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432.html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성종 때 공노비만 조선 인구의 10%…임란 때 노비 기관 불태워
종로구 장예원 터 中
등록 : 2019-01-03 15:05 수정 : 2019-01-03 15:08
공노비, 형식적으론 국가·왕실의 재산, 1801년 순조 때 공노비 6만6067명 해방
관아 수족도 대부분 공노비, 관기생도
문무 잡직은 종9~6품 벼슬도 받아, 신분은 미천했으나 당당한 존재, 공노비 남, 양민 처녀에 일등 신랑감
정약용 그들의 신산한 삶 기술, 동족을 노예로 부린 ‘동방예의지국’
국부의 원천인 공사 노비 대장을 보관했던 장예원의 상급 부서인 형조는 경복궁 앞 육조거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고, 장예원은 공조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종로구 세종로 155의 4 장예원 터 푯돌을 찾아 두 번째 길을 떠난다. 노비 문서를 보관하고 노비 소송을 담당한 관청 장예원이 광화문 한복판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잡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조선 양반 관료 사회를 유지하는 최대 밑천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부는 농작물을 생산하는 토지와 인구의 3분의 1을 넘는 노비에 의해 유지됐다. 노비는 국가를 지탱하는 생산력의 원천이었다. 전체 노비 중 10분의 1정도인 공노비는 왕과 왕실 그리고 관청의 손발 노릇을 했고, 나머지 사노비는 양반 소유의 노동력이었다. 가장 중요한 재산인 노비 문서를 왕의 눈에 잘 보이는 장소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비 소송을 통해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사대부와의 이해관계도 완벽하게 합치했다.
공노비는 형식적으로는 국가, 내용적으로는 국왕의 개인 재산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나라 풍속에 따르면 내노(內奴·왕실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의 노비)·사노(寺奴·중앙 관청 소속 노비)·역노(驛奴·역참 소속 노비)·교노(敎奴·향교 등 교육기관 소속 노비) 등의 부류는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족(사대부)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私賤)이라 한다”고 썼다. 공천은 공노비고, 사천은 사노비다. 1801년 순조가 해방한 왕실과 관아 소속 공노비 6만6067명이 바로 공노비다.
왕실과 궁궐을 유지하는 궁녀와 내시, 궁중 내 생활 공간을 관장하는 액정서 별감도 공노비 또는 관노였다. 성균관 노비는 교노에 속하고, 지방 관청의 노비는 읍노(邑奴)였다. 우리가 흔히 관기(官妓)라고 하는 궁중이나 관아에 딸린 기생과 의녀, 다모는 관비(官婢)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의 재산이기에 왕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의 시중과 수청을 들어야 했다. 특별한 경우 관리를 따라 상경해 첩 노릇을 했다. 관비는 국경 지대의 군사를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할 목적에서 생겼다. 세종 때 평안도 영변부에 기생 60명을 둔 데 이어 큰 감영이나 군영에 100여 명씩 뒀다. 전국 330여 군현도 앞다퉈 관비를 보유했는데, 그 수가 수천 명에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집 중 ‘연소답청’. 18세기 한양 양반가 자제들이 기생을 동반해 꽃놀이 행락에 나선 모습이다.
양반 관료 사회의 핵심인 현직 관료를 보필하는 관아의 수족 또한 대부분 공노비였다. 궁궐과 관서의 업무를 보조하는 자리에 공노비를 썼기 때문이다. 1484년(성종 15) 도망간 노비를 찾는 추쇄도감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 340만 명 중 공노비의 숫자는 35만 명이었다. 서울과 지방의 공노비는 26만1984명, 공문서 전달과 숙박, 관물의 수송을 돕는 역참 노비가 9만581명이었다. 공노비들은 각 기관의 열쇠 관리, 서적 인쇄, 화폐 제조, 종이 제조, 요리, 바느질, 말 기르기, 무기 제조, 토목 기술, 악기 연주, 제수 용품 공급, 정원 가꾸기, 그림 그리기 등 문반 잡직이나 각 영의 군인 등 무반 잡직으로 종9품에서 정6품까지 벼슬을 받았다. 신분은 미천했지만 하는 일은 무시 못할 당당한 존재였다.
일례로 구사(丘史)는 나라에 소속된 남자 종이었다. 왕실의 친척인 종친,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정승과 판서는 물론 9품 이상 문무 관리에게 나눠준 수행원 격이었다. 오늘날 고급 공무원에게 자동차나 비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말고삐를 잡거나 교자나 가마를 맸다. 맨 앞에 서서 “○○○ 납신다. 물렀거라!”를 외쳤다.
1904년 밀입국한 스웨덴 아손 기자가 남긴 140여 컷 중 말을 탄 양반을 모시는 노비의 모습.
