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0485


정조가 '최애'한 독특한 그림 장르, 빠져든다

[서평] 책으로 나온 KBS 교양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

18.07.07 11:43 l 최종 업데이트 18.07.07 11:43 l 글: 김현자(ananhj) 편집: 최은경(nuri78)


▲  <천상의 컬렉션> 책표지. ⓒ 인플루엔셜


'시청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그래서 '오래 오래 방송되었으면 좋겠다'와 같은 바람까지 갖고 보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KBS <천상의 컬렉션>도 그런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다. 흠뻑 빠져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문화재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이다. 


십여 년 전, 한 교육프로그램 회사와 1년 가량 문화재 DB작업을 하게 됐다.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한 일이라 관련 공부를 해야만 했는데, 일로 끝나지 않고 문화재와 역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틈나는 대로 관련 책을 찾아 읽곤 하지만, 막연한 목마름은 여전하다. 그러니 <천상의 컬렉션>이 반가울 수밖에. 문화재 관련 프로그램은 KBS <진품명품> 빼고 특별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방송에서 그리 다루지 않는 소재라 더욱 더 그랬다. 


"문화재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다른 재화들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지만 예술품은 오히려 시간이 더해질수록 가치가 오른다. 그런 것을 박물관에만 모셔두고 '역사의 부산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우리도 우리 문화재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자. 어떻게 하면 '과거의 유산'으로만 간주하기 쉬운 문화재를 사람들이 오늘날로 이어지는 친숙한 존재로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확신하건대 문화재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면 문화재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문화재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나아가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고민으로 기획된 방송이라고 한다. 이는 방송을 바탕으로 최근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천상의 컬렉션>(인플루엔셜 펴냄)의 취지이기도 하다.


방송을 통해 소개한 문화재들 중 무엇을 책에 수록할까 고민, 제작진들이 공통적으로 "심봤다!"를 외친 보물들이나, 드라마틱한 사연이 깃들어 있어 독자들이 사랑에 빠질 만한 보물들을 선정했단다. 때문일까. 책을 통해 만나는 문화재 모두 흥미롭게 와 닿았다. 그래도 우선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이형록 <책가도 10폭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3X352cm)이다.


▲  이형록-<책가도 10폭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2010년 4월 8일에 찍은 것이다. ⓒ 김현자


이 사진을 찍은 것은 2010년 4월 8일. 책가도란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까지 나올 정도로 인상 깊게 와 닿았다. 그동안 보아왔던 병풍들은 풍경을 그린 산수화나 서화, 모란이나 매화, 사군자를 그린 것들이 대부분. 그런데 그와 달리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책장 모습을 그린 병풍이라는 사실이 매우 신선하게 와 닿았다. 


"정조는 책가도를 두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옛날 정자(송나라의 유교 철학자 정명도, 정이천 형제)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책방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조는 소문난 책벌레였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24년의 재위 기간에 150여 가지 분야에서 4000여권 이상의 책을 편찬하고 출간했습니다. 그는 그런 책을 그저 바라만 보아도 즐겁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정조가 책가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규장각일기인 <내각일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번은 정조가 자비대형화원들의 '녹취재'라는 시험에서 자유로이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자유 주제였으나 대부분은 왕의 취향에 따라 책가도를 그립니다. 그런데 그중 책가도를 그리지 않은 화원이 있었습니다. 정조는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 내라는 명이 있으면 마땅히 책거리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거늘, 다른 그림을 그려 실로 해괴하니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명합니다. 자신이 '자유로이' 그리라고 명해놓고 말입니다." - 79~80쪽


경복궁 등 궁궐에 가면 왕이 앉았던 의자인 어좌 뒤에 어느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같은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와, 달과, 다섯 개의 산봉우리, 그리고 출렁이는 파도를 그린 '일월오봉도'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내전에서는 물론, 야외 행사 때에도 왕이 앉는 자리 배경으로 걸렸고, 의궤처럼 공식적인 행사를 그리는 그림에선 왕 대신 그려지기도 했다. 즉, 왕을 대신하기도 하고, 왕의 권위나 힘을 상징하는 그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400년 동안 이어져오던 일월오봉도 전통을 과감하게 깨버린 왕이 있었다. 정조였다. 정조는 당시 궁중화원이었던 김홍도 등에게 책을 꽂은 서가의 모습을 그려 일월오봉도를 대신하게 한다. 


이것이 책을 주제로 그린 책가도라는, 우리나라에서 생겨나 발달한 독특한 장르의 그림이 생겨난 배경이라고 한다. '책거리'는 책가도의 다른 명칭이자, 책을 책장에 꽂은 그림이 아니어도 책을 주제로 그린 모든 그림을 통칭하는 용어라고 한다. 


