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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등 요동 고구려 산성 중 보존상태 가장 좋아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16>
데스크승인 2010.04.26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성
성산산성(전성)은 요동 고구려산성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셈이다. 이 성은 북쪽 성벽이 약간 길고 남쪽으로 점차 오므라드는 불규칙적인 삼각형으로,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으며, 가운데는 개활지로 되어 있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2천898m, 면적은 0.525㎢다. 성벽은 산세를 이용해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됐는데 남쪽과 동남쪽에 다듬은 화강석으로 성벽을 쌓았고, 나머지 부분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많지만 거의가 원시상태로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보통 1~2m고, 가장 높은 곳은 9m에 달하며 꼭대기의 너비만 해도 2m다. 성벽은 화강암을 쐐기돌로 다듬어 쌓은 것이다. 서문과 동문 부근에는 각각 치(雉·중국에서는 마면<馬面>이라고도 부름)가 하나씩 있어 완전한 방어 및 공격 체계와 초소와의 상호연락 기능을 갖추고 있다. 그 중 서문 남측 성벽 구비도리 벼랑 위에 축조된 치는 그 높이만 해도 약 5m나 된다.
정문(남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거기에 산성관광 매표소가 있다. 여기서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길 오른편으로 탑림(塔林)이 보인다. 여기에는 높이가 3.2m나 되는 푸른 전탑(불탑) 8개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안장된 고승을 기리기 위해 몇 해 전에 조성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탑림에서 조금 위로 가면 길가에 꽤 널찍한 너럭바위가 보이는데, 그 바위에 옛날에 깃대를 꽂았음직한 작은 구멍이 있다. 그 위로 법화사 사찰이 보이며 사찰 너머 동북쪽 산꼭대기에 웅장하게 설치된 장대와 사찰 서북쪽에 위치한 전망대(화장대) 건물이 보인다.
길 오른쪽에 동서 방향으로 난 깊고 기다란 구덩이 하나가 보인다. 그 서쪽 머리에는 ‘저수지’라고 쓰인 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저수지를 둘러보니 실로 엄청난 크기다. 길이 60m, 너비 5m, 깊이 약 6m에 달하는 저수지는 성벽과 같은 공법으로 돌벽을 쌓았는데 여기에 무려 1천800t의 물을 저장할 수 있어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달 동안 써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저수지는 산성 안 동·서·북 3면의 산물이 흘러서 모여드는 곳에 위치해 물은 언제나 충족하게 저장돼 있었다고 한다. 이 저수지는 그 당시 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설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저수지의 위치 선택과 규모의 크기, 그리고 구조의 교묘함은 후세사람들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두고 읊은 시가 있다. “옛적 성안에 주둔하던 군사(군마)들이 / 이 고인 물로 생명을 유지하였으니 / 슬기로워라 그대들이여 / 천추만대에 거룩한 모습 보여주누나(當年兵馬住城中 賴此蓄水育生靈 古人智慧堪贊賞 千秋萬代見舊容).” 분명히 고구려인을 포함한 선인(先人)들에 대한 찬사다.
필자는 저수지 바닥으로 내려가 보았다. 바닥 동쪽 끄트머리에 안쪽으로 파여 들어간 굴이 있는데 굴 문 어귀에 수뢰(水牢·물 감옥)라고 새긴 표지판이 있다. 옛날 물감옥이었다는 것이다. 별로 깊어 보이지 않아 안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왼편에 돌로 쌓은 벽이 보였다. 혹시나 안쪽으로 굴이 나 있는 것을 돌로 막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입구에 법장(法杖)을 든 현장법사(좌상<坐像>)가 떡하니 앉아있다. 한참 생각해 보아도 터득해 낼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이 물감옥이라고 전하지만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옛날에 성안의 사람들과 군마의 음용수저수지로 사용했다면 이 안에 물감옥을 설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저수지 북쪽 벽 위로 법화사(法華寺) 편전 뒤에 건물이 있다. 저수지 옆길을 따라 왼편 등성이로 더 오르면 오노궁(五老宮)이 있다. 도교에서 말하는 ‘오노’는 ‘오행(五行)’의 신령을 가리킨다. 이 오노궁은 현재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오노신상(五老神像)을 모신 절이라고 한다.
오노궁은 산세를 따라 상·중·하원으로 돼 있다. 그 중 상원은 전각(殿閣)이고 중원과 하원은 석벽, 돌계단, 돌난간, 돌사자와 석방(石坊) 등 석조각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교한 건축기술로 하여 요남지역 제1사찰이란 명성을 갖고 있다.
