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3997
'폭도'에서 '의병'으로... 4백여 의병 살려낸 이 사람
[인터뷰] 의병 연구자 이태룡 박사... 정부 포상 의병 48명 중 44명이 이 박사 작품
18.08.17 14:24l최종 업데이트 18.08.17 15:03l윤성효(cjnews)
정부는 광복절 73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177명을 포상했는데, 그 중에 의병 포상자는 모두 48명이었다. 이 의병 포상자 가운데 무려 44명을 의병 연구자인 이태룡(63) 박사가 신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정부 포상의 내용을 보면 건국훈장 애국장 31명, 건국훈장 애족장 62명, 건국포장 26명, 대통령 표창 58명이다. 부문별로 보면 의병, 3·1운동, 국내항일, 임시정부, 학생운동에 이어 만주·중국·미주·일본 방면 항일투사 등이 들어있다.
의병 포상자를 보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21명은 대부분 교수형을 받은 의병장 또는 의병장급 의병이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22명은 의병활동으로 피체되어 5년 이상의 징역형이나 유배형을 받고 고초를 겪은 분이다. 이외에도 건국포장 2명, 대통령표창 3명 등이 있다. 지역별로 보면 전북 출신 의병장과 의병이 24명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번 의병 공적 포상자 가운데 건국훈장 애국장 21명과 애족장 22명 전원, 건국포장 1명 등 44명은 이태룡 박사가 지난해 포상을 신청한 사람이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포상자 중 눈에 띄는 의병장들이 많다. 1906년 9월경(음력)부터 1907년 8월경 사이 경북 선산·개령·성주 등지에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피체되어 1910년 3월 교수형으로 순국한 충북 괴산 출신의 편군선(片君善) 의병장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또 상주 출신 신돌석(申乭石) 의병장도 이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신돌석 의병장은 경북과 충북 각지에서 활약하다가 징역 7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는데, 그동안 가명의 '신돌석'(본명 신태호) 의병장과 이름이 같아서 포상이 보류되어 오다가 이번에 포상을 받은 것이다.
1908년 '심남일 의진'에서 전남 남부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이인섭(李麟燮)의 서훈도 돋보인다. 특히 이인섭의 아들은 당시 유복자였는데, 그 아들의 손자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훈이 추서되었다. 그는 "이제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라며 목이 메었다고 한다.
이태룡 박사는 오랫동안 의병 연구를 해왔다. 그는 지난해 8월 규장각에서 잠자고 있던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통감부(조선총독부) 통감이 대한제국 의정부 총리대신한테 보낸 문서)을 발굴, 이를 번역해 책으로 출간했다.
▲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의병 관련 자료를 앞에 두고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통감부래안>에는 의병 활동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박사는 그 자료에 근거해, 서훈을 받지 못했던 의병장과 의병장급 의병 29명, 의병 활동으로 전사와 교수형으로 순국하거나 5년 이상의 징역형이나 유배형을 받은 180여 명 등 210명을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다. 10년 전에는 의병(장) 828명을 포상 신청하기도 했다.
지난해 포상 신청자 중에 이번 광복절까지 건국훈장 애국장 36명, 애족장 33명, 건국포장 1명이 포상되고, 140명은 현재 보류된 상태다. 이태룡 박사는 10년 전에 포상을 신청한 의병(장) 중에 약 400명이 포상을 받았으니, 지금까지 의병 공적으로 포상된 2636명 중 약 1/5 정도가 자신이 발굴하여 포상을 신청한 항일투사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이번 광복절을 맞아 의병활동 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자치기관 '경학사'·'부민단'·'부민회'·'한족회'를 이끌면서 신흥무관학교를 통하여 무관을 길러 반일무장투쟁을 벌이고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삶을 조명한 <민족지도자 석주 이상룡>이라는 평전을 펴내기도 하였다.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으로 연구 계속
이태룡 박사는 전북 무주 소재 푸른꿈고등학교 교장을 3년여 남기고 명예퇴직한 후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서울 여의도)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의병(장)들에 대한 정부의 포상 소식을 들은 기자는 지난 15일 경남 김해에 있는 이태룡 박사의 연구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의병 포상신청에다 <민족지도자 석주 이상룡>이란 책을 출간하느라 무더위에 엄청 고생하셨을 것 같다. 어떻게 한꺼번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지.
