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4342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
시위대 숨겨주고, 헌혈 앞장 섰지만 역사에 남지 못한 사람들... '황금동 여성들' 재조명해야
18.05.18 09:47 l 최종 업데이트 18.05.18 10:22 l 글: 정미경(kjmk) 편집: 김예지(jeor23)
▲ 518 당시 광주 여성들의 모습.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5.18기념재단
"내 몸은 더러워도 내 피는 깨끗해. 어서 내 피도 뽑아달란 말이야!"
80년 5월 광주의 대형병원 헌혈 장비 앞에서 자신들도 헌혈할 수 있게 해달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는 넘쳐나는 부상자들로 피가 모자랐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특수한 직업의 사람들 피는 헌혈에 부적합하다는 분위기가 일부 형성돼 있었다. 그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내 몸은 더러워도 내 피는 깨끗해!' 절규했다. 그들은 헌혈 줄에 늘어선 여느 시민들처럼 죽어가는 부상자들에게 피 한 방울이라도 보태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그 봄에 시내 전역에서 그들을 자주 목격했다. 그들은 항상 무리 지어 다녔다. 단체로 주먹밥과 물, 음식을 지어 나르며 시민군 취사를 돕는 등 격렬한 현장마다 어김없이 출몰했다. 속출하는 부상자들로 피가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팔을 걷고 헌혈 행렬 맨 앞줄로 섰다. 그런데 자신들의 피를 꺼림칙해 하는 현장 분위기에 그들은 좌절했다. 사람들은 그들 피의 청결을 의심했다.
사람들은 알았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그들은 도시의 음지에서 긴 세월 숨죽여 움츠렸다가 그해 봄 혁명의 기운을 받아 양지로 솟아난 5월의 꽃이었다. 그들 스스로 신분을 밝힌 적 없지만 사람들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계엄군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과격한 언행과 자유분방함 그리고 무엇보다 외모에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로 어렵지 않게 그들이 '그곳' 출신임을 식별했다. 그들은 모두 젊은 여성들로, 동종업종 종사자들이었다.
80년 무렵 광주 시내 중심가 한 구역에는 대규모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황금동 콜 박스거리'라고 불렀다. 그곳은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도시의 치부였다. '황금동 콜 박스'라는 지명은 도시가 애써 존재를 부정하는 금단의 구역이었고 '황금동 콜 박스여자'들은 불결하고 두려운 여성들로 도외시되었다. 그럼에도 '황금동 콜 박스' 유흥지대는 넘치는 공급에 상응하는 은밀한 수요가 받쳐주어 도심 한복판에서 꾸준히 성업 중이었다. 퇴폐와 환락의 상징 '황금동'은 민주주의와 저항의 메카 '금남로'와 지척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금동 콜 박스' 거리의 직업여성들은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군단의 하나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들은 무리 지어 행동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둔감했다. 남성들에 대한 경계심도 허술했다. 총검을 장착한 계엄군들도 하찮게 여겨 면전에서 욕설을 퍼붓는 등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총은 지급되지 않았다. 시민군들이 총으로 싸울 때 무기가 없는 그녀들은 짱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에게는 '정체불명의 악질 여자들'이었지만 시민군들에게는 주먹밥과 음식, 군자금을 보급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다정한 누이들이었다.
밤거리 홍등 아래서 웃음을 팔던 여자들이 한낮 광장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푸고 물을 길어 날랐다. 악착같이 짱돌을 깨 모으고 시민들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개체로서 그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면치 못하는 화류계 여성이었지만 단체로 광장에 대열을 이루니 마치 아마조네스 여인들처럼 강철대오를 자랑하는 여성 전사들로 부상했다. 낯설고 신기한 시내 직업여성들의 대대적인 시위 동참은 아연 시민들의 전의와 투지를 추동했다.
그녀들의 집단 행동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앞선 행동으로 인한 신분 노출 위험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시위대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분담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도 그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동등한 광주시민으로 대우하기에 이르렀다. '불결하고 불경스러운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다가, 평범한 '인간'으로 드디어 신분이 상승됐다.
쫓기는 군중에게 열려있던 황금동, 그 '따뜻한 음지'
▲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기획시대㈜
'황금동' 여성들은 5.18민중항쟁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구체적이고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황금동' 일대는 유흥업소가 주류인 번화가로 금남로, 도청과 인접한 곳이었다. 일반상가와 비교되는, 호객에 용이한 개방적인 구조의 가게들이 경쟁하듯 다닥다닥 밀집해 있었다.