신분과 품격에 따라 구사의 수가 달랐다. 세종 때 대군은 10명, 정1품은 9명, 종1품 8명, 정2품 7명, 종2품 6명, 정3품 당상관은 5명씩 배정했다. 종3품부터 4품까지는 3명, 5품부터 9품까지는 2명씩 배분했다. 왕의 눈과 귀 구실을 하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5~6품 대간에게는 1명을 추가 배정했다. 관청에도 소속 구사가 배속돼 출퇴근 때나 행차 때 안내 역할을 했다. 노비 담당 부서인 장예원에는 자체 인원과 다른 기관의 부족분을 메워주기 위한 262명의 여유 인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관원의 품계와 지방 관아의 규모에 따른 숫자가 적혀 있다. 병마절도사 200명, 수군절도사 120명, 부사 600명, 대도호부와 목사 450명, 도호부 300명, 군 150명, 현 100명, 향교 10~30명씩 배당했다.
이들은 4교대로 출퇴근하면서 심부름과 잡일을 도맡았을 뿐 아니라 소속 상전이나 관청 업무가 잘못되면 구금되거나, 볼기나 채찍을 맞았다. 구사가 잡혀가면 상전은 바깥출입을 못했다. 관리와 공직의 기강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법 집행을 맡은 소유(所由)도 공노비 신분이었다. 세종 대에 90명이 사헌부 직속 상전의 명에 따라 법 집행의 촉수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광대, 기생, 백정, 대장장이·옹기장이, 무당, 승려, 상여꾼과 함께 8가지 부류의 천민 즉 팔천(八賤)에 속했지만 같은 노비라도 공노비는 당당했다. 양민이나 사노비보다 월등한 대접을 받았다. 관아에서 일하는 여비가 출산을 하면 한 달, 남편 종에게는 16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했다. 따라서 천민들은 물론 양민까지도 역참 노비와 같은 공노비가 되고자 했다. 서슬 퍼런 사헌부 복장을 차려입은 소유와 구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양인 처녀는 물론 관비, 사비들에게까지 일등 신랑감으로 꼽혔다.
공노비들은 행복했을까.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시노는 온종일 뜰 위에 서서 상전의 명을 기다려야 했고, 수노는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건을 사들였다. 공노는 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고, 구노는 말을 기르면서 원이 나들이할 때 양산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방노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변소를 돌보는 일을 했으므로 방자라고 불렀다. 관노들 가운데 보수를 받는 자는 부엌에서 일하는 포노와 주노, 창노뿐이다”라고 안타까운 지방 관노들의 노역 실태를 그렸다.
아손 기자가 찍은 서울의 기생. 노주석 제공
임진왜란 때 누가, 왜 장예원에 불을 질렀나. 서울대 이영훈 명예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노비제를 비교할 때 고려의 노비들은 도합 10회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선의 노비들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1198년 만적의 난 당시 ‘장상(장군과 재상)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면서 노비의 주인을 모조리 죽인 다음 스스로 장상이 되고자 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조선의 공노비들은 고려 노비가 못한 일을 해냈다. 형조와 장예원에 보관된 공사 노비의 호적을 불태워버려 노비제의 해체와 신분 해방을 주도적으로 쟁취했기 때문이다.
실제 16세기 조선을 집어삼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은 철옹성 같아 보이던 노비제의 근본을 흔들었다. 군역을 질 양민이 부족하자 조정은 군공을 세운 노를 해방하거나, 무과에 응시할 기회를 줬다. 곡식을 헌납한 노비를 해방했다. 노비들은 기회가 올 때마다 도망쳤다. 세조 때 척신 한명회는 “공노비 45만 명 중 10만 명이 도망 중”이라고 했다. 실제 지방에 떨어져 사는 사노비의 상속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다수의 노비는 도주를 계획하고 결행했다. 그들은 서북 지방이나 해안, 섬으로 달아났다. 1655년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해 도망 노비의 실태를 조사했다. 171년 전 35만 명에 이르던 공노비의 수가 19만 명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노비대장이 사라져 확인할 길도 없었다. 영조 때 도망간 노비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는 추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신분을 세습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신분 차별 제도로 꼽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맞먹는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분의 대를 물리지 않았다. 동족을 노예로 부리면서 스스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짓이었다. 노비의 존재 양태와 노비 신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노비는 궁궐과 관아에서 왕이나 관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신분 상승의 기회도 많았다. 우리에게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은 조선 역사상 가장 출세한 여인이다. 궁녀 출신으로 살아서 왕비가 된 유일한 사례이다. 궁녀이기 이전에 여종의 딸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장옥정의 아들 경종은 어미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종모법에 따라 노비여야 하지만 제20대 왕위에 올랐다.
21대 왕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도 ‘나인 최가 복순’이었다. 고아로 인현왕후의 시녀로 입궐해 궁녀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다. 공식 기록상 600여 명에 이르는 공노비 나인 중 한 명이었다. 장희빈과의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왕의 어머니가 됐다. 다행히 영조와 22대 정조는 ‘노비도 백성’이라는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노비 제도는 한국 전근대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는 열쇠이다.
※ 장예원 편은 애초 상·하로 고지됐으나 필자의 요청에 따라 상·중·하로 세 번 나갑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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