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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방어위해 쌓은 고구려 옛성..요동서 최고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탐사기행<15>
데스크승인 2010.04.19     

복원해 놓은 적리성 성곽

해안 전초기지 적리성

요동반도 남측, 황해(서해) 북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 장하(庄河) 경내에도 고구려 옛성 성산산성(城山山城, 즉 적리성<積利城>)이 있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을 이은 영양왕(영陽王)이 즉위한 후 수나라의 침범을 막기 위해 요동반도에 대대적으로 산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장하에 있는 성산산성이 바로 그 중 하나다. 현재 요령성 경내에 고구려가 축조한 산성이 무려 100여 개가 있는데 대련지역만 하더라도 10여 개나 된다. 그 중 장하의 이 산성은 규모가 큰 것으로 꼽힌다.

적리성 이름의 유래

성산산성은 수(隋) 개황(開皇) 11년(기원 591년)에 완성된 산성으로 적리성(積利城), 성아산산성(城兒山山城), 홍적산(紅赤山)이라고도 부르나 역사상 적리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성산산성은 남쪽의 전성(前城)과 그 후에 축조된 북쪽의 후성(後城), 그리고 그 중간에 끼어 있는 협하(夾河) 등 세 구역을 통틀어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산산성, 즉 적리성은 주로 전성을 놓고 하는 말이다.

성산산성(적리성)은 장하시 성산진(城山鎭) 사하촌(沙河村) 만덕둔(萬德屯·고성둔<古城屯>이라고도 함) 서북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장하에서 개주(蓋州)로 가는 큰길을 따라 북으로 가다가 22km 지점 광명산진(光明山鎭) 위둔(魏屯)이라는 마을에서 꺾어져 5km쯤 달리면 성산기슭의 만덕둔에 이른다.

장하시의 친구 왕씨와 성이 화씨인 두 젊은이가 우리를 안내해 산성을 구경시키겠다고 나섰다. 만덕둔에서 서쪽으로 산마루를 넘어서면 산성으로 들어가는 3개의 달문으로 조성된 산문을 지나는데 그 문 위에는 ‘옛성 관광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양 옆으로는 커다란 돌사자가 산문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길 왼편으로 ‘동취석(童趣石)’이라는 커다란 자연바위 두 개가 마치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두 명의 동자처럼 관광객을 반긴다.

얼마 안 가 남문에 이르렀다. 현재의 남문은 산성의 정문으로, 성산진 정부에서 몇 해 전에 세운 것이다. 성문 위에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고 새긴 편액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산성에는 이곳 남문 외에도 동, 동북, 북, 서쪽에도 각각 문이 하나씩, 모두 다섯 개가 있다. 성내에는 장군각(將軍閣·동북쪽 내성 안에 있음), 장대(성 동북쪽에 있음), 전망대(瞭望臺·서쪽, 서북쪽, 북쪽에 각각 하나씩 있음), 전령초소(傳令哨所·장군각의 북쪽에 있음), 마구간(馬圈·성 동북쪽에 있음), 일문(逸門·내성의 동북쪽에 있는, 내성과 마굿간을 잇는 옆 문), 병영(남문 부근과 내성 남북 양측에 분포), 치성(雉城·동문과 서문 부근에 각각 있음), 음마만(장군각 북쪽에 있음), 저수지와 배수시설 등 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다. 성 안에는 또 명나라 만력(萬歷) 시기에 세웠다는 불교사찰인 법화사(法華寺)와 민국(民國) 시기에 세웠다는 도관(道觀)인 오노궁(五老宮)이 자리 잡고 있다.

