 중 중경에 해당되는 곳이다). 문화혁명 때 소꼴을 먹이던 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무덤은 연변박물관에 의해 긴급 발굴되었는데,이 무덤에서 묘비가 발견되어 그 주인공이 둔화(敦化)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동생 즉 문왕의 넷째 딸임이 밝혀졌다. 높이 106㎝,너비 58㎝,두께 26㎝의 해서체로 음각된 이 비문은 18행으로 모두 728자가 선명하여,정혜공주묘비에서 판독하지 못하였던 부분을 이를 통해서 대부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덤 바로 위에는 벽돌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식 장례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하며 탑 아래 지하에는 무덤칸이 있다. 무덤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만들어진 무덤칸은 벽돌과 돌로 쌓았으며 천장은 길다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것은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고구려식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칸의 벽면에는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였다. 

무덤길과 동,서,북쪽 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은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이다. 사후(死後) 세계에서도 공주를 모신다고 상상한 이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무사들이 집을 지키며 몸종들이 시중을 들고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여 즐겁게 하며 시종들이 일산(日傘)을 받쳐 햇볕을 가려 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당시의 미녀상인 통통한 얼굴을 한 여인들이 시종을 들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무덤과 벽화를 가지고 한중 학자들 간의 주장이 갈려 있다. 중국은 벽돌을 쓰는 무덤 양식이나 통통한 얼굴의 회화양식은 모두가 전형적인 당나라풍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비해,한국 특히 북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의 고구려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 즉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것을 이어받고 있으며 회화에서 유행을 따르기도 하지만 벽화를 그리는 풍속은 역시 고구려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들은 도굴되어 거의 없어졌지만 무덤 형태는 완벽했고,벽화 역시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기에 자료로 활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도자기 인형 2점,정효공주와 그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뼈,도금한 청동장식물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정효공주묘 개념도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지병서(貞孝公主墓誌幷序)'라는 묘지석은 발해사의 실체를 좀더 선명하게 하였다. 당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가 크게 부흥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문왕의 존호(尊號)를 통해서 그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대흥과 보력은 발해에서 사용하던 고유 연호이고,효감,금륜,성법은 불교용어이다. 특히 금륜은 불교의 전륜성왕 설화에서 나온 것으로 그 스스로 무력이 아닌 불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할 이상적인 왕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발해왕은 '황상(皇上)'을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자주적이었다는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아울러 이 묘는 여러 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이로 인하여 미술사적으로나 복식사 및 문화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중국의 '국가급문물보호단위'의 반열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당서' 등이 당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다면 정효공주묘비는 전적으로 발해시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자주성과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물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즉 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문왕대의 정치상황,공주의 시호(諡號)와 생몰년대,발해 당시의 문자사용 예와 문학적 소양,서체와 장례법,당시의 역법(曆法)과 귀족들의 생활,풍습 등 다양한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 발해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효공주묘의 발견은 발해의 중경이 이곳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입증케 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묘가 발견되기 이전에 발해 5경 중의 두 번째 수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었다. 소밀성(蘇密城)이 있는 길림성 화전(樺甸)설과 육정산이 있는 둔화(敦化)설,그리고 화룡현의 서고성(西古城)설이 있었는데,결국 이 비문의 발견으로 서고성이 중경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정혜와 정효공주의 묘비는 이들이 모두 출가하여 정혜공주는 아들 하나를,정효공주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남편마저도 먼저 사망하는 비운을 맞고 있던 문왕의 심정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공주 모두 절개를 지키다 수절하다가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하였으니 부왕의 슬픈 마음이 곧 화려한 공주들의 무덤이 있게 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토록 하였다. 상여꾼의 목메어 우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의 슬피우는 소리 들판 따라 오르내리는 구나. 한나라 악읍(鄂邑) 공주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 넘고 당나라 평양(平陽) 공주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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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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