비슷한 모양에 복잡한 구조의 상가 지형은 계엄군들에게 쫓기는 시민들에게는 최적의 피난처였다. 상품을 진열, 판매하는 일반 상가건물과는 다른 유흥업소 특유의 내부 구조도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은신에 유리하고 시위 격전지 금남로와 가깝다는 지정학적 특징 외에 시위군중이 황금동 골목을 도주 경로로 택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금동 여성들은 항쟁 전, 후에도 부담스러운 시위 군중을 결코 내치는 법이 없었다. 금남로와 도청 앞 광장에서 전개된 시위와 집회의 뒤끝은 항상 백골단과 시위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확전되곤 했다. 경찰, 백골단에게 쫓겨 충장로 지나 황금동까지 도망쳐온 학생이나 시민들에게 이 여성들은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영업상의 불이익과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람들을 적극 숨겨주고 보호했다. 그런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5.18의 시위군중 역시 본능적으로 황금동 골목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 기간동안 실로 많은 시위군중이 그녀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계엄군들은 사적인 영업 장소에 함부로 들이닥쳐 범인 은닉의 혐의가 짙은 업소 여성들을 상대로 살벌한 추궁과 수색을 벌였다. 황금동 여성들은 계엄군들에게는 폭도들을 고질적으로 숨겨주는 공범자로 이미 찍힌 상태였다. 남성들을 상대하는 직업여성인 그녀들은 계엄군들을 따돌리는 데 탁월한 전략가들이었다. 침착하고 태연하게 기지와 지략을 발휘하여 계엄군들의 살벌한 추격을 무력화시키곤 했다.
영업 근무 복장인 한복치마 안에 사람을 감싼 채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앉아 능청스럽게 계엄군을 상대했다는 일화는 시민들의 경험담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한복치마 안에 사람을 숨기고 앉아서 딴청을 피우는 것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임기응변이었다. 그만큼 시위 군중을 숨겨주는 일이 그녀들로서도 위험과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황금동 여성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시민들의 다양한 무용담은 두려움과 공포로 기억되는 80년 5월의 풍경을 드물게 감동과 스릴로 회상할 수 있는 무궁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당시 그녀들의 치마폭이란 취객들을 홀리는 변장이 아닌 수많은 생명을 소생시킨 천사의 날개였다. 도시의 따뜻한 음지 '황금동'은 그녀들이 있어 혁명의 꿈과 희망이 물결치는 황금빛 골짜기였다.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최하위계층 여성들이 민주주의 투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정황이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믿기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80년 광주는 상식과 통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별천지였다. 거리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성판매 여성들까지 평범한 시민들과 공평하게 세상의 주인 노릇이 가능했던, 완벽한 대동 세상이었다. 그 중 황금동 여성들은 단연 시민들의 주의를 끌었다.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황금동에서, 병원헌혈대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들의 강렬한 모습은 시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을 특정한 5월 관련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수록한 자료 문서, 영상, 사진 어디에도 그들에 관한 제대로된 기록은 없다. 취사봉사대 양동시장 대인시장 상인들, 산수동 광천동 지산동 학동 주민들, 전남대학교 학생들, 시민군, 여성가두방송원들, 차량경적시위대 택시운전사들, 기름을 무상으로 제공한 주유소업주 등 구역별, 성별, 역할별로 분류된 어느 단체명에도 그녀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다.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이라는 항쟁 일원으로서의 고유명칭 하나 얻지 못한 채 기록에서 소외되었다.
'황금동 여성들'의 '대단했던' 에피소드들은 시민들 사이에 가끔 전설처럼 회자될 뿐 정통역사의 한 페이지도 할애받지 못한 채 야사로 밀려나 버렸다. 80년 당시 그들을 불결한 병균의 보균자로 단정 짓고 헌혈 대상에서 걸렀던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이 3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경직된 역사 관념과 무관심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제가 당시 그분들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부상 치료받고 나오니 옷하고 신발을 구해다 저에게 입혀주더군요. 옷은 다 찢기고 신발도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었거든요. 근데 그분들이 알아서, 헌옷이긴 하지만, 옷하고 신발을 챙겨줬습니다."
