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582.html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삼남 지방 잇는 한강 수상 요충지…강남의 뿌리는 깊다

강남구 새말 나루터

등록 : 2019-01-31 14:51


9개 한강 전망대 중 가장 먼저 설치된 한남 새말카페 건물 앞 화단에 설치

푯돌 내용 친절한 설명과 거리 멀어, 인근 사평리 나루의 존재 기록 안 해

한국전쟁 때 서울 수복의 전초기지, 이괄의 난 때 인조, 도성 빠져나간 곳

강남의 역사는 1970년 개발 아니라 한성백제까지 올라가면 2000년 역사


한남대교 남단에 설치된 한남 새말카페에서 바라본 옛 새말나루와 강 건너편 한강나루 풍경.


강남구 ‘새말 나루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새말 나루터 푯돌은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최단거리 지름길을 기억하는 장치이다. 푯돌은 강남구 신사동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 안에 있다. 한강의 9개 전망쉼터 중 제일 먼저 설치된 강남구 압구정동 386의1 한남 새말카페 건물 앞 화단에 있다.


한남 새말카페는 한남대교 남단에 설치된 4층짜리 유리전망대 건물이다. ‘레인보우 카페’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을 붙였다가 한남대교의 ‘한남’과 새말 나루터의 ‘새말’을 합쳐 중성적인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작명 과정에서 새말이 한남에 가려진 듯하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4번 출구에서 한남대교를 건너가는 노선버스를 타고 다리 위에서 내리면 푯돌을 만날 수 있다.



푯돌에는 ‘조선 시대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새말(新村)로 불리던 이곳은 한남동 한강나루터와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상업이 성행했던 곳이며, 말죽거리 판교를 지나 남부 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곳임’이라고 새겨져 있다. 옆면에 ‘서울특별시한강사업본부 시설관리과’라는 관리 주체가, 또 다른 면엔 ‘1994년 12월 서울특별시 강남구청’이라는 설치 주체와 설치 연도가 각각 적혀 있다. 서울시가 세운 여타 표준 판석형 푯돌보다 크기가 작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푯돌이라는 직관적 인식을 줘 한번쯤 들여다보고 싶게 하기보다는 어쩐지 피해 가게 한다. 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 소속 전문가들의 치열한 검증과 논의를 거쳐 세워진 공식 푯돌이 아니라서 그런지 ‘~곳’이라는 표현이 짧은 글 속에 4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내용과 문장이 어설프다.


무엇보다 새말 나루의 연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지명사전>에서 ‘새말’이라는 동명을 찾아보면 동대문구 신설동, 서대문구 신촌 등 무려 26개의 유사 지명이 등장한다. 너나없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바뀌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유산이다.


새말 나루의 정체성은 ‘새말’보다 ‘나루’에 방점이 찍히기 마련이다. 본래 이 지역에는 새말 나루와 사평리 나루라는 나루터가 별개로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한남대교 건설과 두 차례의 한강종합개발계획 때 강을 메워 다리를 세우고, 아파트를 짓느라 현재로써는 예측하기 어려운 엄청난 지형 변화가 휩쓸고 지나갔다. 새말 나루가 있던 곳은 한남대교 남단 아래이고, 사평 나루는 지하철 3호선 신사역 근처로 여겨진다.


새말나루와 사평나루를 통합한 신사도선장을 출발한 나룻배(차배)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한남동 한강나루에 도착하는 장면을 찍은 1962년도 사진.


강압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진 1914년 이후 새말 나루와 사평리 나루는 ‘신사도선장’(新沙渡船場)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여기에서 따온 신사동(新沙洞)이라는 동명은 새말의 한자 지명 신촌의 ‘신(新)’자와 사평리의 ‘사(沙)’자를 각각 가져온 ‘억지춘향’식 합성 지명이다.


강남 새말 나루와 사평리 나루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 한강 나루터(한강진)와 서빙고 나루터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신라 진흥왕의 북진정책이 맞닥뜨린 장소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라는 이름으로 운영됐다. 고려는 전국의 도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역과 원 그리고 진도(津渡·나루)를 설치했는데, 이곳에 설치되었던 나루가 사평도였다. 임진강에 설치되었던 임진도와 함께 대표적인 나루였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는 “사평강에 배 띄우고/ 멀리 강줄기 하늘에 이어졌는데/ 배가 움직이니 언덕이 따라 움직이네…”라는 풍류시를 남겼다. 800여 년 전 한강 풍광이다.


한남대교 남단 새말 나루터는 서울~광주~용인~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을 연결하는 한강 수상 교통요충지였다. 19세기 조선 물류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은 김정호의 ‘경조5부도’를 보면 한양의 각 나루에서 삼남 지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광주로, 용인로, 과천로, 시흥로, 시흥간로, 인천간로, 강화로 등으로 세분해 기록하고 있다.


