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해 합계마을 마을 설도 있습니다. 맨 아래 참고.
합포해전
팬저 2007/03/09 17:20
합포해전
전략적 요충지인 합포가 임진왜란 때라고 제외될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대부분 마산 사람들도 여기 마산 앞바다에서까지 왜군들과의 해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임진년 5월 7일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가 임진왜란 발발후 거제도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바로 그날 밤이다. 거제장목 앞바다에서 밤을 새울 채비를 하던 중 적의 대형함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에 우리 경상 · 전라연합함대가 출동해 전력으로 추격하기 시작하니 이것이 '합포해전'의 시작이었다. 쫓기던 적함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다 합포만에 이르자 급한 나머지 배를 버리고 지금의 산호동 숲속에 상륙, 바다를 향해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연합함대는 사정거리 밖에서 적정을 살피다 기습적으로 다시 포구 안으로 쳐들어가 적선들을 파괴, 불태우니 임란이후 두 번째 승리가 합포해전인 셈이다. 비록 큰 해전은 아니었지만 파죽지세로 밀리기만 하던 육상전투에서의 패배감을 반전, 승기를 잡은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수 있는 전투였다.
정유재란 때도 마산에 왜군들이 상륙, 진지를 구축하는데 산호공원이 있는 용마산 일대에 성을 쌓고 지구전을 펼쳤던 것이다. 지금도 정상 부근에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때 쌓은 것이 마산왜성이다. 한편 7년동안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이 지역 병사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도와 함께 싸운 민관군중 한 사람도 왜놈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음을 안 체찰사 이원익이 선조께 장계를 올린다. 이에 선조 31년 창원도호부를 대도호부로 승격하여 이 고장 사람들의 자주성과 꿋꿋한 기상을 높이사는데 마산엔 이런 자랑스런 전통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의병장 최강의 안민고개 전투
선조 26년(1593년)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 일부가 함안군에 있는 백성들의 곡물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전라병사 선거이(全羅兵使 宣居怡)는 적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리어 대패하고 兵使는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고성에 있던 의병장 최강은 이 소식을 듣고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중에 안민고개에서 왜군과 조우하여 적의 포위망에 빠졌으나 오히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종횡무진 적을 쳐부수고 그 틈을 노려서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리하여 마산권에서 만행을 거듭하던 왜군에게 예기치 않는 일격을 가하였으며 이 때의 전공으로 최강은 가리포청사(加里浦僉使)에 발탁되었으며 뒤에는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에까지 역임하였다
내용출처: 마산시
첫번째 전투 옥포해전에 이어 계속 이어지는 글
2) 전투 상황
김완 - 대선 1척
이순신 - 대선 1척
어영담 - 대선 1척
방답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 - 소선 1척
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김효성,이설 - 대선 1척
3) 전투 후
밤에 창원 남포에 도착 진을 침
하오 4시경... 멀지 않은 바다에..
왜의 큰 배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쫒아서 웅천 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니..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므로
사도첨사 김완이 큰 배 1척..
광양현감 어영담이 큰 배 1척..
그 부통 소속으로 방답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는 왜의 작은 배 1척..
신의 군관 봉사 변존서..송희립..김효성..이설 등이 힘을 합해.. 활을 쏘아 왜의 큰 배 1척을
남김없이 깨뜨려.. 불태우고...
밤을 타고.. 노를 재촉하여... 창원 땅 남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이민웅님의 <임진왜란 해전사> 81쪽을 보면
그런데 이봉수의 <이순신이 싸운 바다> 36쪽에는
"최근 합포해전을 치렀던 장소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으나 합포해전을 치렀던 곳은 마산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금의 산호공원, 즉 용마산 아래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작성한 가장 정밀한 지도인 동여도에 합포는 마산포,월영대와 함께 뚜렷이 표기되어 있으며 마산 이외의 근처 어디에도 합포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의 진해 근처에는 원포라는 지명이 있었을 뿐 합포는 없었다. 근자에 진해 인근에 학개(鶴浦)라는 지명이 등장했지만 조선시대의 合浦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다. 합포는 임진왜란 당시 창원땅 마산포라고도 했던 곳이다." 라고 기술한다.
