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405.html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숭례문 앞에 있던 큰 연못…화재 방지·‘남인’ 부침 상징

중구 남지 터

등록 : 2018-05-17 14:37 수정 : 2018-05-18 13:59


시청역 8번 출구서 상공회의소 쪽, 무미건조하고 불친절한 푯돌 유감

숭례문 화재 때 복원 거론됐으나 무위, 행정당국 무지와 예산 낭비 아쉬워

“한양정도 때 관악산 화기 막고자 파” ‘남지 복원하면 남인 성한다’는 속설

남지 터 접한 칠패길은 조선 3대 시장, 남지 터 있는 봉래동은 일제 잔재 지명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 대로변에 서울의 남쪽 연못인 남지 터 푯돌이 서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쪽으로 30m 왼쪽에 있었으나 본래 있던 자리에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서울 중구 봉래동1가 104의1 옛 남지(南池·남쪽 연못)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남지 터를 알리는 푯돌은 1호선 서울역 3번 출구에서 240m쯤 남대문 쪽으로 직진하다보면 숭례문 건너편 모퉁이에 서 있다. 2호선 시청역 8번 출구에서 대한상공회의소 쪽으로 방향을 잡아 530m쯤 걸어 만나는 칠패로 건너편이기도 하다.


남지 터 푯돌에는 ‘서울 도성(都城)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이라는 설명문이 적혀 있다. 관광입국(관광으로 국력을 길러 나라를 번영하게 함)과 스토리텔링 시대를 비웃듯 무미건조하고 불친절하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푯돌인가.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서울 시민에게조차 감흥을 주지 못한다. 푯돌의 설명을 보완하거나 존재 가치를 알리는 보조 설명이 필요하다.


위치도 어정쩡하다. 푯돌은 치과의원 간판이 걸린 HM빌딩 앞 모퉁이에 겸연쩍은 모습으로 서 있다. 세종대로 큰길과 세종대로5길이 교차하는 사각이다. 늘 이 모양이다. 보행도로 변에 놓이다보니 후미진 곳이나 전봇대 사이로 내몰린다. 잠깐 방심하면 놓치기 십상이다.


이 푯돌은 1998년부터 중구 봉래동1가 4의2 우남빌딩 앞에서 숭례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2008년 숭례문이 홀랑 불탄 뒤 새로 지으면서 남지도 복원한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무위로 돌아가고, 푯돌만 세종대로 변으로 슬쩍 이전했다. 직선거리로 30m쯤 서울역 쪽으로 옮긴 것이다.



푯돌이 있던 자리 앞 도로에는 자전거길이 조성됐다. 칠패로와 세종대로5길에 둘러싸인 삼각형 자투리 도로에는 기와를 씌운 낮은 담과 잔디밭을 만들었다. 어디에도 접근로는 없다. 우남빌딩 1층 카페 전용 정원으로 쓰이게 생겼다. 작으나마 이곳에 남지를 재현했더라면 어땠을까. 땅의 역사와 정체성을 외면한 행정당국의 무지와 예산 낭비가 아쉬울 따름이다.


정확한 위치 고증이 이뤄져야 한다. 연못이 있던 제자리 가까이 옮겼다곤 하지만 숭례문오거리라고 하는 요지의 길목에서 사람의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는 대로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좀더 정확한 위치는 현재보다 30m쯤 서울역 쪽으로 내려간 남대문로5가 1의1 창화빌딩 앞이라는 주장도 있다. 우남빌딩은 조선 초기부터 집들이 있던 자리이고, 세종대로5길도 1920년대 뚫린 길이다.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을 바라보면 학교 운동장 크기의 큰 연못이 있을 만한 장소는 창화빌딩 어림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청동용두(靑銅龍頭)의 귀(龜)’는 1926년 남지 옛터에 건물을 짓던 중 발견됐다. 용머리를 한 청동 거북 속에서 ‘불 화(火)’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 ‘물 수(水)’를 그린 종이가 나왔는데 숭례문 앞에 큰 못을 파서 묻었다는 풍수 지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용두의 귀. 1926년 남지 터에서 발견됐다. 연합뉴스