하원 한가운데는 반원형으로 올라가며 여덟 층으로 쌓은 계단 위에 석패방(石牌坊)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중원에 이른다. 그곳에는 무쇠로 주조한 3m 높이의 신단(神壇)이 있고 거기에 ‘오노궁’이라고 새겨져 있다.
오노궁에서 내려와 길 따라 북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법화사가 있다. 법화사는 상·하원으로 나눈다. 하원은 명나라 만력(萬歷) 42년(서기 1614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청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불이 나 타버렸다. 상원은 민국 8년(서기 1919년)에 중수했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상·하원이 모두 사라졌다. 1994년 다시 지은 후 절 집은 17칸에서 29칸으로 늘렸고 신상(神像)도 42기에서 71기로 늘었다.
하원의 정문 양 옆으로 종각(鐘閣)과 고각(鼓閣)이다. 우리를 안내하던 화씨란 젊은이는 이 두 누각은 법화사를 중수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화강석으로 쪼아 만든 이 두 누각의 지붕은 아주 오래된 듯 표면이 풍화되어 거칠거칠해 보였다. 적어도 수백 년은 되어 보였다.
상원은 하원 북쪽에 있어 서로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 옆으로는 수백 년이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와 고송이 몇 그루씩 있어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그 주변으로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널려 있고, 오래된 참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예스러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그 오른편으로 너비 0.6m, 높이 1.2m, 두께 0.15m가량 되는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친 탓인지 때와 검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비석에는 음각된 글자들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하여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
법화사 하원 서쪽에 돌계단으로 조성된 작은 길이 산 위로 나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면 그 끝머리에 웅장한 건물 하나가 버티고 있다. 바로 산성 서북쪽 전망대 누정(樓亭)이다. 이 전망대는 옛날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개수영(蓋秀英·개주에서는 연개소정이라고 한다)이 몸치장을 하던 화장대라고 전해진 곳이었는데 수년 전에 산성을 복원, 정비하면서 새로 세웠다고 했다. 이 누정 바깥쪽은 가파른 벼랑이며, 양 옆으로 벼랑 언저리를 따라 성벽이 쌓아져 있다. 1000여년 전의 원시상태로 남아 있다는 성벽은 높이가 1~2m다.
누정은 정방형의 석축대 위에 세워졌다. 석축대 밑변의 길이는 16m, 윗변의 길이는 15.5m이다. 원각 4각형으로 된 기단은 아홉 층의 다듬은 돌로 쌓았고, 매 층은 0.23~0.29m로 두께가 부동하며 층마다 약 0.15m씩 들여 쌓았다. 누정은 새로 지은 것이지만 석축대는 1000여년 전의 옛 것 그대로다.
이 전망대 위에 서면 성안과 산 아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 동북쪽에서 서남쪽의 벽류하로 흘러가는 협하강과 푸른 황해바다도 조망되어 수시로 적정에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후성’
성산산성(전성)이 완성된 지 몇 년 후, 즉 서기 597년 영양왕은 그 북쪽에 후성을 축조하기로 한다. 그것은 성 북쪽의 산이 넓은데다 산세가 험하고 돌이 많아서 성을 축조하기에 알맞기도 했지만 기존의 산성이 좁아서 군사와 군량미를 용납하기에는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성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인 서기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후성 축조는 그만두게 되고 그 후에도 끊이지 않는 전난(戰亂)으로 말미암아 후성축조는 더 이루어지지 못했다.
채 완성되지 못한 후성은 전성과는 직선거리가 2천m, 협하(夾河)를 사이에 두고 북쪽 하화산진(荷花山鎭) 마령촌(馬嶺村)에 잇대어 있다. 전성과 후성을 통틀어 협하산성(夾河山城)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동서로 길쭉한 삼각형의 전성과 달리 후성은 불규칙적인 원형으로 그 둘레가 5천여m로 전성보다 면적이 훨씬 크다. 구조는 비교적 단조로우며 남문과 북문, 그리고 동남쪽에 성문이 있다. 성안에는 평탄한 분지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문에서 북문까지 거리는 약 1.5km다. 후성은 동쪽과 서쪽으로 산세가 높고 바깥쪽이 벼랑이며 남쪽과 북쪽 지세는 상대적으로 낮다. 산성 서남쪽 모서리의 산봉우리는 해발 481m며 위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북쪽과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그 골짜기 부분에 각각 남문과 북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옹성 형태로 축조됐다. 그 중 남쪽과 북쪽의 성벽 터는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북문 터는 훼손이 심한 가운데 지금은 드문드문 인가가 있으며 성문 서쪽으로 옛 흔적을 약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후성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오르지 못하므로 그저 전성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전성과 후성은 성산옛성관광지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 대련시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고, 또 역사적 바탕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국가AA급 풍경구로 지정됐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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