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29043014849
검사가 받아낸 자백, 8월부턴 증거로 못쓴다
이정현 기자 입력 2020.05.29. 04:30
[기획]검찰수사의 명암 : 검사가 받아낸 자백(종합)
[단독]靑 '검찰서 했던 증언, 증거 능력 제한' 8월 시행…檢 '당혹'
청와대가 지난해 검경 수사권 조정의 결과물 중 하나인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을 4년의 유예기간 없이 오는 8월부터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당초 형사 재판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유예기간이 필요하단 입장이던 법원행정처가 즉시 시행으로 입장을 바꾸면서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진술 조서의 증거 능력이 당장 사라지게 되면서 유예 기간 중 이를 대체할 방안을 찾으려던 검찰의 반발이 예상된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주도하는 '국민을 위한 수사권개혁 후속 추진단'에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에 유예기간을 둘 필요없이 즉시 시행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은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검찰개혁의 핵심 사안으로 검찰 수사권의 가장 강력한 권한 중 하나로 지적돼왔다. 법원행정처는 김영식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통해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수사권조정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만 하더라도 법원은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즉시 시행은 어렵고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국회는 관련 법을 통과시키면서 4년의 준비기간을 갖는 것으로 의견을 정리했지만, 법원이 최근 이같은 입장을 뒤집고 바로 시행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추진단 회의에 전문위원을 보내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아직 회의가 진행 중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드리긴 어렵다"고 말했다.
추진단은 법원의 이같은 의견을 바탕으로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을 오는 8월부터 즉시 시행한다는 방침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권조정 관련 법안들이 지난 2월4일 공포됨에 따라 이르면 8월5일부터 시행할 수 있다.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은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검경 수사권조정 관련 개정 법안에 포함된 내용이다. 검찰이 작성한 피의자 진술조서도 경찰이 작성한 진술조서와 마찬가지로 증거능력이 제한된다는 게 요지다.
그동안 경찰 등 타 수사기관과는 다르게 검찰이 작성한 조서는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을 부인해도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조서 내용이 그대로 인정됐다.
하지만 개정 법안이 시항되면 피고인이 법정에서 검찰 조사 당시 진술한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증거능력 자체가 부인돼 아예 증거로 사용할 수가 없다. 이를 그동안 논의됐던 4년의 유예기간 없이 바로 시행하게 되는 셈이다. 법조계에서는 8월 시행이 관철될 경우 현재 진행 중인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재판이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재판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검찰이 공판 과정에서 조 전 장관이나 유 전 부시장의 혐의를 입증하는데 좀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검 관계자는 "n번방 사건 같은 조직범죄나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경제범죄 등 다수가 관여하는 범죄의 경우 피의자 신문을 통해 상호 공모 관계를 규명하게 되는데, 제도 보완없이 시행하는 경우 조직 범죄 유죄 판결이 어려워져 국가의 범죄 대응 역량에 심각한 공백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논란이 불거지자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입장은 검찰조서 증거능력 인정 요건이 변경되더라도 실무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라면서 "작년 입법과정에서도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조국·유재수 뇌물죄 혐의 적용 어려워진다?
검찰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이 유예기간 없이 오는 8월부터 즉시 시행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피의자들의 진술이 유죄판결에 결정적이었던 부패 사건 등에서 사법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28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재임 시절 기자간담회에서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과 관련, "증거 능력에 관해서는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적법성도 중요하다. 제도를 바꿀 때 오는 공백이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보완제도도 필요하다"며 우려의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부분은 뇌물죄나 조직범죄처럼 객관적 증거를 찾기 힘든 범죄 수사다. 뇌물죄의 경우 은밀히 이뤄지기 때문에 계좌 내역이나 돈가방 등 객관적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또 몰래 전달되기 때문에 CC(폐쇄회로) TV에도 잘 찍히지 않고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진술이 있을 뿐이다. 조직범죄의 경우에도 조직 내 의사소통이나 권력구조는 주로 피의자 진술로써 파악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지난 22일 뇌물 등 혐의로 징역4년을 선고받은 이동호 전 고등군사법원장의 판결이 이를 잘 보여준다. 법원은 함께 기소된 뇌물 제공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지만 검찰조서를 그대로 인정했다. 제공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얼마를 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등 조서 내용을 일부 부인했으나 법원은 당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조서 내용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보다 앞서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뇌물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은 피의자들의 진술을 중심으로 범죄상황을 재구성해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유 전 부시장의 뇌물 혐의를 인정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8월부터 검찰조서의 증거능력이 제한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1심에서 증거로 채택됐던 검찰조서가 증거 목록에도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신빙성을 따져볼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오는 8월부터 검찰조서 증거능력이 제한되면 이 전 법원장과 유 전 부시장은 항소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다. 법조계에선 현재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재판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란 의견이 나온다.
