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728151252663


'노회찬 신드롬' 왜? 3가지 키워드로 보는 노회찬

신재희 기자 입력 2018.07.28. 15:12 수정 2018.07.28. 16:53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7일 많은 국민의 애도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정의당은 지난 23일 노 의원이 숨진 이후 5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 동안 서울 3만8741명을 포함해 전국 분향소에서 7만2341명이 조문했다고 밝혔다. 26일 추모제와 27일 영결식에도 수천명이 모였다. 정의당 당원 가입과 후원금도 늘고 있고 지지율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노회찬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추모 열기를 이끈 동력은 무엇인지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봤다.



◆소신 있는 정치


노 의원은 확고한 정치 철학과 소신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평생 노동자와 소외된 이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왔다. 또 오로지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투신했다.


노 의원은 경기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뒤 용접공을 시작으로 노동운동 현장에 몸소 뛰어들었다. 이후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등 오늘날 정의당의 전신이 된 진보정당에서 주춧돌로 활약했다.


그가 여태껏 발의한 법안들을 살펴보면 그가 꾸준히 약자들의 대변인을 자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노 의원은 2004년 여성의 편에서 호주제 폐지 법안을 대표발의했으며, 2007년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 큰 역할을 했다. 2008년에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는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을 가장 처음으로 발의했다. 이밖에 취약층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도 꾸준히 발의했다.


한평생 외길을 걸어온 그의 소신 있는 정치, 신념 있는 정치가 세대와 이념을 초월해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책임지는 정치


노 의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일이다. 노 의원은 17대 국회의원으로 입성한 이듬해인 2005년 8월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했다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결국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해 치른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 재선에 성공했지만 곧이어 대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떳떳했고, 권력에 맞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행했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도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삼성 엑스파일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평생 자신이 몸 바쳐 온 진보정당에 피해가 가선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의 유서에선 이러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노 의원은 그가 남긴 마지막 글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며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고 서술한다. 이어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적었다.



◆서민이 원하는 정치에 대한 열망


노 의원에 대한 많은 국민의 추모 열기는 서민이 원하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 투여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앞장서서 특권 없는 사회,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노 의원이 마지막으로 발의한 법안도 국회의원 특수활동비 폐지였다. 그는 법안을 발의하며 교섭단체 대표로서 받은 특활비도 일괄 반납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특권 없는 국회를 만들 것을 늘 역설해왔다.


그가 늘 주창해온 선거제도 개혁 역시 공고히 자리 잡은 정치 기득권을 깨기 위한 일환이었다. 노 의원은 올해 2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이다. 그 토대 위에서 공정한 사회도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정치 인생 40년 동안 그의 말마따나 ‘썩은 정치판’을 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가 꿈꿔 왔던 ‘정치 판갈이’는 이제 남은 자들의 숙제가 됐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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