이후 메웠다가 다시 파기를 반복한 서울의 남쪽 연못은 화재 방지용 풍수 장치 중 하나이면서, 남산 아래 기반을 둔 남인 세력의 부침을 상징했다. 성종 때 척신 한명회는 “한양 정도 때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고자 숭례문 앞에 못을 파 남지라 일컬었는데도 불이 끊이질 않자 백성의 관심 밖에 나서 메웠다”며 복원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쟁의 희생물이기도 했다. ‘남지를 복원하면 남인이 성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순조 때 남지를 복원하자 “이전에 이 못을 복원했을 때 남인 허목이 득세하더니 이번에는 누가 득세할까” 하는 말이 나돌았으며 결국 남인 채제공이 세도를 얻었다.


서울역 쪽에서 숭례문을 바라보고 찍은 1900년대 초 사진. 왼쪽 사람 뒤로 남지로 추정되는 연못이 보인다.


1907년 요시히토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전염병의 온상으로 지목된 남지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매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불과 그 10년 전인 1896년 4월11일자 <독립신문> 잡보란에 ‘… 어떤 사람이 고니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그 마을 사는 이가 10냥을 주고 사다가 숭례문 앞 연못에 넣어주었다. … 고니는 날아갈 생각을 않고 주야로 노니는데… 그 유유자적한 정취가 여느 새와 달라 격이 높아 보인다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메워지기 전 고니가 노니는 남지의 풍광이 볼만했다는 얘기다.


남지를 그린 그림 3장이 전한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 도화서 화원 이기룡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는 보물 제866호로 지정돼 있다. 70세 이상으로 정2품을 지낸 원로 고위 문신 12명으로 구성된 기로소 회원들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는 그림이다. 연꽃이 핀 연못을 중심으로 좌우에 버드나무 세 그루를 배치했다. 인조 7년(1629) 6월5일 숭례문 밖 남지 부근 홍첨추의 집에 모여 연꽃을 감상하는 기로소 회원들의 계모임을 그렸다고 하나 참석자는 이귀 등 인조반정의 주역인 서인 원로들이다. 남인의 근거지에 모여 세력 과시 중이다. 윗부분에는 전각이 있고, 술잔을 나누며 모임을 즐기는 12명의 원로와 시종들이 등장한다. 전각 아래로는 연꽃이 만발한 연지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숭례문과 성곽을 상대적으로 작게 그렸다.


서울대 박물관 소장 ‘남지기로회도’. 기로소 회원 모임을 그린 1629년도 작품으로 숭례문과 남지의 옛 풍광을 엿볼 수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1호인 개인소장품과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한 그림도 도화서의 다른 화원이 그린 임모본(글씨나 그림 등을 보고 옮겨 쓰거나 그린 그림) 등으로 추정된다. 숭례문이나 남지의 위치와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남지 터가 접한 칠패길은 종로의 ‘시전’, 동대문 ‘배오개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힌 ‘칠패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남대문, 염천교, 중림동 일대이다.


여기서 ‘칠패’(七牌)는 지명이 아니라 도성을 수비하는 금위영 소속의 일곱 번째 순찰구역을 맡은 7패 부대가 주둔하던 곳에서 따왔다. 칠패길이라는 지명은 겨우 살아남았다. 도로명주소법 개정 때 부동산 가격 상승을 노린 일부 주민이 ‘세종대로○○길’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남지 터가 있는 봉래동은 일제 잔재 지명이다. 이곳은 원래 한성부 서부 반석방이었고,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다고 하여 ‘연지계’라 했다. ‘봉래’라는 지명은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청군에게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일본 거류민이 일본군의 극적인 승리로 위기를 모면하자, 마치 지옥에서 신선이 사는 봉래산으로 올라간 기분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봉래정’이라고 이른 데서 기원한다. 유감스럽게도 광복 후 반석동이나 연지동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마포에 부린 전국에서 올라온 어류와 곡물을 팔던 칠패시장의 전통을 이은 ‘중림시장’이 있는 중림동 또한 조선시대 유서 깊은 지명인 ‘약전중동’과 ‘한림동’에서 ‘가운데 중(中)’자와 ‘수풀 림(林)’자를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정체불명의 합성 지명이다. 푯돌과 지명이 떠돌고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l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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