조직범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일명 'n번방' 사건 관련해서도 검찰은 조주빈 일당에게 범죄단체조직죄 적용을 검토 중이다. 범죄단체조직죄는 범죄자들이 단순 공범이 아니라 일정한 보고·명령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입증해야 적용이 가능하다. 검찰은 현재 검거된 피의자들의 진술을 통해 범죄단체를 구성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조서 증거능력이 제한되면 이같은 방식으로는 더이상 법원으로부터 범죄단체로 인정받는 게 불가능해진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을 부인하고 그런 적 없다고 하면 그만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검찰 입장에서는 조직 계보도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대화, 문자메시지 등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는데 조직범죄처럼 은밀히 이뤄지는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법조계에서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 문제가 형사재판에 큰 변화를 가져올 사안인데 너무 성급히 추진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특히 처음에는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법원이 별다른 사정변경 없이 즉시 시행이 가능하다고 입장을 바꾼 것도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검찰조서 증거능력을 대체할 대안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문 전 총장 재임 시절 대검찰청은 검찰조서 증거능력 제한에 대비해 서면조사 방식을 탈피하자는 차원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한 예로 일선청에 영상녹화 등 다양한 조사기법을 이용해 보라고 권고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검찰진술만 있다"…'한명숙 사건'에서도 논란된 '검찰조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한명숙의 2차 및 3차 정치자금 수수(각각 3억원씩 모두 6억원)에 관한 공소사실 부분에 대하여는 이에 부합하는 듯한 유일한 직접적인 증거로 이를 제공하였다는 한만호의 검찰 진술만이 있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자료 등 객관적 물증이 없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유죄 취지의 결론을 내렸지만 이들 중 5명(이인복·이상훈·김용덕·박보영·김소영 대법관)은 일부 무죄취지로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 대법관이 지적한 부분은 바로 유일한 증거로 제출된 '검찰 조서'의 문제점이다.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으나 법정에선 이를 뒤집어 돈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1심에선 무죄, 2심에선 유죄로 판결이 엇갈린 상태였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한씨의 법정 진술보다 검찰에서 진술했다고 작성된 '검찰 조서'를 보다 신빙성있는 증거로 판단해 유죄 취지로 판단을 했지만 5명의 대법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이 사건은 한만호가 허위나 과장 진술을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일단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자 이를 기화로 검사가 한만호의 진실이 번복되지 않도록 부적절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사안"이라며 "한만호의 검찰 진술이 과연 진실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즉 '검찰 조서'가 검찰의 수사 방향에 맞춰 허위로 작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최근 여권에선 한씨의 비망록을 근거로 검찰이 한 전 총리를 유죄로 몰아가기 위해 무리한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진술 조서를 증거 능력을 인정받는 '특권'을 누리면서 진술 조서에 의존하는 잘못된 수사 관행을 답습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제한이 검찰개혁의 핵심 내용으로 추진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유죄를 시인하도록 진술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회유와 협박, 별건 수사 등을 동원해 인권 침해 수사를 자행해 왔다는 지적에서다.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로 비정상적인 검찰권 남용을 초래한 원인으로도 꼽혀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해 말 검경수사권 조정안 통과를 앞두고 국회의장에게 검사가 작성한 피신조서 증거능력 인정요건을 강화해 검사가 작성한 피신조서와 경찰 등 검사 이외의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신조서의 증거능력 인정요건 간 차이가 없도록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의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검사의 피신조서가 원칙적으로 증거능력이 인정되기 어렵다는 점 △밀실에서 자백 진술 확보 중심의 수사를 유도해 인권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피의자의 방어권 행사에 구조적으로 불리한 작용을 하는 점 △공판중심주의를 약화시키는 점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입법례를 찾기 어려운 점 △사법부와 법무부, 시민단체 등도 증거능력 인정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공감하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정현 기자 goronie@, 김태은 기자 tai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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