성산산성이 ‘적리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름다운 전설에서 유래됐다. 전설에 따르면 진(晉) 의희(義熙) 시기, 성산 기슭 만덕둔 서북쪽 산 위에 3000여 년 된 인삼요정(人蔘妖精)이 살고 있었다. 인삼요정은 사람들이 와서 인삼을 파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에 성을 쌓았다. 주변사람들은 인삼이 만병통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산에 가서 인삼을 캐 본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느 한 해, 늙은 황해 용왕이 시름시름 앓다가 다 죽게 됐다. 용궁이 발칵 뒤집어질 정도였지만 용왕의 병을 치료할 방법은 누구도 몰랐다. 이 용왕슬하에 적리라는 딸이 있었는데 미모가 뛰어난데다 총명하고 영리해서 용왕이 끔찍이 사랑했다. 부친의 중해지는 질환 때문에 걱정하던 적리공주는 만덕둔 뒷산에 있는 인삼이 병 치료에 좋다는 말을 듣고 홀로 길을 떠났다.

적리공주는 시골 여인으로 가장하고 손에 바구니를 든 채 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규방생활을 해왔던 적리공주는 인삼 뿌리가 사람처럼 생겼다는 것만 알았지 줄기가 어떻게 생겼고, 잎사귀가 어떤 모양인지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수풀 속에서 무작정 파보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삼요정은 멋진 젊은이로 변해 적리공주 앞에 나타났다. 이때의 적리는 옷이 형편없이 찢기고 손과 팔은 긁혀서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초라해진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측은한 마음이 생긴 인삼요정은 적리가 이곳에 온 연유를 물었다. 적리공주는 인근 마을에 사는 가난한 집의 딸인데 아버지가 중병을 앓고 있어 인삼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인삼요정은 적리를 기특하게 여겨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적리의 손을 이끌고 산마루를 넘고 밀림을 지나 한 벼랑 아래 도착하자 두 그루의 측백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낭자, 이따 내가 사라진 후 ‘산신령님’ 하고 부르면 저 나무 사이에 흰 토끼가 나타날 터이니 낭자는 그 토끼를 잡아서 귀를 쥐고 빌어보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약초 한 뿌리를 주시옵소서’라고 말이요. 그러면 흰 토끼는 낭자가 바라는 인삼으로 변할 것이니 파가면 될 것이요.” 말을 마치자마자 젊은이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적리공주가 젊은이의 말대로 하여 정말 인삼 한 뿌리를 캐게 되었다. 공주는 너무나 감격해 아까 그 젊은이를 부르니 구름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이의 얼굴색은 창백해졌고 엄지손가락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본 공주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옷을 찢어 정성스레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적리공주가 눈물을 머금고 젊은이와 작별한 후 용왕에게 인삼을 달여 드려 용왕의 병이 나았다. 적리공주는 부친에게 사연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젊은이에게 시집가겠다고 했고, 용왕도 딸의 간청을 승낙했다. 적리는 공주의 모습으로 젊은이를 찾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백년가약을 맺을 것을 청하였다. 이리하여 둘은 부부가 됐다.

이듬해 이들 부부에게는 아기가 생겨 그 아기의 이름을 성아(城兒)라고 지었고, 성아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산을 성아산이라고 불렀다. 부부는 산에다 나무와 꽃을 심고 여러 가지 짐승을 키우면서 알콩달콩 깨알이 쏟아지는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성아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로부터 몇 해 후 인삼요정과 적리공주가 성아산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옥황상제는 성지를 내려 적리공주에게 황해 용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몇 년 동안 정이 든 인삼요정과 적리공주는 서로 떨어질 수가 없어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옥황상제의 명령인지라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적리공주는 성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면서 당부했다. “성아야. 매년 여름마다 널 보러 올 테니 아빠 말씀 잘 듣고 잘 자라야 한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갈매기로 변해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적리공주와의 달콤한 사랑을 추억하기 위해 인삼요정은 이 산의 성곽을 적리성이라 고쳤다.

그 후 해마다 여름이면 약속대로 적리공주는 갈매기로 변해 이곳으로 날아와 가족과 상봉했다. 지금도 바다에 잇닿은 적리성 쪽에는 수많은 갈매기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는데 이는 적리공주가 데리고 온 갈매기들이라고 한다.

장광섭/중국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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