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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취급 받던 흥선대원군? 영화 '명당'과 실제 역사의 차이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명당>이 덮은 실제 역사

김종성(qqqkim2000) 18.09.18 14:50 최종업데이트 18.09.19 15:58 


[기사보강 : 9월 19일 오후 4시]

 

▲<명당> 포스터.ⓒ 주피터필름


영화 <명당>은 땅에 대한 인간 욕망을 극대화시켜 표현한 영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희구하는 '땅'은 지대나 임대료 혹은 농산물을 산출하는 땅이 아니라, 가문을 영광되고 풍요롭게 해줄 영험한 땅이다. 이런 땅을 쟁취하고자 안동 김씨와 조선 왕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 3자가 벌이는 이전투구가 이 영화의 뼈대다.


왕실보다 더 강했던 안동 김씨는 영화 속에서 장동 김씨로 등장한다. 장동 김씨는 고려 왕건의 통일전쟁에 협력하고 안동에서 세력을 확보한 김선평의 후예를 지칭한다. 종래 이 집안도 안동 김씨로 불렸지만, 장동 김씨 혹은 신안동 김씨로도 부른다.


19세기 초중반 세도정치 시대를 풍미한 영화 속 장동 김씨는 왕실을 계속 억누르고 권세를 이어갈 목적으로 명당 확보에 주력한다. 장동 김씨가 최대 역점을 두는 일은 명당을 감별할 지관의 확보, 그 지관을 앞세운 명당 찾기다.


지대나 임대료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수확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명당에 대한 영화 속 장동 김씨의 욕망은 탐욕스러울 정도다. 한양 주변 왕릉들 바로 옆에 은밀히 자기네 조상들의 무덤까지 조성해둔다. 죽은 왕을 신으로 떠받들던 왕조시대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장동 김씨는 더 나아가, 2대 천자를 배출한다는 비밀 명당을 수색하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이 명당을 장동 김씨한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흥선군(지성 분)도 지관 박재상(조승우 분)과 함께 경쟁에 뛰어든다는 게 영화 스토리다.

 

▲지관 박재상(조승우 분).ⓒ 주피터필름


명당에 대한 탐욕


<명당> 등장인물들의 욕구 자체는 인간 현실과 다르지 않다. 현대인들도 권력과 부를 갖게 되면, 명당에 대한 욕구를 갖곤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군사력을 동원하면서까지 명당을 얻고자 한다. 사병을 동원할 수 있는 처지라면, 현대인들도 영화 속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명당에 대한 욕망을 중심으로 세도정치 시대를 다루다 보니, 이 영화는 관객들이 시대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지장을 주고 있다. 영화에서는, 명당을 감별하고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시의 주된 권력획득 수단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초중반을 이끄는 정치적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표출되지 않는다.


세도(勢道)정치란 말 그대로 '힘에 의한 정치'다. 시스템에 의한 정상적 정치와 상반되는 것이다. 이런 용어가 나온 것은 기존의 정치 시스템이 19세기 초중반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당쟁이 한창일 때는 동인당 계열과 서인당 계열이 상호 견제하며 시스템에 입각한 정치를 펼쳤다. 그러다가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시행한 1700년대 초중반 이후로는, 비교적 강력한 군주들이 각 정파의 이해관계를 억누르며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는 국면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런 질서가 흐트러졌다. 정확히 말하면, 정조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조가 강력한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만 10세 된 순조가 정조를 이어 왕이 되자, 영·정조 시대의 탕평을 더 이상 계승하기 힘들어졌다. 정파들의 목소리를 제어하면서 탕평을 시행하자면 군주가 강력해야 하는데, 열 살짜리 임금한테 그런 능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탕평책 이전의 고전적 당쟁 시대로 당장 회귀하기도 힘들었다. 영·정조 때 약 70년간 탕평이 시행되는 동안, 공식적 정파 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약 70년간 제 기능을 못한 시스템이 정조 사망과 함께 갑작스레 부활할 수는 없었다.


강력한 군주가 없어 탕평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약 70년 공백 때문에 당쟁 정치가 갑자기 부활하기도 힘든 틈을 놓치지 않고. 왕실 외척(사돈)들이 권력 전면에 전격 부상했다. 정조 사후에 순조·헌종·철종처럼 어리거나 무능한 왕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예전의 당쟁 시스템이 복구되지 않은 틈을 타서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가 세도 가문으로 부각됐다.


