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7287


"조선 백성의 삶이 피폐한 이유는..." 어느 미국인의 보고서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근대 부산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

20.04.03 18:22 l 최종 업데이트 20.04.03 18:22 l 김선흥(ecoindian08)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난생 처음 본 미국인, 부산 사람들의 첫 질문]


지난번에 나는 1882년 6월 6일 부산 해안 마을 사람들이 우리의 진입을 가로 막았던 일과, 나의 임기응변이 성공한 일을 들려 주었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를 보았을 것이오. 이제 사뭇 다른 지도를 펼쳐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갈까 하오.


▲ 조지 포크의 여지도 19세기 중기 조선지도에 영자 표기 ⓒ 미국 지리협회

 

▲ 조지 포크의 여지도 19세기 중기 조선지도에 영자 표기 ⓒ 미국 지리협회

   

▲ 조지 포크의 여지도 19세기 중기 조선지도에 영자 표기 ⓒ 미국 지리협회


이 지도들은 내가 1884년에 조선 땅에 부임하여 손에 넣은 지도(여지도)라오. 무언가 특이하지 않소? 그렇소 나는 조선 팔도의 지명, 섬 이름 모두를 이렇게 하나도 빼지 않고 미국 글자로 옮겼다오. 대마도도 일본식 이름 '쓰시마'라 쓰지 않고 조선인들이 부르는대로 '대마도'라고 기재했었군요. 조선 지도이니 조선인들의 이름을 그대로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이오.


당시 제국주의자들은 현지의 지명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지명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든 지도로 남의 땅을 점령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라는 사람은 시대에 좀 안 맞았던 것 같소. 더구나, 생각해 보시오. 나같은 서양 오랑캐가 한자의 조선 발음을 따서 이렇게 일일이 옮겨 놓는 일이 어디 쉬웠겠소? 그야말로 눈이 빠질 듯한 일이었소. 그때 조선 친구들이 이마를 맞대고 도와주었던 기억이 나오. 


위 지도 중에서 마지막 지도를 봅시다. 지금 지도를 마주 보는 각도에서 왜관(WAEKWAN)의 왼쪽 마을로 우리는 진입했던 것이오, 그때 '셰투(SHETU)'라고 불렀던 마을이 아마 이 지도에 붉은 원으로 그려진 '서평(西平)'이었던 것 같소. 우리는 이 마을을 둘러본 다음 반대편 오른 쪽의 부산으로 이동하였다오. 우리는 세밀히 관찰한 기록을 남겼소. 이제 우리는 서양에 전혀 영향을 받기 전의 오리지널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조선인들의 담배 사랑


해안가에 상륙하여 마을 위쪽 언덕으로 올라갔소. 거기에서 일단 마을을 조망하였다오. 눈 아래 마을의 호수를 일일이 세어 보았소. 약 300호를 헤아렸소. 집들은 평지 이 곳 저곳에 불규칙하게 들어 앉아 있었고 가파른 언덕 배기에도 얹혀 있더군요.


우리는 부산 방향으로 나 있는 윗길에서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오. 길은 외길이었고 좁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우리는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렸다오.


대부분의 집에 손바닥 만한 마당이 있었고 토담이 둘러 쌓고 있더군요. 토담은 돌과 깨진 질그릇 조각(broken earthen-ware),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옥의 행색은 솔직히 형편없었습니다. 진흙, 돌,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이었고 낮은 지붕은 얼기설기 이엉으로 덮여 있었고 아래쪽 처마는 새끼줄에 엮여 있더군.


노상에서 우리는 동네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여자들도 있었는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보았지만 겁을 내는 기색은 없었다오. 많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더러는 일을 하고 있었고 더러는 마당에 하릴없이 앉아 있더군요. 보아하니 낮은 지대의 집에서는 어민들이 살고 위 쪽 부분의 집들은 농가였어요. 


남정네와 아낙들이 허리가 잘룩한 공이를 사용하여 나무로 된 절구통에 곡식을 찧고 있었어요. 많은 아이들이 알몸으로 이리 저리 뛰어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몸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지요. 애기들은 포대기에 싸여 엄마의 엉덩이께 매달려 있었고요.


상점은 보이지 않았고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낌새도 찾아볼 수 없었지요.  쌀, 밀, 푸성귀와 담배, 약간의 조개류와 생선이 우리가 본 유일한 산물이었다오. 담배 잎은 길이가 약 10인치(25.4cm)였으며 색깔이 미국이나 일본산 보다 더 진했습니다. 우리는 궐련을 피워보았지요. 맛이 매우 좋았고(very agreeable), 쿠바 산 시가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조선인들은 골초더군요.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긴 담뱃대를 물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어요. 담뱃대는 가는 구멍이 나 있는 장죽인데 처음엔 그게 지팡이인 줄로 오인하였지요. 그만큼 길었어요. 조선인들은 담배 잎을 단단히 말아서 시가처럼 피우기도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담배가 애호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기후가 담배 재배에 양호한 것으로 보아 필시 조선 땅에서는 많은 양의 담배가 생산되리라고 우리는 추론하였지요.