"한꺼번에 한 것은 아니다. <민족지도자 석주 이상룡>은 15년 전에 내려고 했던 것을 최근에 마무리해서 낸 것이고, 의병 포상은 지난해 신청해서 1년여 심사를 거쳐 이번에 포상이 이뤄진 셈이다."
- 이번 의병 포상자 48명 중 44명, 그것도 건국훈장 애국장과 애족장 전체 43명은 모두 이 박사께서 포상을 신청한 분들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대학은 물론이고 개인도 의병 연구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 연구도 한계가 있다. 특히 의병 후손이 의병 공적을 찾아 포상 신청을 하기가 쉽지 않아 포상 신청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가 지난해 210명을 한꺼번에 한 것이 지난해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3·1절에 28명에 이어 이번에 44명이 포상된 것이다."
- 그러면 210명 중 아직도 138명이 포상이 안 된 셈인데.
"그렇다. 재판기록을 모두 첨부하여 포상 신청을 했지만, 포상기준에 충족하지 못한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일본인 판사나 검사가 의병을 '폭도(暴徒)', 의병장을 '폭도수괴(暴徒首魁)'라 했고, 의병 군수품 모금 활동을 '강도행위'라고 했으니, 실제 '폭도', '강도행위'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탓이라서 '보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알고 있다."
- 판결기록을 보면, 의병인지, 강도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의병연구를 오랫동안 하면, 십중팔구는 구별이 된다. 한 개인이 민간에게 재물을 강청한 경우는 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의병 군자금 마련 차원이라고 5~10명 단체로 활동한 경우는 의병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의병인 경우도 있고, 단체도 떼강도인 경우도 있다."
- 그러면 보류된 분들에 대한 경우는 언제쯤 포상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지.
"그것은 기한이 없다. 다른 자료가 발굴되어 의병활동이 방증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 10년 전 광복절에 828명의 의병(장)을 포상 신청한 적이 있었는데, 실로 엄청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포상 신청자 가운데 몇 분이나 포상이 이뤄졌는지.
"제가 낱낱이 헤아려 보지는 않았으나 지난해까지 대략 300~400명 정도 포상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래도 아직도 포상이 이뤄지지 않은 분이 많이 남았다."
- 아직도 포상 신청할 대상자가 많이 남았는지.
"일제 기록을 보면,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일본 경찰이 간여한 의병 학살을 위한 전투횟수가 1976회, 의병수가 8만 2767명, 순국자가 5721명이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러나 '을미왜란' 전후에 일어났던 전기의병과 을사늑약 전후의 의병 기록, 1909년 이후 의병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한말 의병을 3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10만~15만명이 살상됐거나 투옥되었다고 보고 있으니, 참 많다."
- 지금까지 의병 공적으로 서훈을 받은 분이 몇 명이나 되며, 전체 독립유공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 되는지.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받은 분은 이번 광복절 포상자를 포함하여 2636명이다. 전체 독립유공자 1만 5052명 중 17.5% 정도다."
▲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신청했던 의병(장) 44명이 올해 광복절 때 정부 포상을 받게 되었다. 사진은 이태룡 박사의 의병 관련 연구자료. ⓒ 윤성효
"경남 의병 기록이 있던 진주법원이 방화되어..."
- 이태룡 박사의 가족사에 의병과 관련해 순국하신 분이 있다고 <100년 편지>와 <순국>지에 나온 것을 보았다. 포상이 됐는지.
"… 포상 신청도 못했다."
- 왜 그랬는지? 무슨 연유라도?
"경남지역 의병기록과 재판기록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기록들이 사라졌으니 …."
- 경남의 의병기록과 재판기록이 사라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일제의 의병학살 기록은 엄청나게 많이 있고, 특히 1908년과 1909년 봄까지 경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자는 1500여 명이고, 피체된 자는 1000여 명에 이르지만 재판기록이 불타버려서 없는 것이다."