이들은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이용해 정치에 개입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세도시대에는 이런 가문들이 정파 혹은 정당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 속 장동 김씨(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김좌근(백윤식 분).ⓒ 주피터필름


명당에 집착한 안동 김씨와 흥선군?


안동 김씨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하게 세도를 행사한 정파다. 이 가문이 경주 김씨와 풍양 조씨를 제치고 이 시대의 대표 가문으로 떠오른 것은, 당시의 정치 생리에 가장 잘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장동 김씨는 왕실 무덤보다 더 좋은 명당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실제의 안동 김씨는 왕실과의 인척 관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지켰다. 순조의 부인을 배출하고 장인을 배출한 가문이라는 이점을 그들은 극대화시켰다.


이 같은 세도정치의 생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과 더불어, <명당>이 잘못 보여준 것은 흥선군의 처지와 정치적 원동력이다. 그가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명당 찾기에 주력했다는 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


흥선군의 처지와 관련해 이 영화는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이 창조해낸 '상갓집 개, 흥선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흥선군이 안동 김씨의 핍박을 받으며 서럽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1933년 4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소설에 근거한 것이다.


흥선군이 아들 고종을 왕으로 만든 시점은 음력으로 철종 14년 12월 13일, 양력으로 1864년 1월 21일이다. 수많은 역사책과 백과사전에는 1863년으로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1864년이다.


이보다 12년 전 일을 다룬 철종 3년 7월 10일자(1852년 8월 24일자) <철종실록>에는 선비들의 여론을 대변하는 홍문관 관원이 "종친(임금 친족)들이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라는 상소문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아버지 남연군, 형 흥인군과 더불어 흥선군이 모범적인 왕족이었음을 보여준다. 상갓집 개처럼 취급되고 왕족의 체통을 상실했다면 이런 상소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지성 분).ⓒ 주피터필름


또 구한말 정치평론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흥선군의 집인 운현궁에 왕의 기운이 감돈다는 소문이 이미 철종 때부터 퍼졌다고 했다. 그 집안에서 왕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런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다. 이런 소문이 퍼지는 상황에서, 소설 <운현궁의 봄>이나 영화 <명당>에서처럼 안동 김씨가 흥선군을 거지처럼 대하고 마구 쥐어박는 일이 과연 벌어질 수 있었을까.


안동 김씨는 왕실과의 인연을 무기로 세도를 행사했다. 이런 가문이, 차기 임금을 배출할 가능성이 있는 흥선군 집안을 박대할 수 있었을까? 왕실과의 인연을 중시하는 안동 김씨가 그런 무모한 일을 벌였을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실제의 흥선군은 영화에서처럼 안동 김씨를 이기기 위해 명당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도 명당을 희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목적에서는 아니었다.


사실, 흥선군은 명당 문제와 관련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 남연군의 묘지를 명당 터에 조성한 것은 물론이고, 흥선군 자신이 거주하는 운현궁 자체도 명당이었다.


그의 집에 운(雲)현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집이 예전에 서운(雲)관 터였기 때문이다. 서운관은 기상관측뿐 아니라 천문과 역법 등도 다뤘다. 명당을 감별하는 지관들이 배치된 관청은 아니지만, 점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이곳에 근무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운관을 좋은 터에 잡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런 서운관 터에 운현궁이 들어섰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한테는 이 집도 좋은 터가 아닐 수 없었다.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 김종성


명당에 집착하다가 고증을 무시한 영화


<매천야록>에 따르면, 1850년경부터 '서운관 터에서 성인이 나실 것'이라는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운현궁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소문도 그 시기에 나돌았다.


이렇게 이미 명당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실제의 흥선군은 영화에서처럼 명당 때문에 목숨을 걸이유가 없었다.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집안에서 왕을 배출하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영화에서처럼 좋은 지관을 확보하는 게 아니었다.


왕족이지만 적통이 아니기 때문에, 흥선군 가족이 왕이 되려면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흥선군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 대비의 지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흥선군은 조 대비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했다. 이 승인이 흥선군의 정치적 원동력이었다. 명당 확보가 아니라 대비의 승인 확보가 그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영화 <명당>은 영험한 땅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랜 욕구를 잘 보여주었다. 좀 과장되기는 하지만, 명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명당에 대한 욕구를 과도하게 부각시킨 탓에 세도정치 시스템을 잘못 설명했다는 점, 흥선군 이하응의 처지와 관련해 소설 <운현궁의 봄>이 만든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흥선군의 정치적 원동력을 잘못 설명했다는 점에서, 19세기 초중반 역사를 올바로 보여주기에는 충분치 않은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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