▲  <책가도 10폭 병풍>(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국립고궁박물관


정조는 그림에 넣을 책 목록을 손수 정해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그려 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로 책가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틈틈이 책가도를 어루만지거나 보곤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애정으로 그치지 않고 많은 책가도를 그리게 한다. 이는 그리 오래지않아 상류층으로까지 번지게 되는데, 나중에는 유행을 지나 열풍까지 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민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형록(1808~)은 앞서 책가도를 그리지 않아 귀양 갔던 이종현의 손자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책가도의 대가로 유명세를 떨칩니다. 양반들은 책만 그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형록은 그러한 요구에 따라 철저히 '고객 맞춤형' 책가도를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책가도를 보면, 온갖 화려한 청나라의 물건들이 눈길을 끕니다. 서양에서 온 물건도 많습니다. 그림을 주문한 고객이 욕망하던 물건들입니다. 


그렇다면 책가도 속의 물건들은 다 어디에서 났을까요? 때는 바야흐로 청나라 열풍이 불던 시기. 당시 양반들 사이에서 청나라는 세상의 중심이자 동경의 나라였습니다. 그와 함께 청나라의 물건들도 크게 유행합니다. 책가도에 등장하는 물건들 대부분이 중국 물건인데 이 출처가 베이징 최대의 골동품 시장, 유리창이라는 곳입니다. 조선 연행단에 의해 유리창의 물건들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한때 한양의 종로 거리가 유리창에서 온 물건들로 도배되다시피 할 정도였습니다. 정조는 중국산 사치품 수입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호화로운 수집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 85~86쪽


정조가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를 그려 놓게 한 것은 단지 책을 좋아해서일까? 매우 이성적이었다는 정조가 단지 책가도를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도화서 화원들을 귀양 보냈을까? 오로지 책이 주인공인, 책만을 빽빽하게 그려 넣은 책가도들을 그리고 또 그리게 해 왕의 그림으로만 머물지 않게 한 것은, 그리하여 조선을 발칵 뒤집을 정도의 책가도 열풍을 일으키게 한 바람과 이유는 무엇일까? 


'내 아버지는 물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붕당을 더 이상 그냥 두지 않겠다. 허세와 모순이 가득한 유교의 틀을 벗어버리겠다. 이제부터 책과 학문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포부이자 정치적 선언 아니었을까. '신하들은 물론 조선의 백성들이 책과 함께 지헤롭고 소박하게 살아가기를, 그런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며'가 아니었을까? 


책가도 이야기는 76쪽부터 89쪽까지. 정조의 책가도 사랑과, 정조에 의해 생겨난 책가도가 어떻게 조선 상류층을 뒤흔들고 민화로까지 번져 가는지 등을 통해 정조의 조선에 대한 꿈과 정치적 이상에 대해, 그리고 조선 후기의 생활상 등을 들려준다. 매우 흥미롭게 말이다. 


▲  이형록-<책가도 10폭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첫번째 그림에선 오늘날 연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연필을 담아놓은 연필통이 보이고, 두번째 그림에선 알뿌리채로 꽃을 피운 수선화가 보인다. 세번째 장식물도 독특하다. ⓒ 김현자


이형록의 책가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도화서 화원은 개인 인장을 찍을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책가도마다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 장식품으로 위장해서 말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2010년 처음 봤을 때 전혀 눈여겨보지 못했다. 이제 다시 책가도를 만난다면 보다 세심하게 살펴볼 것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책에 수록된 문화재들은 25점. 회화·공예·도자·조각·전적, 이렇게 유형에 따라 5부로 분류해 들려준다. 의자왕이 일본 황실에 특별한 목적으로 선물했다는 목화자단기국을 뺀 24점의 문화재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교과서나 책으로, 그리고 책가도처럼 박물관 등에서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선뜻 설명해주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다양한 배경과 관련 인물에 대한 것 등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과거의 일이라 생활과 동떨어진 것들이기 일쑤인데다가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겹치는 등으로 헷갈릴 때가 많았기 때문도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아마도 방송이나 책을 이미 접한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까? '해당 문화재를 뚜렷하게 기억하게끔 쉽고 독특하게 설명해준다. 오늘과 연결 짓고 있어서 더욱 와 닿는다'는 표현에 말이다.  

  

책 덕분에 지난해 부여 가족 여행 중 만난 금동대향로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목화자단기국을 만나러 한성백제박물관(방이동)에 언제 갈까? 김홍도가 그렸다는 용주사 불화(탱화)도 궁금하고,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을 비롯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났던 문화재들을 다시 보고 싶다. 책가도만을 쫒아 박물관 투어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당연히 방송과 책을 몰랐을 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더욱 권하는 책이다. 


▲  이형록-<책가도 6폭 병풍>(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국립민속박물관


▲  장한종-<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 ⓒ 경기도박물관


덧붙이는 글 | <천상의 컬렉션>(KBS 천상의컬렉션 제작팀) | 탁현규(감수) | 인플루엔셜 | 2018-05-28 ㅣ정가 18,000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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