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후반에 성립된 발해의 문화는 이전 삼국 시대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 시대는 우리나라 고유문화에 바탕을 둔 시기로, 복식문화도 이에 따라 형성되었으나, 발해와 통일신라의 체제가 이루어진 시기에는 이질적인 당나라의 문화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와는 다른 복식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발해 복식문화를 구성하는 요인은 당 문화의 영향뿐만 아니라 고유영역, 즉 문화적 계승에 따른 고구려 복식문화는 물론, 발해 건국 이전부터 발해 영역의 토착세력이었던 말갈의 복식문화까지도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발해의 남자 복식문화는 독자적 측면과 외래적 측면으로 구분되는 이중적 복식구조의 특징을 갖게 되었는데, 독자적 측면은 피지배층의 복식문화로, 외래적 측면은 지배층의 복식문화로 구별할 수 있다.
발해의 복식문화는 남쪽의 통일신라와 함께 고대의 복식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를 이어주는 우리나라 복식문화의 일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관복
관복은 문무백관이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나 조정에서 사무를 볼 때 착용하는 것으로 나라에서 지급한 제복(制服)을 말한다.
발해는 건국 초부터 외부세력의 변화 판도를 주시하며 돌궐, 당, 일본, 신라 등의 주변 국가와 수교를 꾀하는 등 국위를 신장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신을 파견했는데, 국가 간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은 공식적인 일이므로 사신들은 자연히 그에 걸맞는 관복을 착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발해 복식제도 제정은 다른 나라와는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관복제도는 왕권이 확립되고 제도와 기구가 정비되는 시기에 확립되며, 이후 관료제도의 정착과 관리의 위계질서를 위해 공복제도가 발달하는 것이다.
발해는 건국 후 1개 고왕(698~719)부터 2대 무왕(719~737)의 30~40년 동안은 국가 정비에 주력하였던 시기로서, 당시에는 아직 구체적인 관복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다. 새로운 구가가 건국되고 제도가 새롭게 마련되기 전까지는 이전 국가의 제도를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발해도 건국 초기에는 그들이 문화 계승국인 고구려의 제도를 수용하였을 것이다. 발해의 건국 시저에서 멸망기까지 지배계층에 있으면서 주도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던 사람들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 유물의 상당수가 고구려 양식인 점으로 보아,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의 문물제도를 그대로 계승했을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이 시기 발해의 관복은 머리에 변형관모(弁形冠帽:고깔 형태의 모자)를 쓰고, 곧은 깃의 유(?: 저고리 형태의 상의), 고(袴: 바지 형태의 하의)의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삼국 시대의 고유복식 형태를 8세기 전반까지 유지했을 것이다. 발해 초기의 관복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로, 7세기 말~8세기 초의 우리나라 사절의 모습으로 추정되고 있는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 이문(그림 1)과 장회태자 이현(李賢)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그림 2)의 복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자료들은 발해 건국 시기와 가장 근접한 시기의 벽화 인물들로, 당시에도 우리나라 고유복식을 착용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일상복
발해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여 이를 토대로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일반적으로 말타기와 사냥을 기본으로 하는 생활 방식과 축국(蹴鞠)과 격구(擊毬)와 같은 놀이를 즐겨했던 풍습 등 고구려인들의 생활 및 복식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발해인들은 활동하기 편리한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형태의 복식을 일반적으로 착용했을 것이다.
1)남자복식
쓰개에서는 말액(抹額)과 변형 조우관(變形 鳥羽冠)에서 고구려적인 특징이 반영되어 있고, 의복에서는 유(?)와 고(袴)의 고유 복식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말액은 정효공주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 중에서 시위(侍衛)가 붉은색 말액을 머리에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그림 5). 우리나라의 말액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 있는데, “고구려 음악에 이르기를, ? ? ?춤추는 자가 4명인데 붉은색 말액을 하고, 머리 뒤로 쇠몽둥이 모양의 상투를 틀고, 금귀고리로 장식한다. 2명은 황색 유와 군을 입고 적황색 고를 입는다. 2명은 적황색 유, 군, 고를 입는데 아주 긴소매이다. 신발은 검은색 가죽으로 된 목화를 신고 쌍쌍이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 ? ? 당나라 무태후(측천무후) 때까지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직 한 곡만을 익힐 수 있을 뿐이고, 의복제도마저 점차 쇠미해지고 없어져서 그 본래의 풍모를 잃고 말았다”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에서 고구려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사람의 모습이 고구려식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보면, 고구려에서도 망랙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쓰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위에 기록된 말액은 정효공주묘의 시위가 착용한 말액과는 착용자의 신분이나 착용 방법에서 차이를 보이나, 서로의 연관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는 고구려의 풍습이 발해로 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여자 복식
발해 여성의 복식문화를 살펴볼 수 잇는 자료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청동여인상(그림 12)과 길림성 용두산 부근에서 발견된 삼채여인상이 있다. 청동여인상은 쌍계(雙?)의 머리 형태에 대수포(大袖袍: 소매가 매우 넓은 상의)를 입고 그 위에 운견(雲肩)을 착용했는데, 대수포 밑으로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길이의 상(裳: 치마)을 입고 있다. 삼채여인상은 소매 길이가 긴 상의의 유(?) 위로 긴 길이의 하의인 상(裳)을 덧입는 착장 방법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독특한 방식(그림 13)으로, 상을 입고 그 위에 유를 덧입는 우리나라의 고유 양식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 또한 두 유물의 여인상 모두 앞굽이 높이 솟은 고두리(高頭履) 형태의 신발을 신고 있는데, 긴 치마가 앞굽에 걸쳐지므로 치마가 길어 보행의 불펴함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이는 방해 여성들이 당나라식의 의복과 착장 방식을 공통적으로 영위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여자 복식>
3.의복의 소재
『신당서』에는 각지의 대표적인 생산물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태백산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포(布), 옥저의 솜, 용주의 주(紬), 위성의 철(鐵),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등이다. 이 중 일부는 발해에서 직조되거나 생산되었던 의료로서 발해의 복식이나 경제적 교류 품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발해의 의료는 크게 직물류, 가죽 및 모피류, 어피류의 세 종류로 분류되는데, 발해는 지정학적 특징에 따라 가죽과 어피를 중심으로 한 의료가 대량 생산되었으며, 이는 대외적인 경제적 교류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요인이기도 했다. 발해의 활발한 경제적 교류는 국제적인 상호의존 체계에서 교역국가로서의 역동성을 이끌어 낸 것으로, 이를 통해 발해의 능동적인 문화 수용과 복식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1)직물류
『신당서』의 직물에 관한 기록에, “현주의 포, 옥주의 면, 용주의 주”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해에서도 방직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과 한랭한 기후로 다양한 품종이 생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마와 작잠사(?蠶絲)가 주로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직물은 역사가 오래되어 부여, 읍루 및 고구려에서 발달되었던 직물로서, 발해 건국 후 마직물의 제작 수준은 상당히 높아 그 중 좋은 품질의 포는 수출되기도 하였고, 마포의 생산량 또한 많았다.
