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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4> 동모산에 자리잡은 최초의 산성-성산자산성
군사적 약점 보인 평양 대신 사방 탁 트인 동모산으로…
인근 영승·육정산 일대 발해 유물·고분 쏟아져
부산일보 | 20면 | 입력시간: 2007-01-27 [16:26:08]



698년 대조영 등이 이해고와의 천문령전투에서 승리하고 건국의 터를 잡은 곳은 지금의 지린성 조선족자치주 둔화지역이다. '신당서'는 이후의 상경(上京)과 비교하여 이곳을 '구국(舊國)'이라 한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을 피해 첫 수도로 삼은 '구국'은 송화강의 큰 지류인 목단강 상류에 위치한다. 그들이 처음 웅거하였다는 '동모산(東牟山)'은 지금 둔화시 서남쪽 시엔루샹(賢儒鄕) 성산자산성으로 본다.

성산자란 '산 위에 성터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그곳 마을도 '성산자촌'으로 북방에 이러한 지명이 많다. 옌지(延吉)에 있는 성자산이나,지안(集安)의 산성자산(山城子山) 등이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북방에는 '동모산'이라는 지명이 전혀 없고 발굴도 완벽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곳이 동모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이곳은 방어적 산성일 뿐만 아니라 이 산과 연결된 목단강(牡丹江) 건너 영승(永勝)유적에 발해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또 이곳에서 동북으로 10㎞ 정도에 발해 왕족과 평민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의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고,산의 북쪽을 끼고는 사료에 보이는 오루하(奧婁河),즉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남아 있는 성터는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둘레가 2㎞ 정도이고 성곽은 흙과 모래를 섞어 쌓았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성인 이곳은사면이 탁 트여 있어 외부인의 동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대석하(大石河)는 북쪽 방어선이다. 

그런데 대조영이 왜 평양이 아닌 이곳을 건국 터로 삼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구려 부흥국이라면 평양을 목적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의 출신 지역과,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노출된 평양의 군사적 약점으로 인하여 결코 평양을 첫 수도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TV사극에서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 기록이 없어 부인도 인정도 할 수 없다). 대조영의 출신은 '속말말갈'로 표현되는 것처럼 송화강(속말수) 유역에서 태어났고 그 세력들은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천문령전투에서 큰 공을 이룰 수 있었고 결국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 대조영이 첫 건국 터로 잡은 동모산(현 성산자산성). 중국 지린성 둔화시 서남쪽에 위치한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으로 산의 북쪽에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필자는 성산자산성을 다섯 차례에 걸쳐 가 보았지만 2005년에는 중국 관원에게 제지를 당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처음 답사한 것은 1992년 여름이었다. 그해 7월 옌볜대 발해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제2회 발해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발해 유적을 최초로 답사할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2박 3일간의 학술회의가 끝난 후,발해유적 답사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중국 학술대회의 관례는 주최 측에서 관련 유적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발해사는 민감하였던 터라 유적 답사는 묵인하는 정도에서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악조건이었지만 비교적 안심하고 유적을 답사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중국의 발해사 학자들도 반가웠지만,뜻밖에 북한 발해사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의미가 있었다. 

한편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인 거란의 항복 장수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그를 돕고 있던 '말갈' 세력 때문이었다.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는 데 그를 도왔던 세력으로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을 꼽고 있다. 

과연 말갈인들은 누구인가? 이들과 고구려인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발해는 과연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조였는가 아니면 고구려와 관계없는 말갈인들이 세운 왕조였는가 하는 점들이 학계의 쟁점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봉착한 문제였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부분이다. 1988년에 내놓은 '숙신·읍루연구'와 '고구려시대 말갈연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결론은 말갈이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니라 고구려 변방 사람들을 낮춰서 부른 종족명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서울사람만을 나라사람으로 인정하는 역사관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신라인하면 경주 사람만을 지칭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서울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시골 사람'으로 낮춰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고대의 백제사람이란 공주·부여 사람만을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란 평양의 도성 안 사람만을 지칭했던 것이다. 


▲ 성산자산성에서 내려다 본 오루하(奧婁河). 지금의 대석하(大石河)로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 말갈이라는 멸시어는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라,고구려와 당나라 사람들이 낮춰 부른 이름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갈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갈이라는 말 속에는 부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두산 지역 사람을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 한다든지,송화강 유역 사람을 낮춰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불렀다. 때문에 '신당서'가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한 것은 '송화강 지역 시골사람'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갈 추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변방 장수로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으며,고구려가 멸망해서는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세력의 추장이었다. 끝까지 대조영과 운명을 함께한 걸사비우는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변방의 독자 세력으로서 말갈 추장이라 불렸던 자이다. 

한편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에 끌려가 고구려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당의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었다가,고구려 부흥을 위해 오히려 '말갈' 즉 고구려 변방인과 공모하였다는 '구당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이때의 말갈도 고구려 변방 현지인에 대한 낮춤말 이외의 다른 뜻이 아니다.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당 고종이 고장(보장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임명하여 조선왕(朝鮮王)에 봉하고… 그런데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불러다 늑주(勒州)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등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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