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9194.html?_fr=mt2
등돌린 강남 보수 “이번엔 한국당 도저히 못찍겠더라”
등록 :2018-06-15 05:00 수정 :2018-06-15 06:07
[현장 민심을 듣다-서울 강남구]
문 대통령과 대북 정책에 지지가 주요 원인
“내 아이가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길 바라”
품격 없는 홍 대표 막말로 한국당에 등 돌려
전임 강남구청장의 비리에 대한 반감도 커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역 네거리에 정순균 강남구청장 당선자의 당선사례가 적힌 펼침막이 나부끼고 있다. 정 당선자는 1995년 민선자치가 시작된 지 23년 만에 자유한국당 계열의 보수정당이 아닌 민주당 소속 첫 강남구청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잔뜩 흐린 하늘 아래로 건물은 높이 솟아 있었고, 무덥고 습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리 위로 사람들은 분주히 오갔다. 14일 오후, 서울 지하철 7호선 강남구청역 인근의 풍경은 여느 때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일대 주민들이 하루 전 보여준 변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듯했다.
강남구에 살고 있는 직장인 김보성(42)씨는 오랜 자유한국당 지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구청장으로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정순균 후보를 찍었다. 정 당선자는 민선 자치가 시행된 1995년 이후 처음으로 보수정당이 아닌 민주당 소속으로 강남구청장이 됐다. 김씨는 시장 선거도 같은 당 소속인 박원순 후보에게 투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잘하니까요.” 그의 이유는 짧고도 분명했다. 그는 4월과 5월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 12일 열린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정부와 여당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약이나 정책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내 아이만큼은 전쟁 위협이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고 그는 말했다.
이날 강남구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분주히 걸음을 옮기던 대학생 이철민(30)씨도 이번 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을 찍지 않았다”고 말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강남에서만 살았다는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밝혔다. “예전 같았으면 한국당을 찍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못 찍겠더라고요.” 그는 그 이유로 자유한국당의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꼽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겪고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막말’만 일삼는 모습을 보면서 찍어줄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씨는 특히 홍준표 한국당 대표의 ‘막말’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홍 대표의 입에서 그동안 쏟아져 나온 말들은 보수적인 내가 듣기에도 오만함을 넘어 유치하고 품격이 없었다.” 한국당은 이제 보수적인 유권자들도 표를 주기 민망한 정당으로 전락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전임 자유한국당 소속 구청장의 비리와 부패가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신연희 전 구청장은 각 부서에 지급해야 할 공금인 격려금과 포상금으로 화장품을 사고 친인척을 관계기관에 부당하게 취업시킨 혐의로 지난 3월 구속기소됐다. 대학에서 근무하는 임미연(49)씨는 “이곳은 보수 지지세가 워낙 강고해서 보수 정당이 공천만 하면 당선되던 곳인데, 전임 구청장이 워낙 실망스러운 태도를 많이 보였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강남 주민들이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남구청역 근처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김아무개(42)씨는 “강남구 주민 입장에서는 당장 재산 문제가 걸린 재건축을 구청장이 해결해줘야 하는데, 전임 구청장 시절은 정부·서울시와 싸우기만 했다. 주민들의 속이 탔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여당 구청장이라면 현 정부의 정책과 강남구민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것’이란 주민들의 기대가 투표에 반영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한겨레>와 만난 정순균 당선자도 비슷한 설명을 내놨다. 그는 “선거운동을 하며 주민들을 만나보니, 타협 없이 중앙정부, 서울시와 싸우기만 하는 전임 구청장에 대한 민심이 워낙 좋지 않았다”며 “유권자들은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구청장을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북관계가 개선될수록 지역의 분위기가 좋아졌다”며 “남북관계 개선에 기뻐하는 것은 보수적인 강남 주민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사실, 강남의 변화는 오래전부터 감지됐다. 이른바 전통적인 ‘보수 텃밭’ 지역이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인 전현희 의원이 강남을에서 당선된 데 이어, 지난해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홍준표 한국당 대표와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를 따돌리고 강남에서 득표율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지자인 임씨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정책 등에서 확실히 전임 대통령보다 잘한다는 의견이 많다”며 “강남 주민 가운데 최근 들어 민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사람들을 생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다만, 강남 민심이 한국당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직장인 안아무개(37)씨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견제와 균형이 중요한데, (민주당이 석권한) 이번 선거 결과를 보고 지방행정부에 대한 견제·감시가 이뤄질지 의문이 들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한국당이 제대로 쇄신한다면 유권자들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김아무개(44)씨도 “이번 선거를 통해 보수 야당을 심판한 국민들의 뜻을 한국당이 읽고 새롭게 탈바꿈한다면, 2년 뒤 총선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충분히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러나 “한국당이 또다시 분열하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영남 지역 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민주당의 강남 승리 요인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성과를 꼽았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선거 전날 이뤄진 북-미 정상회담 등에 따른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기대감이 정부·여당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유권자들이 민주당 후보를 보고 표를 줬다기보다는 대통령에게 투표한 측면이 크다”며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기대가 투표에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하거나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정부의 발목 잡기에만 몰두하면서 지지층 이탈을 부채질했다는 풀이도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는 “자유한국당이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는 유권자의 민심을 읽지 못하고 수구적인 모습만 보여줌으로써, 중도층은 물론 보수 유권자들까지 등을 돌렸다”고 분석했다.
섣부른 기대감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강남구청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은 경쟁관계에 있는 자유한국당의 몰락에 따른 결과"라며 "강남 일부 유권자의 정치적 지형이 바뀌었을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강남의 성향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재우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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