한광진 5.18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그는 당시 부상, 치료과정에 황금동 여성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모면했다고 회상했다. 옷과 신발을 챙겨주고 길 안내를 해주는 그 여성들이 '황금동 여성들'이라는 건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선 그분들이 저에게, 어느 길로 가면 계엄군이 있으니 피해서 가라며 안내를 해 줬습니다. 그분들이 길을 일러주는 바람에 계엄군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분들을 찾느라고 황금동을 다 뒤졌어요. 근데 못 찾았죠."
"선생님께서 나중에 황금동을 찾아가셨다고요?"
"네. 그분들 덕분에 제가 목숨을 구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당시 그분들이 안전한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계엄군에게 큰일을 당했을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맙다는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못 찾았습니다. 집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황금동을 다 뒤졌는데도 끝내 그분들을 못 찾고 말았습니다."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황금동 여성들을 비롯한 넝마주이, 구두닦이, 거지 등 무연고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부채감을 안고 산다. 그들은 모두 하층민들로 뚜렷한 연고가 없다는 점 때문에 희생자 집계에도 대부분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
5.18민중항쟁 기록물 보존 작업에 많은 시민이 직접 참여했다. 후세에 올바른 5.18을 고증하기 위한 시민들의 정성이 문서, 영상인터뷰, 육성, 사진 기부 등 다양한 형태로 취합되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겪은 생생한 5.18 경험담을 귀중한 사료로 제공했다. 그 덕분에 현재 5.18광주민중항쟁은 방대한 양질의 자료를 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에 관한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의 존재를 언급하는 간접 증언 한 줄조차 찾기 힘들다.
황금동 여성들의 5.18 참여는 역사에서 공백 상태로 배제되었다. 38년 세월, 80년 5월의 명예와 영광, 아픔을 공유하는 후일담 안에서도 그녀들은 철저히 침묵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지금 우리는 사회 의식이 꽤 성숙한 것처럼 위시해도 과거 화류계 종사자의 커밍아웃 행위를 편견 없이 받아들일 만큼 너그럽진 않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그 시절의 유흥업소 경력 누설이 전제되는 경험담을 1인칭 고백으로 기대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자료 수집 방식의 한계에 갇혀 황금동 여성들의 5.18 참전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광주시민들의 기억에서만 맴돌 뿐 대외적 공신력을 전혀 얻지 못한 채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함께 존재했으나, 잊혀진 여성들... '야사'로 떠도는 기억
▲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기획시대㈜
'황금동 콜 박스 여성' 경우처럼 화류계 여성들이 불의에 항거하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집단차원의 저항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다. 그만큼 황금동 여성들의 에피소드들의 감동 지점은 영화보다 극적이고 소설보다 감동적이며 상상보다 허구적이다.
또 다른 시민 정경숙(여, 53세)씨는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그는 중학생으로 집이 역시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동명동'이었다. 주민들이 단체로 시민들 물을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물이랑 밥 지어서 날라주고 와서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는 거예요.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로 열심히 한다고. 음식도,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이라고."
그는 어릴 적 친구들이 황금동 주택가에 살아 자주 놀러 가곤 했다고 한다.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말 듣고 신기했어요. 황금동 여자들이 열심히 한다는 거요. 어릴 때 황금동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그 앞을 자주 지났거든요. 친구 집 갈 때마다 무서워서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여자들이 음식하고 물 나르고 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됐어요. 그분들이 헌혈도 제일 많이 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죠."
그러면서 그는 황금동 여성들이 5.18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세한 원인을 금남로와 가까운 환경 탓으로 확신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금남로하고 가깝다 보니 주민들이 똘똘 뭉쳐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고 남자들도 많이 나갔어요. 오죽하면, 그 후에 우리 동네는 5월에 제사가 한꺼번에 몰린 동네가 되 버렸어요. 그만큼, 시내 가까운 영향이 컸죠. 그런데 황금동은 어땠겠어요. 금남로랑 딱 붙어 있잖아요."
지금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정씨는 타지에서 가끔 5.18 경험을 말할 때라도 황금동 여성들 이야기는 잘 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처음, 사람들이 황금동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믿으려 하지 않고 되레 꾸며낸 이야기 대하듯 하곤 했던 경험 때문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5.18항쟁 참전 의미를 혹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의 일시적 호기심이나 분위기에 휩쓸린 순간적 돌출 행동으로 폄하한다면 그것은 5.18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이다.