- 그 재판기록이 언제 불탔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1949년 10월 27일 새벽 2시 당시 진주법원이 방화에 의해 불탔고, 진주경찰서 일부가 불타면서 경찰 조사기록 일부와 재판기록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진주법원은 현재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청이지만,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1925년까지 진주에 있었다. 따라서 한말 경상남도지방법원은 진주에 있었다. 당연히 의병 재판기록은 진주법원에 있었다."
- 그러면 경남지역 의병기록이 없어진 것인데, 누가 왜 진주법원과 진주경찰서에 불을 질렀는지.
"범인은 50여 명의 '인민군 복장을 한 불순분자들'에 의해서 불탔다고 했으나 며칠 뒤 대구고등법원도 방화됐다. 대구고등법원은 일부 재판기록만 불타고 불을 끄게 되어 경북 의병기록과 경남과 호남의 공소 재판기록은 남게 되었다. 그 불순분자는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는 게 당시의 중론이었다."
-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들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들을 불태운 것인데.
"그렇다. 저는 노덕술, 하판락 일행의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처음 듣는 이야기다.
"노덕술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의 악질 경찰이었다고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울산 장생포 출신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경찰이 되었고, 뒤에 통영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고문하는 등 악명을 떨쳐 서울로 갔다.
진주 명석면 출신인 하판락은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아 피를 뽑아낸 후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를 향해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착혈 고문' 외에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지는 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던 악질이었다. 이들의 행적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인민군 복장을 한 50여 명을 동원하여 방화한 후 2시간 동안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진주 시가지를 행진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들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고 판단한다."
- 당시는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일제 앞잡이 경찰을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건가.
"그랬다. 노덕술도 풀려났으니까. 광복 후 수도경찰청, 오늘날 서울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어 오히려 의열단장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는 해체되었지만, 반민특위에 고발된 사건은 대법원으로 이관된 상태였던 1949년, 그 기초자료가 되는 진주법원 기록을 불태웠던 것이라 본다."
- 그렇다고 경남 출신으로서 의병활동으로 포상을 받은 경우가 없지는 않은 걸로 안다. 노응규 의병장은 서훈을 받았는데.
"당연히 받았다. 노응규 의병장이야 전기의병 때 '진주부'를 점령해서 석 달 동안 경남 일원을 의병 천하로 만들었던 분이니, 국내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 신문에도 그 기록이 있다. 더구나 후기의병 때는 당시 충북 황간군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피체되어 충북 청산경찰서를 거쳐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단식으로 순국했기에 그 자료가 있다.
경남 출신으로 당시 진주지방재판소·진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공소(항소)를 하지 않은 분들의 기록은 없다. 공소를 한 분들의 기록은 대구공소원(현 대구고등법원)에 남아 있고, 또 경남 출신이면서 타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국했거나 재판을 받은 분은 타지의 기록에 남아 있어 현재 약 60명이 포상을 받았다."
-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인해 의병 재판기록 등이 사라져서 많은 분들의 포상 신청을 못하시게 된 것인 셈인데.
"저희 큰할아버지는 1870년이고, 할아버지는 1878년생이셨다. 큰할아버지 아들인 당숙은 1890년생으로 1907년에 의병에 참여하여 이듬해 6월 일본군 진주병기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셨고, 그 일로 큰할아버지는 일본 헌병대에 고문에 의해 이듬해 정월에 40세의 나이로 병사하셨다. 당시 당숙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의병이 3명이 순국하고, 몇 명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기록이 사라졌으니, 저희 가첩에야 있지만, 인정받기 어려워 그냥 두고 있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더니 이태룡 박사는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의병 포상 신청은 계속할 것이다. 나아가 경남지역 3·1만세의거로 재판기록이 있으면서 포상이 안 된 분들의 행적을 찾아 올해 안으로 포상 신청을 할 계획이다. 그런 분은 200명 정도 되는데, 그 내용들을 정리 중에 있다. 내년 3·1절 경남 출신 포상 추서자가 대량으로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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