언덕 위 무덤들의 정체


우리는 마을을 끝까지 둘러본 후에 '왜관' 선창에 정박해 두었던 우리의 보트에 다시 몸을 실었다오. 다시 일본 소년이 노를 저었지요. 우리의 행선지는 부산이었습니다. 일본인 마을 남단과 절영도 사이에 나 있는 좁은 해협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일본인 거류지를 유심히 살폈다오. 일본인 거류지의 주민수는 2000명이 채 못되는데 모두 새로 지은 일본식 가옥에서 살고 있었지요. 집을 지을 때 많은 건축 자재를 종류별로 일본에서 실어 왔다고 하더군요.


한 길을 가운데 두고 그 양쪽 켠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낮은 관목 숲이 가리고 있었지요. 일인 마을의 주요 건물로는 일장기를 게양하고 있는 서양식의 영사관이 있었고 상공회의소, 은행, 미쓰비시 사무실 및 창고, 기타 무역상사들이 있었소.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하나 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찾아와 치료받는다고 하더군요.


조선과 일본의 거래 물품은 일상용품이 주를 이루고 있더군요. 조선의 토산품으로 동물가죽과 뼈, 면제품, 죽제품, 모피, 인삼 등이 일인에게 팔리고 있었고 램프, 시계, 면직물과 같은 서양 물건을  일인들이 들여오고 있었소. 일본에서 건너오는 물건은 소형 범선과 미쓰비스사의 월 1회 정기 증기선으로 운송되어 오더군요.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이 그리 활발하지 못했어요. 조선인들의 구매력이 약하고 내륙 교통이 열악한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일본인 거주자들이 저질(inferior quality of the Japanese settlers)이라는 점도 분명 작용하고 있었소. 비즈니스에 맞지 않는 사무라이 출신 혹은 병사, 쓰시마에서 온 가난한 농민, 갖가지 악행을 일삼는 무뢰배들이 많았으니까요.  


우리 보트는 일본인 거류지 해안가를 지나 북쪽에 배를 댔지요. 우리가 착륙한 곳 인근의 길 위쪽으로 언덕 위에 굉장히 많은 무덤이 흩어져 있지 않겠소? 평평하고 둥근 봉분인데 아마 임진왜란 때 죽은 왜인들의 무덤 같더군요. 길을 계속 걸어가던 중에 거창한 무덤을 여럿 보았어요. 높은 비석들에 한문이 새겨져 있더군요. 일본이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불교 사찰이나 승려 및 종교의식은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가 조선의 종교 상황에 궁금증이 있었던 것은 앞으로의 조선 내 미국인 선교 활동 환경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요. 옛날 조선이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을 때 보다는 그 교세가 훨씬 약하다고는 하지만 민간에 불교가 널리 퍼져 있다고 하더군요.


부산에 사는 한 일본인의 말에 의하면, 부산 지역의 조선인들에게는 종교적 정서가 없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불교 승려들이 조선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중 한 명이 부산 인근에서 피살된 일도 있었더군요. 서양 제국들이 약소국을 무력과 선교사를 통해 점령하는 패턴을 일본이 그대로 본 뜨고 있었던 거지요.


호화스러운 대문과 초라한 가옥


부산 마을 초입에 다가갔는데 이상한 게 서 있었어요. 높이 약 20피트(6m) 높이의 네모진 기둥이었지요. 꼭대기에 괴상한 얼굴 형상이 조각돼 있는데 붉은 색깔이 칠해져 있어 더욱 으스스했습니다. 그건 병마와 악귀를 쫓는 부적(a charm or preventive against sickness and other evils)같은 거라고 조선인들이 말해주더군요.


도로는 외길이었고 거기에서 뻗어 나온 골목길들이 민가로 이어져 있더군요. 집들은 대체로 비슷한 크기에다 생김새도 비슷해 보였어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궁이와 난방 방식이었지요.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거였지요. 우리가 보기에 집들이 작았소. 단칸방으로 이루어진 집들이 많았고 방이 세 개를 넘는 것은 드물더군요. 게다가 방이 쬐그맣더군요.


사각형의 방은 한 변이 고작 7피트(2m+)길이도 안되었고 높이는 고작 5피트(1.5m)였어요. 중국 북부 지방의 초라한 주거와 매우 흡사했으며 일본에 비하면 매우 열악하였오. 취사 도구와 식사 집기는 조악한 것들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요. 의자도 테이블도 보이지 않았고 장식품이나 목공예품도 눈에 뜨이지 않더군요. 가옥의 일반적인 모습은 안이나 밖이나 볼품이 없고 불결해 보였지요. 


