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4148
문 대통령이 부른 그 이름, 다섯 해녀들의 기막힌 사연
광복절 경축사에 언급된 제주 해녀 독립운동가 5명...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18.08.19 11:50 l 최종 업데이트 18.08.19 11:51 l 글: 이윤옥(koya26) 편집: 김예지(jeor23)
해마다 8.15 광복절을 서울에서 맞이하다가 이번 제73주년 광복절은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맞이했다. 한국 시각보다 하루 늦은 이곳은 서울에서 광복절 행사가 끝난 다음 날(15일, 현지시각)이 광복절이었다. 이날 LA한인회 주최로 기념식이 열렸다.
기자는 현재 미주 지역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 7일부터 18일까지 현지에 머물면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진행된 '제73회 광복절 기념식' 행사에 참석했다. 어제 기념행사 중에 주LA총영사관 김완중 총영사가 대신 읽은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는 많은 동포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언급한 대목에서는 숙연한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 해녀시위 제주 해녀시위 기사(동아일보 1932. 1. 26~29일치: 해당 부분을 모은 것) ⓒ 이윤옥
"평양 평원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였던 강주룡 지사는 1931년 일제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반대해 높이 12미터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하며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쳤습니다. 당시 조선의 남성 노동자 임금은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조선 여성노동자는 그의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저항으로 지사는 출감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지만,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문 대통령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는 이어졌다.
"1932년 제주 구좌읍에서는 일제의 착취에 맞서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다섯 분의 해녀로 시작된 해녀 항일운동이 제주 각지 800명으로 확산되었고,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 7천 명이 238회에 달하는 집회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구좌에는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기자 역시 제주 지역 여성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여러 번 제주를 찾은 경험이 있어 유달리 이분들의 이름이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거친 바다로 뛰어들어 물질해서 거둬들인 해산물을 헐값에 착취당하던 해녀들의 삶이 뇌리에 스쳐 갔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 강관순 <해녀노래> 가운데
억울한 옥살이와 고문, 그래도 호미 들고 일어난 여성들
▲ 부춘화 부춘화 지사(부춘화기념사업회 제공) ⓒ 이윤옥
부춘화(1908-1995, 2003 건국포장) 지사는 21살이던 1928년 제주도해녀조합(어업조합 전신)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 대표로 뽑혀 해녀회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해녀조합은 힘없고 약한 해녀들을 위한 조합이 아니라 일제에 빌붙은 어용조합이었다. 해녀들이 힘들게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인 주재원으로 하여금 일괄 수납시켜 부당하게 착취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강제적 침탈 행위의 중단을 수차 건의하였으나 시정되지 않자 구좌면 해녀 회원들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며 직접 진정서(9개 항의 요구사항)를 작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7일 일본인 제주도사(도지사)가 제주도 내 순시차 구좌면 세화리를 경유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해녀회장인 나는 동료 김옥련, 부덕량에게 조직적으로 연락하여 구좌면 세화리를 중심으로 한 이웃 자연부락별로 조직된 해녀 1천여 명을 소집시켜 해녀복과 해녀작업 차림으로 무장케 하여 때마침 세화리 시장(경창 주재소 부근)을 지나가는 도사(도지사)의 행차를 가로막고 해녀의 권익옹호와 주권회복을 요구하며 해녀노래를 합창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했는데 이때 제주도사는 혼비백산하여 피신 도주하게 되었다." -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중에서 부춘화 여사 증언 부분
해녀들이 항거하던 시절은 착취라는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였다. 저항하면 잡혀가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해녀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제에 맞서 당당히 저항했으며,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 김옥련 김옥련 지사(김옥련 지사 후손 제공) ⓒ 이윤옥
"일제는 우리 해녀들이 목숨을 바쳐 채취한 전복이며 미역 등 각종 해산물을 헐값으로 빼앗고 각종 세금을 부과해 못살게 굴었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
김옥련 지사가 96살 되던 해인 2003년 10월 22일자 <경남 여성신문>과 나눈 대담 내용이다. 김옥련 지사는 당시 감옥 생활을 또 이렇게 증언했다.
"취조 과정에서 소 채찍으로 맞고, 두 팔을 뒤로 뒤틀리는 고문을 당했으며, 나무봉 위에 무릎을 꿇리고 짓눌리는 등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제주 해녀 삼총사 부덕량 지사 역시 부춘화, 김옥련 지사와 함께 해녀 항일운동을 하다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부덕량 지사는 해녀로 순박한 꿈을 꾸며 살던 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바다에서 캐어 올린 해산물을 번번이 일제 앞잡이들에게 착취당하자 이의 부당함을 깨달았다. 그는 곧 호미와 빗창을 들고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일어난 제주도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해녀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시작한 시위는 항일운동으로 이어졌으나 시위 연루자들을 잡아들이던 일경에 잡혀 부덕량 지사는 여섯 달 동안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덕량 지사는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27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민족의 비극은 언제나 개인의 비극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방치됐던 애국지사 묘... 이제라도 제대로 돌아봐야
▲ 부덕량 제주 구좌읍에 있는 부덕량 지사 무덤은 주변에 안내표지판도 없고 풀이 우거져 찾기가 어려웠다(2015년 현재 , 필자 찍음) ⓒ 이윤옥
부덕량 지사의 무덤은 현재 구좌읍 하도리 문주란섬 맞은편에 있다. 이 무덤은 당시 북제주군이 예산을 지원하여 2006년 4월 4일 이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2015년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 부덕량 지사 무덤 주변에는 안내 표지판도 없을뿐더러 무덤은 언제 풀을 깎았는지 풀이 사람 키만큼 자라고 있는 등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관련 기사 : 고문 후유증으로 27살에 죽은 애국지사의 묘).
2018년 8월 15일 현재, 제주 지역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해녀출신 독립운동가는 부춘화(1908-1995, 2003 건국포장), 부덕량(1911-1939, 2005 건국포장), 김옥련(1907-2005, 2003 건국포장) 지사가 있으며, 이 밖에 교육자로 활약한 이로는 신성여학교(현 신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한 최정숙(1902-1977, 1993 대통령표창) 지사가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언급한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다섯 분의 해녀" 가운데 고차동과 김계석 선생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은 상태다. 아울러 "해녀 항일운동이 제주 각지 800명으로 확산되었고,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 7천 명이 238회에 달하는 집회 시위에 참여했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할 분이 더 없는지 톺아봐야 할 일이다.
그에 더하여 부덕량 지사의 무덤처럼 성역화는 고사하고 관리가 되지 않는 독립유공자 사적은 없는지 다시 꼼꼼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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