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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 해성 전투서 장구 이용 당나라군 기습공격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20>
중부일보 2010.05.24  남도일보  2012.04.19 00:00

멀리서 바라본 안시성 모습


신비로운 갱도 ‘장구’

안시성을 답사하면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은 산성 옆에 영성자마을을 꿰뚫고 지나간 장구(仗溝·싸움을 한다는 仗자에다 길게 파인 골을 의미하는 溝자)다. 지금껏 고구려 역사에 대한 국내외 자료들을 많이 보았지만 장구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안시성에 대한 역사자료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료에도 장구에 대한 소개는 단 한 마디도 없다.

‘장구’라는 말은 ‘싸움을 위해 인공으로 만들어진 갱도(坑道)·전호(戰壕), 또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장도(仗道) 혹은 전구(戰溝), 잔도(棧道), 잔구(棧溝)라고도 한다.

사서에서 ‘장도’와 비슷한 말은 한나라 시기 전쟁사에 출현한다. 진나라 말기 부패한 정치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반군이 일어났다. 유방(劉邦)의 군사가 먼저 관중(關中)에 진입해 함양(咸陽)을 공격했다. 이때 세력이 강한 항우(項羽)의 군사들이 관중에 들어온 후 유방을 관중에서 몰아냈다. 홍문연(鴻門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유방은 할 수 없이 한중(漢中)으로 물러났다. 항우를 현혹시키기 위해 유방은 물러가면서 한중에서 관중으로 통하는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다시는 관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방은 속으로 항우를 꼭 물리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서기 206년 점차 세력이 강해진 유방은 대장군 한신(韓信)을 파하여 동쪽으로 출병하게 하였다. 한신은 많은 군사들을 파견하여 불태워버린 잔도를 복구하는 것으로 옛길을 통해 다시 쳐들어갈 것처럼 꾸몄다. 항우의 주력군이 잔도에 집중된 틈을 타 한신은 대군을 이끌고 에돌아 항우의 군을 공격함으로써 크게 이겨 유방의 중원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잔도는 절벽에 조성해 놓은 좁은 길을 말하는데, 통상적으로 말하는 ‘길’의 의미와 다르다는 뜻에서 안시성의 장구와 비슷한 사례이다. 장구에 대한 이야기는 영성자산성을 답사할 때 영성자촌에서 만난 임조영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들은 것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필자의 흥미를 끌었다.

동북쪽 성벽터


임조영 노인에 따르면 영성자산성에 있는 장구(仗溝)는 고구려군이 전쟁 시기에 이용했던 전호로서 깊이 3m, 너비 약 4m로 수레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길게 뻗어나갔다 한다. 이 장구는 현재 영성자마을 사무실 자리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종가대(鐘家臺), 라가보(羅家堡), 양가(楊家), 소하연(小河沿) 등 4개의 부락을 지나 해성 도시 변두리인 신립둔(新立屯)까지 통하는 천장이 없는 지하통로다. 길이는 약 7.5km다. 안시성에서 나서 자란 임조영 노인은 어릴 때 소하연에 있는 외갓집으로 늘 놀러 다녔는데 이 통로로 다녔다고 한다. 당시 이 장구는 거의 원래 상태였다고 했다. 양쪽 벽은 흙으로 다져 쌓은 것으로 단단했고, 바닥도 단단하여 비가 내려도 발이 빠지지 않아 수레가 다닐 수 있었다. 장구 한쪽에는 배수도랑이 있었다고 했다. 70년 전의 일이지만 임조영 노인은 그 당시 이 장구를 오가며 장난질하던 일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현재 해성시를 한 바퀴 에도는 동쪽 순환도로가 이곳 소하연을 지나고 있는데 마을 중간을 흐르며 순환도로를 꿰뚫고 지나는 자그마한 개울이 바로 장구의 옛터다. 지금 옛 장구는 벽이 다 허물어지고 바닥에 흙이 쌓여 많이 얕아져서 결국 이름 없는 개울로 변해버렸지만 거기에 곧게 뻗어나간 물줄기는 지난 일을 낱낱이 지켜보며 말없이 흐르고 있다.

고구려군이 이곳 안시성을 지키고 있을 당시 당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몇 개월 동안 수없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이 성 함락에 실패하여 회군했다. 임조영 노인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당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침공하기 전에 먼저 안시성과 7.5km 사이 둔 진격로에 있는 해성을 둘러싸고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성 안이 여느 때와 달리 조용했다. 이상하게 여긴 당나라군은 염탐꾼을 파해 성 안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렇게 많던 고구려군사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소수의 군사들만 성 안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당나라군은 밤을 틈타 해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자 갑자기 어디서 솟아났는지 고구려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기습공격을 가하는 통에 당 태종은 군사들과 함께 이 성안에 갇히게 되었다. 고구려군이 낮에는 공성계로 짐짓 성을 비워두고 장구에 숨었다가 밤이면 당나라군에 기습공격을 한 것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임조영 노인이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그때 당 태종도 고구려 군사들의 포위로 말미암아 몇 개월 동안 이 성 안에 갇혀 있다가 후에 당나라 장수 위지경덕이 이끄는 원군이 와서 구해냈다고 한다.

이 넓은 물도랑 자리가 바로 옛날 장구터


임조영 노인은 안시성 소재지 영성자마을을 이룬 선조 임원봉(任遠鳳)의 후손이다. 현재 해성시 팔리진(八里鎭)에 속하는 영성자촌은 450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 이 마을이 생긴 것은 청나라 순치(順治) 8년이라고 했다. 당시 산동(山東)에서 임원봉, 사만량(謝萬良), 여대업(呂大業), 전유량(田有良) 등 4가구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오면서 마을이 생겼다. 4가구가 이 마을의 시조인 셈이다. 그중 전씨와 사씨, 임씨와 여씨는 옹서(翁서) 사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이 마을에는 네 성씨가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임조영은 바로 임원봉의 12대손이다. 본적이 산동인 임씨는 하북성(河北省) 창리(滄里)를 거쳐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임조영 노인은 이곳 팔리진 중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직한 지식인이다. 임조영은 젊은 시절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도 많이 보았으며 옛 안시성과 사안성(四安城·즉 해성)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영성자마을에서 산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이 지역에서 향토지를 쓸 때도 임씨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지금 영성자마을 뒤편 동쪽의 산성 정문(서문) 입구 안 성벽 옆에서 부인 위(魏·73)씨와 함께 외롭지만 안락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그의 말대로 산골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서인지 팔순에 가까운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물론 임조영 노인이 소개한 설화의 진실여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쪼록 이 이야기는 고구려군이 잘 이용했던 장구의 신비로운 역할을 설명해 주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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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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