동네 사람에게 가게나 상점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더 가면 있다고 하더군요. 얼마쯤 더 가보니 광택이 나는 금속 파이프들이 나와 있었고 어떤 집 앞의 노상에 신발 제품도 진열되어 있더군요. 다른 몇몇 장소에서는 밥과 조리된 음식을 팔기도 하더군요.  대체로 사람들은 게으르고 생기가 없어 보였어요. 최소한의 기본 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아까 언급한 파이프 외에는 어떤 종류의 금속 제품도 볼 수 없었어요.


부산을 관통하여 2.5km쯤 더 걸어 갔을 때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건물이 나타났어요. 중국 풍으로 장식된 높은 대문이었지요. 대문안에는 여태 보았던 집들과는 너무나 다른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관리들의 저택이었어요. 장방형의 관아 터는 넓이가 약 600평방 미터였고 청기와와 돌로 된 담장에 둘러 싸여 있었다오. 담장 높이는 약 4.5미터 정도.


우리가 그 요새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우리를 따라오고 있던 군중의 눈빛이 일순 경계심과 분노로 변하더군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속으로 ' 앗, 뜨거' 하였던 기억이 떠오르군요. 암튼 내부 진입은 포기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우리는 인근의 언덕으로 올라가 담 너머로 내부를 관찰하였지요. 집은 10여 채를 헤아렸습니다. 저택들은 가파른 지붕을 이고 있었고 붉은 색깔의 조각물, 기둥과 베란다가 보였고 중국 건축 구조를 닮았더군요. 그 중에서 가장 큰 저택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것들보다 지붕이 높았고 형태가 특이했어요. 


관리의 착취가 백성의 삶을 피폐시키는 원인이다


이처럼 웅장하고 호화스런 모습은 방금 본 민간인들의 초라한 가옥과 무기력한 모습과 극명히 대조되었지요. 이럴 수가…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어떤 일본인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나더군요.


이곳 관리들은 관직을 사고 진급을 하기 위한 뇌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서 금전을 짜낸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서양인들의 조선 관련 책자들도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지요. 이를 테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어 학습서를 저술했던 존 로스 목사는 <코리아의 역사>(1879)에서 이렇게 적었지요.


"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작은 물고기들은 새우들을 잡아먹으며, 새우들은 진흙을 먹는다."(The big fish eat the little fish, the little fish eat shrimps eat mud).


나는 직접 내 눈으로 이를 확인한 셈이었지요. 우리는 귀국 후 보고서에 조선에서는 "관리의 착취가 백성의 삶을 전체적으로 피폐시키는 원인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생선은 풍부하고 싸더군요. 돔이 많았어요. 한 마리 무게가 약 6파운드(약 2.7kg) 나가는데 일본 돈으로 치면 16센(12센트)정도에 팔리더군요. 동경에서라면 같은 크기의 돔 한 마리가 최소한 100센은 나갔지요.  그러니까 부산이 동경의 6분 1 가격인 셈이지요.


둘러보는 동안 우리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계속 우리를 따라다녔으니까요. 흥미롭게도 일본어를 잘 하는 몇 명의 관리들이 합류하여 우리의 행렬 앞에 서더군요. 그렇게 되고 보니 우리 일행은 조선 관리의 에스코트를 받은 채 군중에 둘러 싸여 움직이는 모양새가 되었지요. 실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지요.


그들은 우리의 파이프로 담배를 피워 보기도 하고 잡담을 하였고 친근한 태도로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오. 당신네 미국인들이 여기 와서 우리와 함께 살거냐는 둥, 큰 집을 지을 거냐는 둥, 자신들과 상거래를 할 거냐는 둥.


귀국 후 보고서 전체를 내가 도맡아 쓰다시피 했는데 조선인에 대한 인물평을 나는 아래와 같이 적었지요. 


"조선인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키가 크고 잘 생겼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풍모와 태도는 일본인이나 중국인 보다 더 의젓하여 외국인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얼굴은 크고 넓어 보인다. 머리통도 매우 커 보였다. 잘 생긴 사람이 많다. 조선인에게서는 중국인의 둔감하고 멍한 표정이나 일본인의 교활하고 약삭빠른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그들의 표정을 대하면서 그들이 솔직하고 정직하며, 수줍어하면서도 붙임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Both Korean men and women were tall and well formed, and in general their personal appearance and manner were more likely to command the respect of foreigners than that of either the Japanese or Chinese in their original conditions. Their faces were broad and features large; their heads appeared very large to us, and many were finely shaped. The stolid, impassive expression of the Chinese, or the sly, crafty appearance so commonly observed in Japan and China, was rarely noticeable among the Koreans; we thought them frank and honest in expression, pleasing though timid.)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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