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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 위세는 온데간데 없고 흔적만 덩그러니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19>
중부일보 2010.05.17 남도일보 2012.04.05 00:00
 

멀리서 바라본 동북쪽 성벽(장대)터


그렇게 유명했던 옛 성의 초라한 모습
난공불락의 안시성

요령성 안산(鞍山)지역 해성시(海城市·안산시 관할)에서 동남쪽으로 7.5km 떨어져 있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은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현재 안산시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해성시 팔리진 영성자의 원래 이름은 고려영성자(高麗英城子)였는데 후에 영성자로 고쳤다. 영성자산성이 영성자촌 동쪽 산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불렸다. 해성~수암(岫岩) 간 철도가 이 산성 서쪽으로 350m를 사이 두고 지나며, 해성하의 지류인 소철하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이 산성을 350m 사이 두고 해성하에 합류한다.

영성자산성은 군사방어성으로 안산 경내에만 해도 이러한 산성이 5개가 있다. 즉 동북쪽으로 16km 떨어진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30km 거리를 둔 마운산성(摩雲山城), 33km 떨어진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동쪽으로 18km 거리를 둔 용봉곡산성(龍鳳谷山城)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어구조와 체계는 각자가 자기의 성을 지키면서 전쟁 시 서로 호응하고 연락하며 서로 파병지원을 하면서 방위기능을 높이는 데 유리했다.

안시성, 여·당 전쟁 시기 고구려군이 당나라군과 치열한 공방전에서 이긴 이 유명한 산성을 답사해 보니 현재 현지의 모습은 옛 명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급 문화재’, ‘영성자 성터’라고 조각한 비석은 영성자마을에서 이 산성 정문(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황량한 길가에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고, 문화재보호 규제와 주의사항을 조각해 놓은 두터운 석판은 동강 난 채 그 옆에 쓰러져있으며, 1천300여 년 전 웅장한 기세로 거연히 서 있던 성곽은 허물어져 그 흔적과 담벼락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알아보기 힘들었다.

안시성의 형태는 불규칙적인 타원형으로 동, 북, 남 3면의 지세가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2천200m, 그중 가장 높은 동쪽 산봉우리의 높이는 해발 180m이다. 그 아래로는 비교적 평탄한 분지를 이루다가 골짜기로 변하여 산성을 남북 두 부분으로 갈라놓는다.

이 산성에는 동, 서, 북 3면에 각각 문이 하나씩 있고 서남쪽과 서북쪽, 동북쪽, 동남쪽 등성이에 각각 장대 터가 있다. 그중 동남쪽 장대는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안시성 성벽은 운모암 풍화토로 축조된 토성으로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져 내리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면을 보면 판축기법으로 다져쌓은 성벽인데 매 층이 7cm로 견고하게 잘 다져졌고, 어떤 곳은 위층이 회갈색(灰褐色) 토층으로 쌓아졌으며, 다진 밀도가 약한 것으로 보아 후에 증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중 서문과 수문을 이웃한 성벽은 그 밑 부분이 30m 정도로 두터웠는데, 이는 서문과 수문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이곳 지세가 낮으므로 인공판축 성벽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북쪽 성벽은 해발 130~170m로 안시성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었으며,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어떤 곳은 거의 절벽이다.

임조영씨가 저장 움처럼 사용하고 있는 굴. 원래는 배수구 입구였다고 한다


1994년, 한 관련 기관에서 이 산성에 대해 발굴조사를 할 때 성벽 안쪽으로 마도(馬道)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계단식 과수원으로 변해있어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산성 서문(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수문 터가 있다. 이 수문 터는 원래 산성의 주요한 배수구였는데 지금은 이리저리 헐리고 넓어져 그 너비가 40m나 되며, 산성을 드나드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그 첫머리 길 왼편(즉 북쪽)에 임조영(任朝盈·78)씨가 사는 자그마한 두 칸 집이 나오고, 길을 따라 위(동쪽)로 10여 집이 살고 있다. 임조영씨의 말에 따르면 산성은 일찍 수나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고구려가 증축했고, 현재 서문도 원래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길이었는데 지금은 성벽이 헐려 많이 넓어졌다고 한다.

임조영씨의 집 앞 성문 옆 토성 아래 자그마한 굴이 하나 보였다. 이 노인에 따르면 이것이 원래 배수통로 입구였다고 한다. 돌로 쌓은 이 배수구는 성 밖까지 통하는데, 1946년 이 지역에서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이 톱질하듯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갔다 하며 싸울 때, 열서너 살 난 임조영씨는 포격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고 한다. 배수구 입구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20~30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치 널찍하다고 했다. 지금 이 배수구 입구는 임조영씨가 채소 저장 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서문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요덕구(姚德九)라는 주민이 살고 있는데 수 년 전 산성 발굴조사를 하면서 이 집 정원에서 건물 터를 발견했다. 발굴단이 그곳을 파보니 화강암으로 네모나게 둘러쌓으면서 지하로 내려간 계단식 건물터가 나타났다.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대로 묻어버렸다. 발굴팀은 이곳이 고구려의 물감옥이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고 한다. 그 속에서 가공한 네모난 목재도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1천여 년을 지나면서도 새 것처럼 말짱했다고 한다.

필자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컸다면 이곳이 저수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쓴 화강암은 모두 외부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이 산성에서는 일찍이 대량의 고구려시기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중 수문에서 서북방향으로 70m 떨어진 주민주택 울 안에서 정방형의 주춧돌(한 변의 길이가 0.9m, 두께 0.28m)이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동서로 약 50m 어간에서 대량의 재와 줄무늬기와 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나왔으며, 동쪽과 북쪽 성벽 바로 밑에는 곳곳에서 20m 간격으로 지름 3m의 구덩이들이 규칙적으로 분포된 것을 발견하였는데 발굴학자들에 의하면 이는 고구려군사들이 전쟁 시 몸담았던 곳이라고 한다.

임조영씨는 본인이 어릴 적에 이곳에서 무쇠 솥만 해도 족히 한 차나 출토된 것을 보았으며 쇠다리미, 단검, 화살촉 등 고구려 시기의 철기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영성자산성 표지석


이 성 안에서는 또 4개의 우물이 발견됐다. 그중 수문(남문)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거리 둔 지점에 쐐기돌로 둘러쌓은 우물이 있는데 지름 1.2m, 안벽지름 0.7m, 깊이 7m로 현지 주민들이 시멘트로 우물 아가리를 발라버렸다. 수문에서 150m 떨어져 있는 임국원(任國園)씨 집 마당에서 땅을 파다가 약 1m 깊이에서 대형 각목으로 우물정자형으로 쌓은 우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직경이 1.7m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도 이와 유사한 우물터 2개가 선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404년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희(慕容熙)로부터 요동성을 탈취한 후 산성을 대거 축조했는데 출토된 유물, 유적지의 특징으로 보아 영성자산성도 이때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성자산성과 비슷한 토성으로는 이밖에도 무순 고이산산성(신성)과 심양 진상둔 탑산산성(개모성)을 들 수 있다. 이런 산성은 모두 5세기 고구려시기 건축풍과 특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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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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