위 두 주장을 놓고 좀 더 검토해보자.
동여도를 좀 더 자세히 보면 마산포와 합포는 병기되어있고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데에도 창원땅 합포라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마산 근처에는 월영대, 두척산(무학산), 반룡산 등과 함께 합포와 마산포가 같이 나온다. 동여도 상에 현재의 진해 근처에는 장복산, 안민령(안민고개), 원포, 풍덕포,하서 등이 있었고 합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현재에도 진해에는 합포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20054년판 진해시 행정지도에는 진해시 풍호동 수치 인근에 학개(鶴浦)가 있을 뿐 합개(合浦)는 보이지 않는다. 상항론적으로 오후 네시에 추격하여 해질녁에 거제도 북단에서 현제의 마산까지 갈 수 없다고 했으나 합포해전이 있었던 날은 양력으로 6월16일로 하지와 가까워 저녁 8시경까지는 해가 있었다.
그리고 여름철이라 순풍인 남풍이 불었으므로 돛을 두개식 다는 조선함선은 노를 함께 저을 경우 2`3시간이면 마산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상 글 출처 이순신이 싸운바다/이봉수
합포해전에 관련된 여러가지 지명에 관련되어서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창원땅 합포라는 것과 이순신 함대가 합포해전을 치루고 진해땅 남포에서 숙영하는것 때문일 것이다.
▲ 현재의 지도를 가지고 설명을 해봅니다. 이순신함대는 거제시 장목면 영등포에서 출발을 하여 합포해전을 치루고 창원땅 난포에서 숙영을 하고 다음날 고리량을 수색하다가 적진포에 왜선을 격파시킵니다. 일단 전투가 밤 늦게까지 치루어졌고 합포에서 가까운 난포(지금은 남포)에서 숙영을 하는것 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지도 죄측에 진해현이 보일 것입니다. 당연히 남포는 진해현 관할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창원땅은 지금의 창원과 동일하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또 남포에서 고리량까지는 현재 차로 10분에서15분 정도 소요가 됩니다. (직선거리정도 됩니다,) 하지만 뱃길로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죠. 빨강색으로 나타낸 길이 이순신함대가 왜선을 쫓아간 것이고 녹색선이 철수하여 숙영하기 까지이고 파란선은 다음날 출발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 위의 지도는 현재의 지명과 임진왜란때 사용한 지명을 한꺼번에 표시한 것입니다. 가장 위에 있는 동여도와 비교하면 빠를 것 같네요. 창원땅은 지금 현재 소답동 창원의 서북쪽 외각지역이고 진해땅은 마산 서쪽이 되겠죠. 지도상에는 제가 잘못 표현하였는데요, 현 마산시청과 용마산지역은 그때 당시 웅천 관할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웅천은 지도상에 표시된 진해시청에서 좌측으로 가면 있습니다.
이봉수씨가 만약 현재 마산시 진동면사무소만 한번 가보았다면 자신의 주장이 확실히 100% 맞을거라는 것을 아실 것인데 아까운 마음이 든다.
▼ 아래사진 3장은 마산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위의 사진은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기전의 마산모습입니다. 3번지역이 지금현재 삼성중공업지역이고 멀리 현재 창원시의 모습입니다.
▲ 위의 사진은 마산수출자유지역 조성 당시의 모습입니다. 멀리 두척산(무학산)이 보이고 중간쯤 용마산이 보입니다.
▲ 위의 것은 매립하기전의 모습을 포토샵에서 변경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용마산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른 방향에서 합포해전을 포토샵에서 표현 해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합포해전은 현재 마산시에서 벌어진 전투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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