이 중 도성에서 광주를 거쳐 용인으로 통하는 길은 두 갈래였다. 제1길은 광희문~한강나루(한강진)~사평리~양재였고, 제2길은 광희문~서빙고 나루~사평리~양재였다. 서울 한강 나루 혹은 서빙고 나루를 출발한 나룻배는 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 사평리에 도착한 뒤 양재와 용인을 거쳐 청주나 충주로 내려갔다. 상경길은 역순이었다. 아쉽게도 새말 나루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는 사평 나루가 새말 나루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평리에는 사평원(沙平院)이라는 관리와 길손들이 쉬어가는 관영 숙소가 있었다. 근처엔 주막과 장터가 섰다. 지금의 신사동 간장게장 골목을 비롯한 먹자골목의 기원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보면 된다.


9호선 사평역과 6호선 녹사평역 역시 사평 나루와 사평원에서 딴 이름이다. 한강 영 안에 사평리의 영향이 골고루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나루에서 이어지는 양재도(양재대로)는 대로 중의 대로였다. 관찬 백과사전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큰 도로였던 제4로와 제5로가 사평 나루를 건넜다.


국왕이 정사에 참고하는 자료집 <만기요람>에는 “사평장은 송파장과 더불어 전국 15대 장시에 속했다”고 나온다. <강남구 향토문화 전자대전>에 따르면 16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장시(향시)는 19세기 전반 순조 때 전국적으로 1천 곳을 넘었으며 경기도에만 102곳에 이르렀다.


송파장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평장은 점차 상설시장화되어 갔다. 또 <지역정보 포털>에 따르면 “사평장은 한남대교 남단 신사중학교 일대로 추정되는 사평원 인근에 위치했다”고 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번창하던 사평장은 삽시간에 텅 빈 모래벌로 변하였다. 주민들은 다시 새말 부락을 이루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이북의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반농반상의 마을로 변하였다가 강남 개발 이전까지 농업 위주의 생활을 영위했다.


새말 나루와 사평 나루는 18세기 후 한강이 분화·확장하는 과정에서 위상이 다소 위축됐다. 18세기 이전까지 3강(한강, 용산강, 서강) 체제를 유지하던 한강이 상업의 발달에 따라 18세기 중엽에는 5강(3강+마포, 양화진)으로, 18세기 후반엔 8강(5강+두모포, 서빙고, 뚝섬)으로 권역이 확장됐다. 19세기 이후 12강(8강+연서, 왕십리, 안암, 전농)까지 뻗어나갔다. 본래 한강 나루(한강진)는 강북 쪽 한강진에 강남 쪽 새말 나루와 사평리를 합친 개념이었다.


조선 시대는 도성 쪽 한강 나루만 나루로 인식했을 뿐 강 건너 경기도 쪽 나루는 부속품으로 여겼다. 새말 나루와 사평리 나루의 존재감이 한강 나루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말 나루터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나와 한강진에서 강을 건너 맞은편 백사장에 닿았던 바로 그곳이다. 사평원에서 양재로 가던 길에 요기를 했다. 조선통신사 행차가 오가던 길이기도 했다. 남쪽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은 양재역을 지나 사평리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다음 나루를 건너야 했다. 또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의 전초기지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인천상륙작전> 편에 보면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행주 한강도하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미군은 1950년 9월25일 국군 제17연대와 미 보병 제7사단 32연대 병력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사리 나루에서 서빙고 방면으로 한강을 건너 남산으로 진격, 서울을 수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2년 5월 신사동 일대에 아파트가 듬성하게 들어선 모습. 아파트 이외 다른 건물은 짓지 못하게 한 아파트지구 지정 4년 전의 모습이다. 이후 반포지구 167만 평에는 빼곡하게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강북 사대문 안이 ‘조선의 수도’였다면, 강남은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무게중심은 적잖이 강남으로 기운 느낌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강남을 1970년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만들어진 신생지라고 생각하면서 강남의 역사문화가 일천하다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 강남의 오래된 역사 뿌리를 망각한 탓이다.


강남은 기원전 18년, 온조가 개국한 한성백제의 옛터다. 한성백제는 웅진(공주)이나 사비(부여)보다 더 오랫동안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화려한 고대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위례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삼성리 토성,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 등이 모두 백제가 남긴 유적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는 한강 유역 최고, 최대의 집단 거주지였다. 강북보다 강남에 먼저 사람이 살았다. 따져 보면 서울의 기원은 강북이 아니라 강남이라는 증거다.


서울의 역사가 600년에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도 한성백제 때문이다. 한강 수운의 강남 쪽 중심 새말 나루와 사평 나루 옛터는 한성백제와 삼국 시대, 고려 그리고 조선에 걸쳐 오랫동안 천천히 형성됐다. 강남은 1970년대에 갑자기 솟아난 도시가 아니다.


‘한강 새말카페 전경’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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