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4532
"며리계!" 조상들이 처음 미국인 보고 외친 말의 뜻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조선인과 미국인의 첫 조우
20.06.02 20:04 l 최종 업데이트 20.06.02 21:19 l 김선흥(ecoindian08)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 땅에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이 전해진 순간]
'한미 간의 최초 접촉'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아마도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가 떠오르겠지요. 불행하게도 두 사건 모두 유혈 낭자한 비극이었습니다. 한미관계는 그렇게 서막을 열었다는 게 아마도 상식일 것입니다. 그게 혹시 잘못된 상식은 아닐까요? 그런 비극과는 전혀 상반된 역사가 묻혀 있는 건 아닐까요? 나, 조지 포크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 사람 간의 최초 접촉은 일찍이 1853년 1월(양력) 부산 앞 바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의 과거 고래잡이에 대해 좀 알아두어야 할 것 같군요.
1850년대는 미국 포경업의 황금시대였습니다. 고수익을 가져다 주는 고래잡이 광풍으로 이미 대서양에서는 고래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포경선들은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뱃머리를 돌렸지요. 다음은 1951년 미국 해군성에서는 발간한 고래 분포 지도입니다.
▲ 고래 해도 1851년 미해군성 수로국에서 제작 ⓒ 미의회도서관
고래 해도 부분도 1851년 미해군성 수로국에서 제작
▲ 고래 해도 부분도 1851년 미해군성 수로국에서 제작 ⓒ 미의회도서관
먼저 첫 번째 지도에 주목해 봅니다. 대서양에는 고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색깔 구분은 고래 종류입니다. 분홍색은 유명한 향유고래(sperm whale)를, 푸른 색은 참고래(right whale)를 나타냅니다.
고래들이 같은 종족끼리 군집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일본 홋카이도 해역이 인기가 높았습니다. 위 지도를 보면 일본에는 국명이 표기돼 있지만 한반도는 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 해역은 포경선들에게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사실은 한국의 동해에도 고래가 많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당시 1800년대의 미국에서는 포경업이 핵심 전략 산업이었습니다. 포경업의 중심지였던 마세추세츠주 소재 뉴 베드포드(New Bedford)라는 항구 도시가 당시 미국 전역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지요(아래 사진 참고).
New Bedford 항 부두 1800년대 고래 기름통으로 가득 참
▲ New Bedford 항 부두 1800년대 고래 기름통으로 가득 참 ⓒ New Bedford Museum
조선 해역에서 미국의 포경선이 출현해 조선인과 조우를 하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하에서였습니다.
1851년 어느 날 뉴 베드포드항에서 출항한 사우스 아메리카(South America)호가 조선 해역에 다다른 것은 1853년 1월이었으니까, 제너럴셔먼호의 대동강 침입보다 13년 전의 일이었지요.
616톤급의 사우스 아메리카호는 일본 훗가이도 해역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중 폭풍을 만났습니다. 오랜 표류 끝에 조선의 부산 앞 바다로 떠밀려 온 것입니다. 이 최초의 조우는 그 전모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 정보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지요. 지금부터 소개하는 이야기는 미국과 한국, 두 나라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조합해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문제의 포경선은 음력으로는 1852년 12월 21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에 조선인들에 의해 목격됐습니다. 조선인들이 노를 저어 배로 다가왔습니다. 포경선 사람들은 밧줄을 내려 조선인들을 배로 올라오도록 도왔습니다.
미국인들은 거리낌 없이 웃으며 조선인들을 맞이했습니다. 세 명의 조선인들은 일본어를 하는 역관들이었습니다. 부산 왜관의 왜인을 접대하는 업무를 담당한 훈도(訓導) 김시경, 일본어 통역관 김정구, 그리고 하급 통역관 김예돈이 그들이었습니다.
배로 올라온 조선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배는 내외부가 호사스럽고 괴이했습니다. 인간들은 더욱 괴이했습니다. 더욱 놀랄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젊은 여성(20세가량)과 너댓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동승해 있지 않겠어요? 조선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여인의 금빛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여인과 아이는 선장 가족이었습니다. 선장 워커(Washington T. Walker)는 1814년 뉴 베드포드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모험적이고 개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출항할 때 겨우 두 살 남짓한 아이와 젊은 부인을 동승시켰던 것입니다.
워커선장의 결혼 내력도 기상천외합니다. 부인이 결핵으로 죽자 그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조선에 온 부인은 바로 그녀였습니다.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보았던 미국 여성인 셈이지요.