상경 용천부 관하의 용주는 주(紬)로 유명했는데, 주는 평직(平織:날실과 씨실을 직각으로 교차하여 직물을 짜는 가장 기본적인 직조 방법)의 견직물을 뜻하는 것으로, 품질이 섬세한 것과 거친 것이 있었다. 748년에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어아주(魚牙紬)와 조하주(朝霞紬)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급 견직물 제품으로, 발해의 영역인 흑룡강 중 ? 하류 지역에도 견직물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가죽 및 모피류
발해 영토 중 북부와 동부 지역은 산이 높고 삼림이 우거지고, 매우 추운 기후인데, 발해에 병합된 말갈인을 중심으로 수렵과 어업이 주로 행해졌다. 이러한 기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동물의 모피를 방한의로 착용하게 되는데, 피부에 닿는 면에 따뜻한 모피를 온 안팎으로 붙여서 혹한기에도 야외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3)어피류
발해는 동해에 인접해 있고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및 경박호 등의 하천과 호수가 있어 수산업이 발달하였다. 이를 통해 생산된 어피류는 의료 외에 수출품으로 이용되었다. 발해에서 생산된 수만물 중 의료로 사용했던 것은 치어(?魚), 해표피(海豹皮), 교어피(膠魚皮) 등이다.
치어는 바로 숭어인데, 강 하류에 사는 어류이므로 발해의 동해 ? 남해 ? 서해 연안의 강 하류에서 생산되었다. 해표피는 바다표점(해표)의 가죽인데, 방습 ? 방한용으로 인기가 있어 매우 귀하게 여겨졌고, 남해보다 동해(연해주 방면)에서 많이 잡혔다. 교어피는 그 실물을 잘 알 수 없으나 흑룡강 중 ? 하류에서 잡히는 대발합어(大發哈魚)의 껍질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변기략(柳邊紀略)』에 “대발합어의 껍질은 색상이 옅은 황색으로, 무늬가 있는 비단과 같고, 옷이나 버선, 신발을 만들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에 종사하는 종족들을 어피달자(魚皮?子: 고기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는 동북 종족의 뜻)라고 하였다.
4)발해의 수입 의료
발해는 동물의 가죽이나 어피와 같은 의료를 주로 수출한 대신 당나라와의 일본으로부터 각종 직물을 수입했다. 당나라로부터 수입한 직물류는 채련(採鍊) ? 금(錦) ? 면(綿) ? 백(帛) ? 견(絹)등이고, 일본에서 수입한 직물은 나(羅) ? 능(綾) ? 금(錦) ? 견(絹) ? 양면(兩面) ? 채백(彩帛) ? 면(綿) ? 포(布) ? 사(?)로 그 종류나 수량에서 견직물류의 비중이 크다.
따라서 당시 주(紬), 포(布)와 같은 일부 직물만 생산했던 발해에서는 각종의 견직물이 필요했을 것인데, 주변국가로부터 이를 수입하여 그 부족함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4. 장신구
발해에서는 비녀,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빗 등 각종 장신구를 사용했음을 출토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녀와 빗은 피장자의 머리에 꽂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발해 여성들의 머리꽂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녀는 일자형(ㅡ자형), Y자형, U자형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채(釵)라고 하는 U자형 비녀(그림 18)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빗도 비녀와 함께 머리에 꽂아 여성의 머리를 장식한 것으로, 청해토성에서 발견된 뼈로 만들어진 빗이 전해지고 있다. 귀걸이는 삼국 시대부터 지배층의 남녀 모두가 착용했던 대표적인 장신구로서 금 ? 은 ? 동의 재료가 사용되었고, 귀에 닿는 환(環)의 굵기에 따라 세환식, 태환식으로 분류된다. <그림 19>는 작은 돌곽 흙무덤 형식의 창덕 3호 고분에서 발견된 태환식 귀걸이로 수식(垂飾)은 없으나 고구려의 형식을 계승했을 것으로 본다. 목걸이(그림 20)는 구슬에 구멍 뚫고 꿰어 만든 것이 대부분으로 재료는 수정, 마노, 호박, 벽옥 등이 사용되었다. 반지는 금 ? 은 ?동으로 된 것이 출토되었는데, 장식이 없는 간단한 원형이다. 팔찌(그림 21)은 금 ? 은 ? 동 ? 철이 이용되었는데, 표면에 무늬가 없는 원형 혹은 타원형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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