그들이 계엄군진영을 향해 극렬한 저항을 드러내고 시민군들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조달하고 헌혈 침상 위에 가장 먼저 팔을 걷고 눕고 시위 군중을 적극적으로 숨겨주었던 행위 어느 것 하나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는 자신들의 도시공동체와 시민들을 향한 강한 애정과 연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갖춰지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모험이었다. 5월 항쟁에서 보여준 그녀들의 용기와 헌신은 그들이 이 사태의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들도 여느 광주시민들처럼 깨달았던 것이다. 이 상황이 광주라는 문제 도시를 게토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과 명분을 편취하기 위한 정치군인들의 사악한 음모하는 것을. '전두환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단순 유언비어만이 아닐 수 있음을 무자비한 계엄군들의 만행은 증명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나와 가족, 이웃, 도시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자구책으로 총을 들어야 했다. 남자들은 총을 들었고 총이 없는 여자들은 후방에서 지원했다. 모든 시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항전태세로 전환한 상황에 유흥업소 직업 여성들의 출현이라고 하등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이었다.
더구나 당시 그들이 몸담고 있는 황금동 일대는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시국 관련 집회와 시위가 발발하던 민주화의 성지 '금남로' 생활권에 속해있었다. 거리에 살포되는 유인물과 벽에 나붙는 대자보가 시선을 붙잡는다. 데모꾼들의 구호와 함성, 민중가요가 귀를 자극한다. 최루향기마저 내성이 생긴다.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피 흘리며 끌려가는 사람들을 모습을 일상으로 목격한다. 민중가요 몇 소절쯤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매일같이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그 모든 시위 친화적인(?) 환경이 그들의 일터였다. 그녀들의 직업 환경이야말로 의식화 교육의 불온한 현장 학습장이었던 셈이다. 간접적인 학습효과와 의협심 강한 그들의 기질이 만나 5.18항쟁에서 그 숨겨진 투지와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됐던 것이리라. 그녀들은 어차피 80년 5월의 여인이 될 운명이었다.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채 계엄군의 총검 앞에 던져진 광주의 공포와 외로움은 곧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짓밟히는 직업여성인 자신들의 처지와 동격이었다. 계엄군에 맞서 도시는 계급과 차별이 타파되고 빈부귀천이 무의미해졌다. 시민들은 무상으로 물자와 식량을 나누었고 그래서 도둑들도 거지들도 부정한 활동을 접었다. 세상과 단절된 도시는 스스로 해방구를 선포하고 위대한 자치공동체를 구현했다.
그런 황홀한 세상이야말로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운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에게는 꿈같은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거친 밑바닥 인생을 헤치며 단련된 무모함과 대범함을 무기로 신명 나게 싸웠다. 난생처음 밝은 광장에서 일반 사람들과 같이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고 음식을 나누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편견 어린 시선을 받지 않고 민주시민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광주는 80년 5월 황금동 여성들에게 빚을 졌다
'황금동 콜 박스 여자들'이라는 세간의 호칭은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말해준다. 광주민중항쟁의 주역 '황금동 주민'인 자연인집단으로 존칭되어야 한다. 그것이 38년 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다. 대외적으로 백지상태인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광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존중받아 마땅할 의인들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와 존중에서 배제된다면 자유, 평등, 인권, 정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표방했던 5월 정신에도 배치된다. 그해 봄, 이 도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도덕적 의무는 이 여성들에 의해 역으로 실현되었다. 광주는 80년 5월의 황금동 여성들에게 빚졌다.
현재 황금동 일원은 대대적인 도심 정비 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최신 유행과 세련된 문화의 거리로 일신하여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핵심 번화가로 변모했다. 그 옛날 직업여성들의 호객행위와 폭력배들의 무질서가 난무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지금 그 거리의 활기찬 자유와 세련된 문화를 만끽하는 젊은 세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 그곳에서 자신들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반강제로 억류된 채 웃음을 팔아야 했던 슬픈 사연을. 그럼에도 그곳은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전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적들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을 지켜낸 혁명의 사적지라는 사실을.
황금동에선 혁명의 꿈과 낭만이 황금처럼 물결쳤다. 그렇게 어느 해 봄 황금동 지명에 얽힌 유래는 전설이 되었다. 80년 5월 황금동의 여성들은 봄날의 광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혁명의 꽃이었다. 38년 동안의 잠복기는 증명한다. 그들은 타락, 퇴폐, 문란, 무질서를 퍼뜨리는 무서운 보균자가 아니었다. 자유, 민주, 정의, 사랑, 연민 등의 강력한 항체를 지닌, 그들의 피는 뜨겁고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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