그런데 나중의 일이지만 두 번째 부인도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워커는 다시 막내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워커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미지수이지만 고향의 무덤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의 무덤 곁에는 그가 차례로 결혼했던 세 자매도 나란히 묻혀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가 묘지에 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합니다. 한국인과 처음으로 조우한 미국인 가족의 배경이 그러합니다.
워커 선장은 사랑하는 가족 때문이었는지 배에서 가축을 길렀습니다. 소, 돼지, 닭, 오리가 여러 마리 있었고 강아지도 한 마리 있었습니다. 가축 외에도 배에는 대포 1좌, 조총 12자루, 나침반 50개가 있었고, 쌀 12궤, 고래 기름 5통, 말 안장 2건이 있었습니다.
배에는 모두 43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조선 통역관과 서로 언어가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한문을 써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표류한 까닭이 무엇인지를 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붓을 쥐어 주며 글씨를 써보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붓을 쥐어 든 이방인들이 무언가를 써 보였지만 구름 같기도 하고 벌레 같기도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그들에게서 수차례 반복적으로 들었던 단어 하나가 있었습니다. '며리계! '며리계!'였습니다. 조선인들은 그 음을 한자로 '旀里界(며리계)'로 표기했습니다. 다름 아닌 '아메리카! 아메리카!'가 '며리게!'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맨 처음엔 조선에서 '며리계'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미국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화기국(花旗國)이라 불렀습니다. 미국인들은 18세기 후반부터 광저우에 와서 상업활동을 하였습니다. 화려한 미국 국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중국인들은 '꽃같은 깃발의 나라'라는 뜻으로 '화기국'이라 불렀던 거지요.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미국인들이 아메리카산 인삼을 중국에 들여와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는 점입니다. 미국산 인삼을 중국인들은 '화기삼(花旗蔘)'이라 불렀지요.
승선 인원은 총 4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통역관들이 인원을 살펴보던 중 뜻밖의 인간 둘을 발견하였습니다. 거인같은 양인들 속에 쬐그만 왜인 두 명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왜인과는 의사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구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한 동네(오늘날의 아이치현)에 살던 네 사람이 1851년 11월 26일 뗄 나무 장사를 하기 위해 같이 배를 타고 길을 떠났는데 그만 풍랑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배가 파손될 순간에 엄청 큰 이양선이 나타나 구해 주었습니다. 이삭 하울랜드(Isaac Howland)호라는 미국 포경선이었습니다. 네 명 중에 총각 두 명은 그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기로 했고, 처자가 있는 나머지 두 명은 고향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다른 미국 포경선으로 갈아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포경선(사우스 아메리카호)마저 표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배에 섞여 있는 기구한 사연이 그러하였습니다. 물론 왜인들의 소원은 하루 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였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는 미국과 일본이 수교하기 전이었습니다. 때문에 미국 배가 왜인을 일본으로 송환시키는 것은 무척 곤란하고 위험했습니다. 일본 당국으로부터 무슨 고초와 박해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워커 선장으로서는 이 문제가 무척 난감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조난 당한 일인들을 환송시키는 관행이 정착돼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왜관에 인계하면 왜관에서 그들을 일본 땅으로 보내는 절차였지요. 왜인들로서는 조선 바다로 떠밀려온 것이 큰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통역관들은 왜인들과 그들의 물건을 자기네 배에 옮겨 실었습니다. 그리고 관례에 따라 부산 초량의 왜관에 넘겨 일본으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워커 선장은 틈을 내어 조선 해안에 상륙했고 조선인들과 접촉했다고 합니다. 또 해안의 조선인들이 '금발미녀'와 아이를 구경하려고 배로 몰려와 구경하였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인들이 술을 배로 가져와 미국술과 교환해 마시며 갑판 곳곳에서 술판을 벌였다고도 합니다. 미국 내에 틀림없이 보다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40여 명의 승선인 중에 아무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조선인들로부터 식수와 식량 그리고 모포를 제공받은 미국 포경선은 1853년 1월 1일(음력) 저녁 10시경에 닻을 올리고 유유히 조선해를 떠났습니다.
이상이 한미 간 최초 접촉의 얼개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한미 교류사의 첫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비록 양국이 국교를 수립하기 전이었고 서로 외계인 같은 이방인이었지만, 두 나라 사람들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인도적 차원에서 조우했고 협력했습니다. 일본인에 대해서도 그러했지요.
이제 다음 자료에 주목해 봅시다.
▲ 조선 최초의 영어 1855년 알파벳과 영어 단어 ⓒ 박천홍 저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에서
이것이 조선 땅에 전해진 최초의 영어입니다. 이 역시 미국 포경선의 난파 선원이 전해준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과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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